<6화>
“엄마라니?”
마부는 얼굴을 더더욱 찌푸렸다. 의심이 깊어져 가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카리나의 생각에도 그랬다.
엄마라니! 카리나는 겨우 스물셋이었다.
아무리 결혼을 일찍 했다고 해도 여덟 살 먹은 자식이 있을 만한 나이는 아니란 말이었다.
‘뭐든 말해야 해. 정신 차려, 카리나!’
다행히 입은 움직였다.
말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입에서 튀어나갔다는 게 문제였지만.
“남편이 일찍 죽었어요. 둘은 전 부인의 아이들이고요. 살길이 막막해 친척이 사는 토르스로 가려고 해요.”
“……!”
카리나는 마부들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얼떨결에 정답을 골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졸지에 죽은 남편의 아이들을 떠맡게 된 젊은 과부.
자신과 아이들의 나이 차, 그리고 닮지 않은 외모까지 모든 걸 설명하는 방안이었다.
마부들은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고생이 많았겠군요.”
카리나는 웃으며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지난 일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만 생각해야죠.”
이 말만큼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 * *
꿈에도 그리던 여행길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시내를 벗어날수록 점점 더 심하게 덜컹거리는 마차 때문인지 아이들은 겁을 잔뜩 먹은 채 웅크리기만 했다.
카리나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아이들이 힘들어할 때마다 달래주는 것뿐이었다.
“물 좀 마실래?”
롤랜드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며 몸을 늘어뜨렸다.
‘이게 멀미구나.’
하지만 카리나는 아이들의 멀미를 달래줄 그 어떤 방법도 몰랐다.
카리나 자신은 멀미를 전혀 느끼지 못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았을걸…….’
앞으로 남은 여행길을 생각하니 눈앞이 더 막막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덮개 안은 점점 어두워져 급기야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했다.
해가 완전히 진 모양이었다.
등잔과 양초를 챙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어둠을 밝힐 그 어떤 도구도 없었다.
평소 아이들이 자던 시간보다는 다소 일렀지만, 지금은 잠을 자는 게 최선이었다.
카리나가 짐가방으로 아이들의 베개를 만들어주고 외투를 펼쳐 이불처럼 덮어 주려던 때였다.
새파란 불빛이 확 피어올랐다.
롤랜드였다.
“롤랜드.”
카리나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꺼. 아픈데 무리할 필요가 없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기는. 지금도 식은땀 뻘뻘 흘리면서.”
카리나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저택에서 카리나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지만 돈 관리를 맡은 덕에 어떨 때 돈이 들어오고 어떨 때 빠져나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크게 앓기라도 한다면?
카리나와 아이들이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료품만큼의 돈이 허공에 날아갈 것이다.
‘토르스에 도착하면 바로 일자리부터 구해야겠어.’
카리나는 10년이 넘게 하녀로 일했다.
쓸고 닦는 것엔 자신이 있었다. 돈을 어느 정도 만져봤으니 돈 계산도 충분히 가능했다.
일자리를 찾는 거야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애들도 자기들끼리 잘 지낼 거고.’
누군가가 렝케 경처럼 괴롭히지 않는 이상, 아이들은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둘이서 잘 지내리라.
‘우린 잘 지낼 수 있어.’
카리나는 속으로 단단히 다짐한 뒤, 롤랜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자야 하니 불을 끄렴. 환한 곳에서 자고 싶은 건 아니지?”
롤랜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가 했더니 이내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카리나는 아이들이 쌕쌕거리며 고른 숨을 내쉬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짐마차의 벽면에 기댄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허리야…….’
카리나는 허리가 배기는 통증에 잠에서 깨어났다.
“으으…….”
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벽에 기대 잔 게 잘못된 선택이었던 모양이었다.
카리나는 이리저리 기지개를 켜며 아이들을 살폈다.
‘귀여워라.’
아이들은 서로에게 꼭 붙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카리나는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먼저 잠에서 깬 건 롤랜드였다.
롤랜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잠에서 덜 깬듯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카리나가 그를 안심시켰다.
“마차 안이야.”
롤랜드는 한결 안도하는가 싶더니 별안간 깜짝 놀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디 아프니? 또 어지러워?”
“아, 아뇨.”
“정말? 어제는 멀미가…….”
“이제는 괜찮아요. 익숙해졌나 봐요.”
“다행이다.”
카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가 토르소까지 도착하려면 일주일은 걸릴 것이다.
그동안 아이들이 계속 멀미에 시달린다면 도착하기도 전에 큰 탈이 날 게 분명했다.
“배고프지? 속만 괜찮다면 지금 뭐라도 먹어 두자. 언제 또 멀미가 심해질지 모르니까.”
“멜리사는요?”
“음식은 충분하니까 일어날 때까지 내버려 두자. 얼마나 피곤하겠어.”
롤랜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멜리사가 둘의 대화에 깬 모양인지 몸을 이리저리 비척거렸다.
“멜리사, 일어났어?”
“우응…….”
멜리사는 무어라 한 마디 내뱉었으나 잠에 취한 탓인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멀미는?”
“갠차나요…….”
혀가 풀렸지만 어쨌든 알아들을 수 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모, 모…….”
다시 웅얼거림이 되어버렸지만.
“뭐라고?”
카리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멜리사에게 되물을 때, 롤랜드가 잽싸게 카리나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물병을 꺼냈다.
“멜리사한테 줘도 돼요?”
“응? 당연하지.”
카리나는 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멜리사는 목이 마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잠깐만, 너희들 컵도 따로 챙겨왔어.”
카리나는 롤랜드에게서 물병을 건네받은 다음 작은 양철 컵을 꺼내 물을 따랐다.
“마셔.”
멜리사는 두 손으로 컵을 꼬옥 붙들고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카리나는 흐뭇하게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뭔가를 먹고 마실 수 있다면 아플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한결 덜어진다.
카리나는 잽싸게 가방에서 주먹만 한 슈크림을 두 개 꺼냈다.
렝케 경의 식사를 통째로 챙겨온 탓에 가방엔 그동안 멜리사는 구경도 못 했을 고급 음식이 가득했다.
기껏해야 이틀이면 다 떨어지겠지만, 분명 상단은 중간 경유지에도 들를 테니 그때그때 내려서 새로운 음식을 사면 그만이다.
“슈크림 좋아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롤랜드와 달리 멜리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카리나의 손에 들린 슈크림을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며 바라보았다.
‘좋아하는군.’
카리나는 웃으며 아이들에게 슈크림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멀미가 가시니 허기가 몰려오는 모양인지 아이들은 순식간에 슈크림을 먹어치웠다.
특히 멜리사는 평소에 달콤한 디저트를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탓인지 손가락에 묻는 크림을 자꾸만 핥아 먹을 정도까지 좋아했다.
롤랜드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슈크림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만 먹어요?”
“나는 더 맛있는 걸 먹을 거란다.”
카리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에그타르트를 입에 넣고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맛을 음미했다.
“그것만 먹어요?”
“너희도 그게 끝이야.”
“그래도, 우리 빵이 훨씬 컸는데…….”
“비슷해, 비슷해.”
카리나가 손사래를 칠 때였다.
느닷없이 롤랜드의 질문이 날아왔다.
“카리나, 화 안 났어요?”
“뭐가?”
카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라니?
자신은 그저 아이들과 함께 빵을 먹었을 뿐이었다.
“전혀 안 났는데?”
“어제……. 저랑 멜리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엄마라고 해서…….”
“…….”
카리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롤랜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뭐라고 대답을 해 주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롤랜드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멜, 멜리사는 아무 잘못 없어요. 제가 멜리사한테 얘기했거든요. 카리나가 딱 한 번, 허락해 줬다고. 그리고 어제도, 제가 먼저 엄마라고 불러서 멜리사도 엄마라고…….”
“롤랜드.”
카리나는 이제는 반쯤 울 것 같은 기세로 말을 쏟아 내고 있는 롤랜드의 말을 잘랐다.
“이리 와 보렴.”
그녀는 어느덧 롤랜드의 뒤에 숨어버린 멜리사에게도 손짓했다.
“멜리사도.”
카리나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이들 앞에서 긴장한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그들의 관계를 규정할 말을 하려고 하니 몸에 어쩔 수 없이 힘이 들어갔다.
롤랜드와 멜리사는 그녀 곁에 쪼르르 붙어 앉았다.
카리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입을 열었다. 양옆에서 느껴지는 아이들의 온기에 용기가 솟아났다.
“나는 화 안 났어.”
“진짜로요?”
“그래.”
카리나는 피식 웃었다.
“오히려 그때, 너희들이 나를 구해 줬는걸?”
“……진짜예요?”
멜리사가 눈치를 슬쩍 살피며 물었다.
“당연하지. 너희들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은 내가 유괴범인 줄 알았을걸?”
“그럴 리가요!”
롤랜드가 분개하며 소리쳤다.
카리나는 쉿, 하고 롤랜드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당연히 짐마차의 덜컹이는 소리에 묻혀 밖으로는 전혀 새어나가지 않았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 봐. 남매라고 하기엔 나는 너희들과 전혀 닮지 않았고, 나이 차이도 많지.”
“그래도……. 우린 절대 유괴당하는 중이 아니잖아요.”
“겨우 하녀 따위가 모시는 도련님, 아가씨를 슈크림으로 꼬드겼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많을걸?”
“아니, 아니에요……. 아닌 걸요!”
롤랜드는 다소 충격을 먹은 듯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카리나는 아이들에게 괜한 겁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수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니까. 그리고 이제 내가 너희 엄마라고 했으니, 의심이 거두어졌을 거고.”
“엄마…….”
쥐꼬리처럼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중얼거린 멜리사의 한 마디가 카리나의 귀에 아프게 부딪혔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봤는데……. 너희들, 내가 아예 너희 새엄마가 되는 건 어떻게 생각하니?”
롤랜드와 멜리사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사방으로 흔들렸다.
“어차피 그렇게 말하고 마차에 탔잖아. 그리고 생각해 봤는데, 아마 너희들이 클 때까지는 우리가 같이 살지 않을까…….”
카리나는 자신이 너무 나갔나 싶어 황급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너희들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따로 살 수 있지만.”
“…….”
“그러려면 마땅한 핑계가 필요해. 사람들은 특이한 걸 좋아하지 않거든.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하기엔 좀 나이가 적으니…….”
카리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어지는 말을 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제 말한 것처럼 남편이 일찍 죽었고, 너희는 내 전남편의 아이들로 하는 게 어떨까 싶어.”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겉으로는 태연하게 아이들을 기다려 주는 척했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어쩌면 아이들이 고아원에 다시 가고 싶다고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이들은 카리나가 렝케 경의 사생아인 주제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체하려고 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침묵을 깬 건 롤랜드였다.
“그래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