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아이들은 빨리 큰다.
카리나는 그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 상황을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다시 한번 해 보거라.”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교육의 탈을 쓴 학대의 현장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롤랜드, 내 너 같은 반푼이를 입히고 먹여 준 이유를 모르겠느냐?”
렝케 경의 냉혹한 음성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카리나는 일어나는 분노를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래, 그동안 외면하려고 노력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렝케 경이 죽은 여동생의 아이들을 거두어 키우는 이유는, 오직 그의 말만 따르는 꼭두각시 대마법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카리나는 이제 겨우 여덟 살 난 롤랜드와 일곱 살 된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롤랜드는 눈을 질끈 감고선 그 나이대 아이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주문을 외우는 중이었다.
멜리사는 희게 질린 얼굴로 오빠 롤랜드의 곁에 붙어 있었고.
단 몇 초 만에, 롤랜드로부터 생성된 빛이 어둠을 금사로 촘촘히 수놓으며 사방을 밝히기 시작했다.
심각한 상황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롤랜드의 마법은 놀라웠다.
하지만…….
‘뭔가, 이상해.’
카리나는 그동한 숱하게 많은 마법들을 봐왔다.
잘된 마법과 잘못된 마법 모두.
지금 이건…….
‘잘못될 거야!’
그것도 크게.
그녀는 렝케 경을 홀낏 바라보았다. 렝케 경은 입가에 차디찬 미소를 띠고 있었다.
카리나는 직감했다.
롤랜드의 실패마저도 그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마법에 실패하여 자신과 여동생이 모두 다치게 되면, 더욱더 마법을 필사적으로 익히게 될 터이니.
바로 그 순간.
롤랜드의 마력이 뒤틀리며 빛이 점멸하고 거대한 폭발음이 일었다.
그리고…….
카리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두 아이를 껴안은 자신의 입에서 어느새 고통에 겨운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쓰라린 통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녀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대신 두 아이를 품에 안고 도닥거렸다.
“쉬이이.”
아이들의 뻣뻣한 몸은 카리나의 품에서 사르르 풀어졌다.
두 아이는 마치 카리나가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목에 매달렸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도련님. 아가씨……. 다 잘 될 거예요.”
당연히 렝케 경은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카리나, 대체 무슨 생각이지?”
렝케 경이 황당한 얼굴로 카리나를 잡아 일으켰다.
상처를 입은 왼쪽 어깨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
“얼른 들어가서 치료해.”
“네, 주인님.”
카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섰다.
이로써 렝케 경을 대놓고 거스른 건 세 번째.
만약 카리나의 생물학적인 아비가 렝케 경이 아니었다면 진작 죽어 야산에 파묻혔을 것이다.
그렇다.
카리나는 렝케 경의 딸이었다.
단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못한, 사생아이긴 하지만.
렝케 경은 그녀를 어디까지나 하녀로 대했고 카리나 역시 그를 아버지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약간의 특별 대우는 받고 있었다.
이를테면, 롤랜드와 멜리사 남매를 돕는 걸 눈감아주는 것처럼.
하지만 카리나는 그의 진짜 속내를 모르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나도 멜리사 같은 인질이 되겠지.’
멜리사 또한 마법사의 재능을 타고났지만, 롤랜드와는 달리 소중한 대마법사 후보가 아니었다.
렝케 경은 멜리사가 간단한 마법을 쓰는 것조차 금지했다.
멜리사는 롤랜드를 좌지우지하기 위한 인질에 불과했으니까.
그녀는 롤랜드가 렝케 경의 심기를 거스를 때마다 대신 처벌을 받았다.
당연히, 멜리사는 가혹한 학대를 버티지 못하고 몇 년 안에 죽는다.
렝케 경이 롤랜드를 좌지우지하기 위한 인질이라는 자리는 자동으로 카리나가 이어받게 될 것이다.
그나마 카리나는 성인이 된 롤랜드가 외삼촌에게 복수할 때까지 살아남는 듯하지만.
어떻게 아느냐고?
전생의 카리나는, 롤랜드가 남자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책을 재미있게 읽은 평범한 독자였으니까.
바로 그 기억이 카리나가 제대로 된 행동을 취할 수 없도록 발목을 붙잡았다.
삼촌으로부터 가혹한 훈련을 받은 덕에, 롤랜드는 미래 위대한 대마법사가 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롤랜드는 전 세상을 집어삼킨 재앙에서 제국을 구해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삼촌으로부터 받은 교육이라고 소설 속 롤랜드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었다.
매일 밤, 롤랜드와 멜리사를 데리고 달아나고 싶다는 충동이 카리나의 가슴에 맹렬히 들끓었다.
하지만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 탓에 롤랜드가 대마법사가 되지 못할 경우, 대체 누가 이 세상을 멸망으로부터 구한다는 말인가?
카리나는 도저히 그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 * *
“도련님, 여기 좀 와 보세요.”
카리나는 롤랜드를 슬쩍 부른 다음 자그마한 손에 기다란 빵을 쥐여 주었다.
롤랜드야 렝케 경이 과도할 정도로 잘 먹이고 있으니, 쫄쫄 굶고 있을 멜리사를 위한 빵이었다.
렝케 경은 멜리사를 오직 롤랜드의 능력을 키우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해,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챙겨주지 않았던 것이다.
“고, 고맙습니다.”
가슴 한편이 저릿저릿했다.
렝케 경이 찾아가기 전까진 부모의 이름도, 성도 모른 채 고아원에서 자라던 남매가 이 저택으로 온 지 벌써 일 년이 흘렀다.
처음 저택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 나이대 아이답게 천방지축으로 뛰어놀던 소년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잔뜩 주눅이 든 롤랜드 블로에만이 남아 있었다.
“멜리사 아가씨랑 나눠 드세요.”
“네, 네……!”
소년은 한층 밝아진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가여운 남매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롤랜드의 미래를 바꾸었다간 제국이 통째로 망할 수 있으니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다못해, 멜리사라도…….’
카리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멜리사만 데리고 도망쳤다간 롤랜드는 렝케 경의 가혹한 가르침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멜리사는 저 상태로 내버려 둘 경우 몇 년 안에 죽는다.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멜리사만이라도 데리고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
렝케 경의 목적은 롤랜드이니, 자신과 멜리사가 도망친 것 정도야 봐줄지도 모른다.
“카리나.”
“……?”
카리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롤랜드가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고 있었다.
“말해 보세요, 도련님. 뭔가 필요한 게 있으세요?”
롤랜드가 평소 카리나에게 멜리사를 위한 음식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부탁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롤랜드가 원하는 게 있다면 최대한 들어 주고 싶었다.
“저어…….”
“뭔가요?”
카리나는 대답을 재촉했다.
괜히 이곳에 오래 있다가 렝케 경이나 그의 마법 하수인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롤랜드의 입에서 쥐꼬리만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라고 불러 봐도 돼요? 딱, 딱 한 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