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안 돼. 바로 돌아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카리나…….”
롤랜드는 물론 멜리사까지도 울상을 지으며 카리나에게 매달렸지만 다른 사용인들의 눈에 띄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카리나는 아이들을 간신히 달래고선 조심스레 침실 문을 닫았다.
치맛자락을 붙들며 같이 가면 안 되냐고 묻는 어린아이들을 떼어놓는 거야 어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카리나를 따라오려는 롤랜드와, 힘없는 고사리손으로 치맛자락을 붙잡던 멜리사가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자신도 얼마나 어른의 사랑에 굶주렸던가.
‘그만 생각해.’
카리나는 자신을 꾸짖었다.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이미 흘러간 시절에 대한 감상 따위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돈이랑 옷, 음식.’
도망치려면 세 가지는 필수적이었다. 철저하게 준비하는 게 좋겠지만, 시간이 없으니 그냥 생각나는 대로 끌어모으기로 했다.
‘돈은 있어.’
렝케 경의 사생아라는 점은 이 저택에서 몇 가지 이점을 주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건 카리나가 성인이 되는 생일부터 항상 허리춤에 차고 다녔던 돈주머니였다.
그럼 뭐하나, 묵직한 돈주머니에도 불구하고 카리나가 쓸 수 있는 돈은 단 한 푼도 없었는데.
오직 저택까지 찾아오는 상인들에게 돈을 지급할 때만 돈주머니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인간의 악취미가 이럴 땐 도움이 되네.’
카리나는 허리를 더듬거려 돈이 묵직하게 들어 있는 주머니를 확인하며 생각했다.
자신은 제법 많은 돈을 들고 다녔지만 실은 저택의 그 누구보다도 가난했다.
아니, 가난하다 뿐인가? 카리나는 문자 그대로 무일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스물셋인 지금까지 일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월급이란 것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카리나는 먹고 싶은 음식은 주방에 가서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었다.
옷이 필요하면 저택까지 찾아오는 헌 옷 장수에게서 적당한 옷 몇 벌을 산 뒤 장부에 기록했다.
하지만 장부에 기록할 수 없는 돈은 한 푼도 쓰지 못했다.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수에 밝다.
피를 속일 순 없는 모양인지 카리나도 어느 정도는 수에 대한 재능이 있었지만, 렝케 경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한두 번 몰래 돈을 빼돌리다 죽을 뻔한 이후로 카리나는 사적인 용도로 돈을 사용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 카리나의 나이 겨우 스물.
친하게 지내던 하녀의 부모님이 병에 걸렸을 때, 의사를 부르라고 손에 동전 몇 푼 쥐여 준 대가였다.
저택 인근에서 가장 큰 나무에 매달린 채, 자신의 눈을 쪼아먹으려는 까마귀와 씨름한 지 사흘이 되는 날.
카리나는 펑펑 울며 다시는 돈주머니에 삿된 마음으로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그 순간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떠한 완충 장치도 마법도 없이.
의사는 부러진 다리로 다시는 멀쩡하게 걸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렝케 경이 준 정체불명의 물약을 삼키니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진작 무너져 렝케 경의 충실한 종복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카리나는 렝케 경에게 대항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싫든 좋든 벗어날 수 없는 이 저택에서 렝케 경의 악행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카리나 자신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부로 카리나는 이 저택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이다.
가당치 않은 양심 역할도 오늘로 끝이었다.
점심 식사를 앞두었기 때문에 주방에서 갓 나온 음식을 쓸어 담는 건 쉬웠다.
모두가 카리나가 렝케 경을 위한 음식을 준비한다고 생각했고, 렝케 경이 좋아하는 고기와 진귀한 과일, 달콤한 디저트를 잔뜩 얹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옷을 몇 벌 챙기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카리나는 작은 옷 가방을 손에 든 채 서둘러 아이들의 침실로 뛰어 올라갔다.
다행히 아이들은 어디로도 가지 않은 채 긴장한 얼굴로 각자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카리나!”
롤랜드가 용수철처럼 벌떡 뛰어올랐다.
“왜,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준비하느라.”
그때, 외투 단추를 목까지 야무지게 채운 채 침대에 앉아 있던 멜리사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안 오는 줄 알았어요.”
어딘가 체념이 서려 있는 목소리에, 가슴이 다시금 아려왔다.
롤랜드가 조금 흥분하며 소리쳤다.
“내가 아니라고 말했잖아! 카리나는, 돌아온다고…….”
“그래, 돌아왔단다. 롤랜드가 이겼네.”
카리나는 롤랜드의 뺨을 뒤덮은 마른 눈물 자국을 놓치지 않았다.
멜리사는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았지만, 어디에서도 경계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서 가자.”
남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카리나의 양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옷 가방을 쥐지 않은 왼손을 잡기 위한 은근한 신경전이 느껴져 카리나는 슬쩍 웃고 말았다.
그녀는 멜리사의 편을 들어주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직접 교류했던 쪽은 오빠 롤랜드였다 보니 멜리사에겐 항상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카리나의 왼손을 꼬옥 잡은 멜리사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뛰어가야 해요?”
“아니.”
카리나는 최대한 신뢰감을 줄 수 있는 목소리를 꾸며내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자신이 떨어선 안 되었다.
“우린 당당하게 나갈 거야.”
“그랬다간 바로 잡혀요!”
롤랜드가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롤랜드는 멜리사가 첫 고문을 당하자마자 바로 동생의 손을 잡고 저택에서 뛰쳐나가려고 했었다.
물론,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카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렝케 경과 함께 나갈 텐데, 누가 감히 우리를 붙잡겠니?”
“렝, 렝케 삼촌이랑…….”
롤랜드는 뻣뻣하게 굳어서 몇 마디 더듬거렸다.
카리나는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아이들의 공포를 덜어주려 한 말인데, 오히려 겁에 더 질리게 할 줄은 몰랐다.
“물론 정말로 함께 나가는 건 아니야. 그냥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만 할 거란다.”
“어떻게요?”
롤랜드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롤랜드, 호문쿨루스를 움직여 본 적 있지?”
호문쿨루스.
마법사가 만들어 낸 인조인간.
전설적인 대마법사가 만들어 낸 호문쿨루스는 실제 인간처럼 스스로 행동하고 움직였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호문쿨루스는 마법사가 쉬지 않고 생각하며 조종해야 했기 때문에 여간 까다로운 마법이 아니었다.
“네…….”
롤랜드는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카리나는 아이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렝케 경의 잔혹한 교육 탓에, 롤랜드에게 마법이란 오직 고통과 갈등, 죄책감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롤랜드는 장차 대마법사가 될 만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미래를 바꾼 탓에 대마법사가 되지 않는다 해도 롤랜드만 한 잠재력을 지닌 아이가 마법과 동떨어진 삶을 살 순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 저택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롤랜드의 마법이 필요했다.
카리나는 애써 미소 지었다.
“그때랑 똑같이 하면 돼. 도와줄 수 있겠니?”
“…….”
롤랜드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카리나는 몇 분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롤랜드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렝케 경의 모습을 한 호문쿨루스를 롤랜드가 조종하는 것.
만약 카리나 자신이 마법을 쓸 줄 알았다면 당연히 롤랜드에게 마법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롤랜드가 마법을 극도로 꺼리는 지금, 이 순간에는.
하지만 렝케 경은 그간 여러 어린아이를 데려와 마법적 자질을 시험해 보면서도 카리나가 마법에 관심을 보이면 버럭 화를 내었다.
멜리사 역시 렝케 경에 의해 내쳐졌으니 현재, 그들 셋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오직 롤랜드뿐이었다.
“아주 잠시면 돼.”
“……저는.”
롤랜드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카리나는 다그치지 않았다.
롤랜드가 직면한 상황은 렝케 경처럼 윽박지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애타는 속은 어쩔 수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꼬박 하루 동안 렝케 경을 속여야 했다.
카리나는 자신이 항상 패배하기만 했던 능구렁이를 도저히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그때, 주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 제가 할게요.”
놀란 카리나는 짐가방을 떨어트릴 뻔했다. 파리한 안색의 멜리사가 자신을 간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멜리사!”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호문쿨루스까지는 저도 같이 배워서…….”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항상 소심하기만 했던 멜리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렝케 경이 처음부터 롤랜드만 가르쳤던 건 아니었다.
처음엔 두 아이 모두에게 같은 마법을 가르쳤다.
두 아이의 관계가 급변한 건 롤랜드가 확연한 재능을 드러내는 반면, 멜리사는 평범한 수준이라는 결론을 렝케 경이 내린 순간부터였다.
그리고 카리나는 알았다.
멜리사의 눈엔 한때의 자신과 같은, 숨길 수 없는 갈망이 불타오른다는 걸.
‘도망치면 멜리사와 롤랜드가 마법을 배울 방법도 찾아보아야겠어.’
그래서 카리나는 멜리사를 말리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로 할 수 있겠니?”
“네.”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해 보자.”
바로 그때, 롤랜드가 둘의 앞을 막아 세웠다.
“제가 할게요! 제가 더 잘할 테니까…… 제가 하는 게 맞아요.”
카리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호문쿨루스를 조형하고, 조종하는 덴 상당한 힘이 들어갔다.
렝케 경 정도 되는 원숙한 마법사면 몰라도 롤랜드나 멜리사 같은 어린아이가 모든 과정을 도맡아서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너희가 함께 해 보는 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