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외전 2-1
서울 외곽의 한 단독주택에서 남자아이의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조카인 설원이 고모를 붙잡고 가지 말라며 빽빽 떼를 쓰기 시작하자, 고모인 다봄은 여느 때처럼 쩔쩔맸다.
다봄이 조카를 달래는 동안 건오는 그녀 옆에서 시간을 쟀다. 그래도 오늘은 30분은 빠르게 승훈과 진서의 집을 나왔다.
설원의 울음소리를 뒤로하긴 했다만 다봄이 어찌나 집을 돌아보던지, 배웅하러 나왔던 승훈이 진절머리를 내며 등을 떠밀 정도였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 다봄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설원이 벌써 보고 싶다.”
씻고 나와서도 또 얘기했다.
“지금쯤이면 설원이 자겠지?”
알람을 맞추면서도 혼잣말을 했다.
“설원이 사진이라도 봐야겠다.”
다봄은 3년 전 태어난 승훈과 진서의 아들, 조카 연설원에게 푹 빠진 상태였다.
“이러다 나 연설원한테 질투하겠어요.”
다봄 옆에 누운 건오는 기어이 그녀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다봄이 손을 뻗었지만 그는 그녀 허리를 끌어안아 눈을 맞췄다.
그녀 손은 얼결에 건오 어깨 위에 놓였다.
침대 위에서 눈을 맞춘 부부는 조건반사처럼 서로에게 더욱 밀착했다.
“우리 아이면 질투 나도 괜찮을 텐데.”
건오는 자신의 어깨에 뺨을 비비적대는 다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 나직이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봄은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이내 그녀의 눈동자가 한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움직였다. 머릿속에 온갖 상상이 들어찬 탓이었다.
건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대놓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아이를 염두에 두고 있던 다봄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건 다봄과 건오의 상황 때문이었다.
결혼 후, 본격적으로 늘봄을 총괄하게 된 다봄은 너무나 바빴다. 더욱이 건오 또한 다른 변호사들을 영입해 로펌을 차렸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부부는 시간에 쫓겼다. 그런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만큼 아이는 말 그대로 꿈같은 얘기였다.
“누나는 어때요?”
건오가 아이 얘기를 꺼낸 지금은, 그토록 바쁜 날이 지나가고 한숨 돌릴 시기였다. 다봄이 눈을 굴리며 떠올린 회사 상황도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조카가 너무 예뻐 계속 찾아가고, 평소에도 아이를 귀여워하는 다봄이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는 건 그녀가 감수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어, 음.”
몇 번 망설이는 소리를 흘린 다봄은 건오의 집요한 시선을 피하며 그를 밀어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오늘은 그만 자자.”
“……자요? 지금?”
“으응. 나 내일 연광 가야 해.”
다봄이 마주 보던 건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녀 허리를 감고 있는 건오가 뒤에서 탄식 같은 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피하는 태도에 차마 더 들이대진 못하고, 건오는 애꿎은 다봄의 허리만 더 세게 안았다.
애가 타는 남편이 느껴져 그녀는 웃음을 꾹 참고 말했다.
“이러고 어떻게 자. 좀만 떨어져.”
“누나, 진짜.”
“자자.”
다봄이 부러 몸을 말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렇다고 건오가 떨어지진 않았다.
그녀도 그럴 줄 알고 한 소리였다.
* * *
“승희 씨, 이번 주 목요일이 준수 운동회라고 했죠?”
“맞습니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창을 뚫고 들어오는 봄 햇살 아래 노곤하게 눈이 풀어지던 때였다.
상사가 말을 걸자 승희는 반사적으로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도 쏟아지는 졸음을 쫓기 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켜는데, 상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아이가 생기면, 많은 게 달라지죠?”
승희의 잠을 깨운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조심스러운 상사의 물음이었다.
승희는 바로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몸을 들썩였다.
“대표님, 임신하셨어요?”
“네? 아뇨!”
“그죠? 네? 아니라고요?”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여자는 동시에 실웃음을 흘렸다.
나름대로 큰 반응을 보였던 승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을 고쳐 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놀랍긴 했다.
“대표님, 아이 생각하고 계시는구나.”
“아…… 네에. 저도 이제 서른넷이고, 남편이 원하기도 하고.”
“대표님은요?”
승희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다봄은 콧등을 긁적였다. 무어라 확실한 대답을 하기에는 아직 너무 막연해 뜬구름 같기만 했다.
다봄의 표정을 확인한 승희는 고개를 바로 세웠다.
“대표님도 원하셔야죠.”
“솔직히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만 보면 원하는 쪽이긴 한데, 이 생활을 유지하며 제가 엄마라는 이름을 얻어도 되나 싶어서요.”
“하긴. 대표님은 대표라는 위치도 있으니까요.”
승희가 경력 단절을 고민했다면, 다봄은 다봄 나름대로 이 명패에 대한 책임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승희는 다봄을 살피며 커피를 마셨다. 텀블러에 얼음만 남을 즈음, 승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저는 대표님이 아니라 얼마나 고민되실지는 잘 몰라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아이는 확실히 엄마의 세상을 바꿔 버려요.”
단숨에 다봄의 눈썹 사이가 가까워졌다. 찌푸려진 미간을 보며 승희는 담담하게 마저 얘기했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한 생명을 사랑할 수도 있구나, 싶어요. 준수가 없었다면 평생 몰랐을 세계예요. 가끔 제가 저희 친정엄마보다 더 사랑할 존재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니까요.”
“확실히, 대단하고 무서운 감정이네요.”
“맞아요. 아이는 그만큼 대단하고 무서운 존재예요. 준수가 제 감정을 아주 가지고 논다니까요? 재롱 피울 땐 너무 사랑스럽다가, 떼써서 혼내면서도 막상 혼낸 제가 속상하고.”
승희는 우스갯소리를 하듯 한탄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준수를 얘기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아들을 떠올리는 승희의 곳곳엔 사랑이 묻어 있어서 다봄은 무심코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아이가 없다면 없는 대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고, 아이가 있다면 있는 대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다.
그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는 다봄은, 종종 아이가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행복이 궁금해지곤 했다.
다봄이 그 막연한 상상을 해 볼 때였다.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진서가 설원의 동영상을 첨부해 보내 주었다.
설원은 다봄이 선물한 자동차 장난감을 타고 놀며 엄마가 시키는 말을 어눌하게 따라 했다.
-고모, 감사합니다 해야지.
-고모, 감사함니다아!
-고모, 설원이랑 이따 만나요.
-서러니랑 이따 만나요!
짧은 동영상은 장난감 자동차에서 내린 설원이 진서에게 안기며 끝났다.
마지막에 들린 설원의 ‘엄마’라는 부름과, 진서의 웃음소리가 다봄의 얼굴을 속절없이 풀어지게 했다.
다봄은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 보다, 팔불출처럼 승희에게 제 조카를 보여 주었다.
“우리 설원이 너무 귀엽죠.”
“그럼요. 누구 유전자인데요.”
“이따 오빠 생일이라 같이 밥 먹기로 했거든요. 설원이 데리고 이리 오라고 했는데, 벌써부터 보고 싶어요.”
이미 설원의 사진과 영상을 갓난아기일 때부터 봐 왔던 승희는 설원이 아니라 대표의 모습에 웃다가 무심코 감상을 말했다.
“그런데 대표님. 설원이, 클수록 진짜 연승훈 선수 닮았네요.”
“저도 인정하기 싫은데, 승희 씨가 봐도 그런 것 같죠?”
“눈, 코가 빼다 박았는데요?”
“웃긴 건 오빠를 닮아서 오빠보다 새언니가 더 좋아해요.”
승희와 잠시 수다를 떤 다봄은 다시 자리에 앉아 이 몽글몽글한 감정을 다스리며 다시 일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 감정이 조금 전까지 막연하기만 했던 상상을 그새 구체화시켰다.
다봄은 머릿속에서 건오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렸다.
수험생, 중학생, 초등학생, 점점 더 어린 건오의 생김새를 더듬던 다봄의 기억은 남편의 9살 시절에 멈추었다.
다봄은 공연히 목이 잠기는 느낌에 헛기침했다.
“대표님, 내일 회의 자료입니다.”
“네.”
갑작스러운 감상에 빠졌던 다봄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언제 풀어졌냐는 듯, 그녀는 몇 시간을 한자리에서 일했다.
한참 동안 모니터와 싸움을 벌이던 다봄은 사무실로 들어오는 햇빛의 색온도가 바뀌자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5시였다.
“대표님.”
“네?”
승희가 창문을 바라보았다. 다봄의 시선도 저절로 그리 향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인공 정원으로 향하는 건오를 발견한 다봄이 몸을 일으켜 문고리를 잡았다. 그런데 건오의 품에 안긴 설원을 보고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마침 건오가 대표실을 한번 돌아보았다. 부부의 눈이 마주쳤다.
건오는 자신의 품에서 잠든 설원을 가리키더니 연이어 정원을 가리켰다. 설원이 자고 있고, 여기서 기다리겠다는 뜻이었다.
다봄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한발 늦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 승훈과 진서가 건오 쪽으로 걸어가 한 프레임에 담기지 않았다면, 그녀는 한동안 건오만 계속해서 보고 있었을 것이다.
정확히는 설원을 안고 있는 건오를.
잠재워 두었던 몽글몽글한 감정은 뭉클함이 되어 다봄의 심장을 눌렀다.
나와 건오의 아이가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