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외전 2-2
이제 익숙해진 중장년 임원들과 지루한 회의를 마치고 나온 다봄은 길 건너 연광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이른 점심시간인지라 10층 식당가가 드물게 한가했다. 그곳에서 대충 배를 채우고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그녀는 아래층 아동복 판매장으로 이동했다.
어제 울던 조카가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커서 잊어버리기만 해 봐.”
혼자 쫑알거리면서도 그녀는 귀여운 옷에 이성을 잃고 벌써 세 벌이나 결제했다.
두둑한 쇼핑백을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다봄이 또 한 매장 앞에서 발을 멈추고 말았다.
“귀엽다…….”
멍하니 선 그녀 눈앞엔 유아복이 있었다. 한참 시선을 두다 겨우 고개를 돌리니 이번엔 작은 양말이 보였다.
그 양말을 보며 조카가 아니라 미래 제 아이를 상상해 버린 다봄은 기분이 묘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고 난 뒤, 겨우 매장을 벗어나 엘리베이터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방금 찍은 사진과 설원의 사진을 번갈아 가면서 봤다.
한번 시작한 상상은 끝을 모르고 커졌다.
다봄은 핸드폰 메시지 창을 띄웠다. 한 자세로 얼마간 망설인 그녀가 방금 찍은 아기 양말 사진을 불러와 전송을 눌렀다.
수신인은 건오였다.
그는 사진을 확인하자마자 답장이 아니라 전화를 걸어 왔다. 다봄은 어쩐지 민망해졌다.
“통화 괜찮아?”
-방금 의뢰인 상담 끝났어요. 누구 선물이에요?
“아니. 그냥 지나가다가 귀엽길래.”
건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제껏 다봄이 선물할 것도 아닌 아기 양말을 구경한 적도, 이런 사진을 보낸 적도 없었다.
다봄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찰나 기묘한 기류가 전해지며,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귀엽죠. 근데 이걸 보낸 이유가 그게 다예요?
건오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다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미약한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 건오는 당장 회사를 나와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올라오는 시간이 답답해 비상구를 쳐다볼 무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연광 백화점이겠네.
건오의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 열리는 소리와 ‘지하 2층’이라는 기계음이 핸드폰을 넘어왔다.
-지금 갈게요.
“응? 여기로?”
-네. 당장 보고 싶어져서.
여태 말이 없던 다봄도 쇼핑백과 핸드폰을 꽉 쥐고 일어섰다. 그러곤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의 감정이 전이됐는지, 그녀도 무척이나 건오가 보고 싶어졌다.
“우리 만나던 곳에 있을게.”
백화점을 빠져나온 다봄은 대로변을 따라 조금 걸었다. 그러면 백화점 지하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늘어선 차들이 보였다.
그녀가 연광 본사로 출퇴근하는 날이면 부부는 이곳에서 헤어지거나 만나곤 했다.
클랙슨이 울리는 소리에 뒤를 돈 다봄이 그의 차를 발견했다.
잠시 정차한 건오 차에 얼른 올라탄 다봄이 안전벨트를 채우자마자 물었다.
“우리 어디 가?”
“밥 먹으러요.”
“나 밥 먹었는데.”
“잘됐네. 룸서비스는 좀 이따 시켜도 되겠어요.”
핸들을 꺾은 그가 그 근방에 자리한 호텔 지하로 들어갔다. 연광 호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또 다른 호텔이었다.
차에서 내린 다봄은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진짜, 건오가 이렇게 저돌적으로 나올 때마다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다.
“회사에 연락해 둬요. 좀 늦는다고.”
프런트 데스크가 있는 11층으로 올라가며 건오는 다봄에게 걸려 올 전화를 미리 봉쇄했다.
고개를 끄덕인 다봄이 승희에게 연락하는 사이, 건오가 카드 키를 받아 왔다.
다시 엘리베이터 안, 좁은 공간 안에 들어선 그들은 서로의 떨림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 느려.”
엘리베이터의 속도는 답답했고 하필 그들이 배정받은 객실은 높은 층이었다.
목적지인 30층을 앞에 두고, 건오는 다봄의 정수리에 입술을 눌렀다. 당장이라도 혀를 섞고 싶은 마음을 겨우 그렇게 달랬다.
마침내 객실 문이 열린 순간, 그는 그때부터 다봄을 몰아붙였다.
입술을 부딪치며 안으로 들어선 부부는 정신없이 신발을 벗었다. 자동으로 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다봄이 침대 위에 누웠다.
서로 옷을 벗기며 혀를 얽었다. 다봄은 제 위에 올라탄 그에게 취하듯 점차 눈이 풀렸고, 역시나 그녀에게 취한 건오는 제 흔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게 하려는 것처럼 하얀 몸을 탐했다.
“잠깐만, 흣, 건오야.”
건오는 대답 대신 그녀의 입술을 다시 찾았다.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연신 그에게 먹혔다.
다봄이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깊고 질척한 시선이 그녀에게 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다봄이 허리에서 힘을 빼고 나서야 그가 입술을 놓아주었다.
“그거 알아요?”
손이 아닌 허벅다리로 그녀의 두 다리를 벌린 그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난 누나가 나와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한 사실이 제일 흥분돼.”
그와 그녀의 몸이 맞닿았다. 다봄이 한껏 달아오른 눈을 눈꺼풀에 감췄다.
꽉 감긴 눈에서 그녀의 긴장을 읽은 건오가 단숨에 그녀를 꽉 안았다.
한낮의 열락이었다.
* * *
부부가 아이를 갖기로 마음먹고 약 3개월이 흘렀다.
산부인과에서 임신 사실을 확인받은 다봄은 병원비를 수납하며 다음 주 초음파 예약을 할 때쯤 서서히 실감이 났다.
점심시간에 시간을 내 병원에 다녀온 터라 회사로 돌아와 일하긴 했는데,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는데 벌써 퇴근이 코앞이었다.
“끝났어요?”
그녀의 퇴근 시간보다 일찍 다봄을 데리러 온 건오가 그녀를 불렀다.
마침 사무실에서 나온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남편을 보곤 우뚝 멈춰 섰다.
“누나?”
건오는 다봄이 아침과 다르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
다른 때라면 이 시간 그녀의 표정은 퇴근을 앞둔 표정, 아니면 야근을 앞둔 표정, 이 두 가지가 전부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몸은 잔뜩 경직된 데다, 정신을 어디 다른 곳에 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건오가 긴 다리로 빠르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아무것도 아냐. 오늘 나 먼저 퇴근할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부부는 직원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건오는 혹시라도 다봄이 아픈가 싶어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지만 체온은 멀쩡했다.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말게 말해요.”
이미 무슨 일이 있다고 판단한 그는 대답을 종용했다. 오는 차에서도, 집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에서도 시선으로 요구했다.
“누나.”
집으로 들어온 다봄이 겉옷을 벗으며 그를 지나쳤다.
서서히 한계가 온 그는 재차 그녀를 부르며 그녀를 따랐다.
“말 못 할 문제예요?”
“말할 거야. 너도 옷부터 갈아입어.”
“그것부터 듣고.”
그가 심각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다봄이 이토록 뜸을 들일 만한 일이 뭘까.
뭔지는 몰라도 심상치 않을 것 같아 그의 표정이 절로 굳었다.
겉옷을 옷걸이에 건 다봄이 건오와 마주 섰다. 이상하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건오와 다른 의미로 심각해진 다봄이 그를 올려다봤다. 건오는 어느새 미간 사이에 주름까지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피가 마르는 그를 알면서도 그녀는 헛기침까지 몇 번 하고 나서야 입술을 열었다.
“윤이현.”
윤이현, 부부가 미리 정해놓은 아이 이름이었다. 성별이 어떻든 붙일 수 있게 고심해 정한 두 글자.
다봄은 건오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따라 건오도 눈을 굴렸다.
믿을 수 없게도 다봄은 제 배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현이가 찾아왔어.”
조용하고 나긋하게 그 이름을 다시 입에 올린 다봄은 아주 더디게 고개를 들었다.
곧장 건오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말하면서 울컥한 감정을 다스리느라 조금 늦었다.
하지만 그보다 빨랐어도 그의 표정을 보진 못했을 것 같았다.
다봄이 다시 그를 보았을 때, 건오는 한 손으로 두 눈을 덮고 있었다. 그 대신 거친 호흡이 건오의 상태를 말해 주었다.
눈에 보이게 오르내리는 가슴과 거세게 뛰는 심장박동이 임신을 확정받던 순간의 다봄보다 불규칙했다.
“건오야.”
그 작은 부름에 건오는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 다봄을 껴안았다.
속에서 어찌나 무언가가 치고 올라오는지, 무슨 말을 꺼내기도 힘들어 그는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었다.
다봄은 그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마주 안았다.
잠시 후, 그가 잔뜩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연다봄.”
겨우 감정을 눌렀던 다봄의 노력은 그 짧은 부름에 헛수고가 됐다.
그녀는 괜히 건오 뺨에 이마를 비비적거리고는 품에서 벗어나 눈을 맞췄다. 환한 조명 아래, 충혈된 그의 눈가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건오가 눈매를 휘며 미소 지었다.
연다봄 자체가 축복인 그에게 또 다른 축복이 찾아온 것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그는 저를 따라 발갛게 달아오른 다봄의 눈가를 엄지로 훑었다.
표현하기 어려운 지금 그의 감정을 그나마 전해 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사랑해.”
“……알아.”
“알아도 계속 들어요. 사랑해.”
“나도.”
“사랑해, 연다봄.”
다봄은 계속된 고백에 부끄러워져 도망칠 곳을 찾듯 재차 건오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다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누나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 아이에게도 최선을 다할게.”
그건 정말 헌신하겠다는 뜻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봄은 봄꽃처럼 말갛게 웃었다.
그거면 되었다. 건오는 이 웃음이면 다 되었다.
<너를 주웠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