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카리나는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롤랜드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대답을 해 주어야 했지만, 머리가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죄, 죄송해요!”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고 무릎을 굽혀 롤랜드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딱 한 번만이에요. 두 번은 안 돼요. 알겠죠?”
“……!”
롤랜드는 너무 놀란 탓인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카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불러 봐, 롤랜드.”
“엄마……!”
카리나는 부들부들 떠는 롤랜드를 꽉 끌어안았다.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자신의 나이는 스물셋.
이만한 아들이 있기엔 너무 젊은 나이였지만 한 번쯤 그렇게 불리는 게 무슨 상관이랴.
카리나가 해 줄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뿐인데.
* * *
다음 날 아침.
카리나는 딱딱한 얼굴의 렝케 경과 대면했다.
렝케 경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책상 위 서류를 훑으며 무심히 일렀다.
“보는 눈이 많다. 매사 조심하도록.”
“……네.”
렝케 경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어느 사용인이 카리나와 롤랜드를 목격하고 렝케 경에게 일러바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리나는 자신의 생물학적인 아버지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잘 알았다.
렝케 경은 저택 곳곳에 감시를 위한 마법 하수인을 숨겨 두었다.
그들은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감시하다 흥미로운 사항을 발견하면 렝케 경에게 일러바쳤다.
카리나는 마법 하수인을 피해 다니는 요령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제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무방비하게 롤랜드와의 대화를 노출시키고 만 모양이었다.
렝케 경의 말은 경고였다.
롤랜드와 멜리사에게 필요 이상으로 잘해 주지 말라는 경고.
렝케 경은 턱 끝으로 카리나가 청소해야 할 방을 가리켰다.
“준비해라.”
“네.”
카리나는 순순히 렝케 경이 말한 실험실로 들어갔다가,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견뎌내야 했다.
수백 번을 들어와도 실험이 끝난 이후의 지독한 냄새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카리나는 정체를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오물들을 대걸레로 닦아내고, 자국이 남으면 깨끗한 물을 부어 흔적을 없앴다.
만약 이 실험실을 렝케 경 혼자만 쓴다면 이렇게 열심히 치우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렝케 경이 실험실에 들이는 사용인은 오직 카리나 뿐이니, 배 째라는 식으로 대충 청소하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몇 시간 후면 롤랜드와 멜리사가 이 방에 들어온다.
그때를 생각하면 최소한 사람이 머물 수는 있는 방처럼 보이도록 치우고 싶었다.
카리나는 끈적거리는 보라색 피를 뒤집어쓴 벽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롤랜드에게 무슨 불쌍한 것을 죽이게 했나 보네.’
이제 렝케 경이 롤랜드를 훈련시키는 용도로 삼는 야수들은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그저, 불쌍할 뿐이었다.
그것들도 본인들의 고향에선 자유롭게 살았을 것 아닌가.
카리나는 벽면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이런 이질적인 피들은 빨리 닦지 않으면 금세 굳어 버려 떼어낼 수가 없게 된다.
제법 요령이 좋은 덕에 한 시간가량이 지나니 벽면에 들러붙은 핏덩이들을 대부분 제거할 수 있었다.
‘……?’
카리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마법식?’
핏덩이를 모두 제거하니 벽면을 빼곡히 메운 낯선 마법식이 드러났다.
렝케 경은 카리나를 철저하게 하녀로 키웠고, 마법은 일절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자질구레한 일들을 맡아서 하다 보면 기본적인 지식은 생길 수밖에 없다.
카리나는 벽면의 마법식과 자신이 아는 빈약한 정보를 짜 맞추려고 애썼다.
‘……!’
피가 식었다.
카리나가 알아볼 수 있는 부분들을 종합해 보면, 이건 분명히 인체 개조와 관련된 마법식이었다.
분명 소설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다.
렝케 경은 인체 개조를 진지하게 꿈꾸었다.
평생을 바쳐 한 연구들은 오직 궁극적인 인간을 만들기 위한 인체 개조 마법식의 발판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걸, 롤랜드에게 시험하기 위해서 쓴 거라면……!’
카리나는 머리를 싸맸다.
문제의 인체 개조 마법식을 렝케 경이 롤랜드에게 시험했는지 아닌지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소설에선…… 정확히 뭐라고 되어 있었더라.’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 보아도 인체 개조와 관련된 내용이 있었다는 흐릿한 기억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생에 단 한 번 읽었을 뿐인 책이다.
눈앞에서 펼쳐진 책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 맛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였다.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시야가 하얗게 변하고, 시뻘건 글씨가 카리나의 시야에 떠오른 것은.
「그날 이후 롤랜드의 혈관에는 더는 인간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 대신, 시퍼런 마력 유도제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불길하게만 느껴지는 글씨였음에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건 분명, 자신이 전생에 읽었던 책의 본문 그대로였다.
목이 바싹 탔다.
눈앞의 글씨가 왜, 어떻게 나타났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렝케 경이 롤랜드의 저 작은 몸에서 피를 모조리 빼내고 차가운 마력 유도제를 주입할 테니까.
* * *
카리나는 예고도 없이 남매가 묵는 방을 벌컥 열었다.
렝케 경이 오전 열한 시부터 오후 두 시까지 낮잠을 자는 동안 마법 하수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오전 열한 시가 넘었건만 멜리사는 아직 이불에 폭 파묻혀 있었다. 그동안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한 탓에 기력이 늘 없었기 때문에 놀랄 일도 아니었다.
롤랜드는 의자를 동생의 침대 곁에 끌어다 앉아 무어라 조잘거리던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크게 질린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리나는 두 쌍의 눈망울에 담긴 공포가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상처받지 않았다.
아이들은 단지, 그녀가 전달할 렝케 경의 말을 두려워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오늘로 끝이리라.
“카, 카리나.”
롤랜드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오전부터 하는 실험은 드물었지만, 그만큼 평소보다 곱절은 힘겹고 오래 걸렸다.
그 때문에 시작도 하기 전부터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했다.
“얼, 얼른 준비해서 갈게요. 삼촌은 기다리는 거 싫어하시니까…….”
“걱정 말아요. 렝케 경께 가는 게 아니니까.”
카리나가 롤랜드의 말을 잘랐다.
“그럼, 저흴 보러 오신 건가요?”
롤랜드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 순수한 반짝거림에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멜리사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였지만 롤랜드 못지않은 기쁜 감정이 서린 눈을 반짝 빛냈다.
“아니.”
카리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한 마디를 내뱉는 순간.
자신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도망치자, 당장.”
카리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이 저택을 나서는 순간부터 아이들의 보호자였다.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여야 한다.
“도, 도망이요?”
두 아이의 겁먹은 눈동자가 도르르 굴렀다.
카리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겨우 일고여덟 살 먹은 아이들에게 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도망쳐야 해. 너희 둘 다.”
이미 마음은 복도를 달려오면서 정했다. 카리나는 아이들과 함께 평생 단 한 번도 떠나지 못한 저택을 탈출할 것이다.
멜리사가 여전히 이불에서 머리만 빼꼼히 내민 채로 물었다.
“어디로 가요?”
“……안전한 곳으로 갈 거야.”
카리나는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말하려다 마음을 바꾸었다. 오직 자신만 믿고 따를 아이들이 겁을 먹게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멜리사는 그녀의 머뭇거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갈, 갈래요.”
“얼른 옷 챙겨 입어. 바로 출발할 테니까.”
카리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부산히 움직이는 동생과는 달리 여전히 굳은 듯 움직이지 않는 롤랜드를 바라보았다.
“롤랜드, 너는?”
조금 전부터 롤랜드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차마 내뱉지 못하는 사람처럼 우물쭈물 손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롤랜드의 입에서 주저하는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카리나는요……?”
그 한 마디에 담긴 감정에 눈시울이 시큰해졌지만 카리나는 반대로 미소 지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이 아이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당연히 나도 같이 갈 거야. 이 집은 지긋지긋하거든.”
롤랜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두 아이의 얼굴에서 서서히 공포가 걷히고 기대와 희망이 부풀었다.
“둘 다 잘 들으렴. 시간이 없어. 그러니 얼른 옷을 갈아입고,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옷 말곤 없어요.”
즉각 롤랜드의 대답이 돌아왔다. 카리나는 방을 한 바퀴 둘러보며 그 사실을 확인했다.
‘정말이네.’
아이들에겐 그 흔한 인형이나 장난감 병정 하나 주어지지 않았다. 아마 고아원에서 자라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카리나는 자신의 삭막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비슷하구나, 나나 너희나.’
그녀는 아이들이 옷을 입는 걸 도와주었다.
다행히 아이들의 옷은 귀족 자제라기엔 초라한 옷들뿐이었기에 눈에 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렝케 경이 아이들의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은 덕이었다.
“밤은 추우니까 외투도 다 입어.”
“지금 출발해요?”
롤랜드의 목소리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으로 차 있었다.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급하게 뛰어왔기 때문에 다른 준비는 미처 하지 못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나도 준비할 게 좀 있으니까.”
“……우리도, 카리나랑 같이 가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