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 외전 1-3 (70/72)

70. 외전 1-3

그날따라 하람은 하굣길이 퍽 지루했다. 집과 학교 사이 거리는 바람 빠진 자전거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막 언덕 위를 올라 집을 코앞에 두고선 괜히 허리를 펴 볼 때였다. 쥐색 소형차가 두 중학생 옆을 지나갔다. 이 동네에서 처음 보는 차였다.

“데려다주셔서 고맙습니다. 의도가 너무 빤하지만.”

“그럼 어떻게…… 안 되겠니?”

“안 돼요.”

다봄이 웬 남자와 살갑게 대화를 나누며 차에서 내렸다. 건오와 하람이 눈을 마주쳤다.

다봄도 내리자마자 두 동생을 발견했다. 그녀가 건오와 하람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자, 의문의 남자도 그들을 돌아보았다.

카디건에 청바지를 입은 다봄과 하늘색 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남자는 언뜻 풋풋한 연인처럼 보였다.

아니, 두 중학생에게만 그렇게 보였다.

“제 동생들이에요.”

“아하. 안녕. 나는 누나 선생님이야.”

하람이 갑자기 짜증스러운 얼굴로 삐딱하게 멈춰 섰다. 건오도 곁에 멈춰 섰다.

16살 하람은 친구의 적은 자신의 적이라고 여기는 중학생이었다.

“죄송해요. 요즘 둘이 사춘기예요. 중3이거든요.”

동생들이 인사를 하지 않자 민망해진 쪽은 다봄이었다. 붙어 선 다봄과 남자가 다 들리는 대화를 속닥였다.

“이해해. 그런데 중학생치고는 둘 다…… 키가 크다. 집에서 다봄이 너만 작은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중학생 녀석들은 벌써 남자의 키를 따라잡았다.

하지만 남자들의 키가 어떻건 관심 없는 다봄은 동생들을 돌아보며 눈짓했다. 빨리 인사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 압박에 먼저 항복한 쪽은 건오였다.

“……안녕하세요.”

“어어, 그래. 안녕?”

건오가 먼저 인사하자, 하람도 친구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더 있다간 선생님만 계속 멋쩍을 것 같아 다봄이 또다시 꾸벅, 인사를 건넸다.

“오늘 선생님 덕에 재밌게 학교 구경했어요.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아냐. 나야말로 애들하고 재밌었어. 내일 교실에서 보자.”

남자는 아쉬운 것처럼 다봄과 다봄의 집을 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장난스레 선생님의 등을 밀었다. 항복한 것처럼 양손을 든 남자는 차에 오르자마자 창문을 내렸다.

“기회 되면 동생들 얼굴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

“네에.”

하람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다봄이 그와 하람 사이를 급히 가로막았다. 오늘따라 예의 따윈 밥 말아 먹은 동생의 행동에 다봄은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다행히도 남자는 끝까지 웃어 보였다.

쥐색 차가 동네를 벗어나자마자 누나가 동생을 노려봤다. 그에 동생은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왜. 뭐.”

“왜 심술이야? 선생님 곤란하시게.”

“교생이면 아직 대학생이잖아. 되게 어려 보이는데?”

“그래도 선생님이고, 네가 그렇게 굴 이유가 되지도 않아.”

맞는 말만 하는 다봄에게 더 짜증 난 하람이 발을 쿵쿵 구르며 대문으로 들어갔다.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제 대문 밖엔 다봄과 건오만 남았다.

“오늘 저 선생님이랑 같이 있었어요?”

“응. 반 애들 몇 명이 대학교 견학 가고 싶다고 했는데 마침 개교기념일이라 다녀왔어.”

다봄이 먼저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건오가 그 뒤를 쫓았다.

“몇 명이서요?”

“나까지 8명? 사실 나는 귀찮았는데, 실장이라 반강제였거든.”

“어디 다녀왔어요?”

“한국대학교.”

“그런데 선생님이 여기까지 왜 데려다줘요? 다른 친구들도 다 데려다줬어요?”

집안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다봄이 우뚝 서자, 건오도 곧바로 멈췄다.

너무 질문이 많았나, 괜한 걸 물었나, 아무 말도 하지 말걸 그랬나.

짧게 후회했지만, 시간을 돌려도 그는 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16살 청소년은 어른 남자와 함께 있는 다봄의 모습에 매우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다.

“다른 애들 말고 나만.”

“왜요?”

“그게, 아, 잠시만. 전화 왔다.”

다봄이 말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그 말과 함께 건오의 눈가가 팩 구겨졌다. 감출 생각도 못 하고 무심결에 지은 표정이었다.

핸드폰을 든 채 눈을 동그랗게 뜬 다봄을 발견한 그가 재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그녀는 벌써 건오의 기분을 읽어 낸 뒤였다.

건오는 당황한 다봄을 두고 제가 더 당황해 그대로 등을 돌렸다.

“건오야?”

황급히 전화를 끊은 다봄이 뒤에서 그를 불렀지만, 그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척 2층으로 올라갔다.

그날 건오는 오랜만에 저녁 식사에 내려가지 않았다. 다봄과 그 교생이 친근하게 장난치던 모습이 자꾸 떠오른 탓이었다.

* * *

“백건오. 너 진짜 왜 그래?”

“아오! 연다봄, 너야말로 진짜 뭐 해? 나 내일 영어 단어 시험이거든?”

하람이 자신의 방문을 열고 소리쳤지만, 건오 방문 앞에 선 다봄은 꿋꿋했다.

승훈은 합숙 중이었고, 주혁과 선하는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날이었다. 그러니 건오는 자신이 챙겨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다.

겨우 한 끼, 본인이 거부해서 저녁 한 번 먹지 않았을 뿐인데 다봄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안달복달했다.

“안 먹겠다잖아.”

“연하람. 너 어차피 공부 안 할 거지? 고기 사 줄게. 같이 건오 끌어내서 먹고 오자.”

다봄이 불퉁한 하람에게 승부수를 던졌다. 2층에 올라올 때부터 그녀는 두 녀석 모두 꼬드길 준비를 하고 올라온 상태였다.

“……난 밥 먹었어.”

역시나 고기란 말에 대번 하람의 기세가 꺾였다.

“또 먹을 수 있잖아. 저 아래 꽃돼지 가자.”

그녀에겐 하람의 공부보다 건오를 먹이는 게 우선이었다. 어차피 하람의 우선순위도 영어 단어보단 먹을 것과 백건오였다.

다봄이 밀어붙이자 그는 냉큼 포기했다.

“야, 백건오.”

못 이기는 척 슬리퍼를 직직 끌며 방 밖으로 나온 하람은 친구 방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벌컥 열었다.

저를 찾는 소리에도 건오는 빈 문제집에 눈을 박아 두고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대신 손 위에서 돌아가던 펜이 멈췄다.

그의 방으로 들어간 하람은 따라 들어오려는 다봄 앞에서 문을 쾅 닫았다.

그 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찔한 그녀가 하람을 쏘아보듯 문을 노려봤다.

그래도 하람이 나섰으니 곧 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다봄은 카디건을 찾아 계단을 내려갔다.

다봄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건오는 하람을 돌아보았다.

“연다봄 지금 뭐 마려운 강아지 같거든? 그러니까 그냥 가자.”

하람이 건오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협박 같은 회유를 했다.

건오가 펜을 내려놓고 하람을 보았다.

“지금 내 표정 어때?”

“구려. 아까 그것 때문이지?”

건오는 대답이나 고갯짓을 하지 않았다. 그게 긍정이었다.

“그 선생님 궁금하면, 내가 물어볼게.”

이번엔 진짜 회유였다. 하람이 아줌마가 저녁으로 준비해 주었던 소시지 채소볶음을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니까 가자. 나 고기 좀 먹게.”

* * *

“삼겹살 2인분, 항정살 2인분이요.”

하람은 주문부터 하며 자리를 잡았다. 밑반찬으로 나온 콘 샐러드와 마요네즈로 버무린 과일을 다봄 앞으로 밀어낸 그는 자신 있게 집게를 잡았다.

그 옆에서 건오가 수저를 챙겼고 다봄은 물잔을 채웠다.

맛있게 익는 고기를 앞에 두고 건오와 다봄은 서로 눈치를 봤다. 다봄은 건오가 왜 밥을 먹지 않는다고 한 건지 궁금했고, 건오는 그 남자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건오 대신 물어보겠다던 하람이 전투적으로 고기만 집어 먹었다.

하람이 한참 식사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답답해진 건오가 급기야 친구를 툭 쳤다.

하람의 태평한 표정에 짜증이 난 순간, 하람이 턱짓으로 제 맞은편을 가리켰다.

“건오야.”

삼겹살 한 점을 집은 다봄이 그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다봄이 건오 숟가락 위에 고기를 올려놓으며 다정하게 타일렀다.

“연하람 말고 너 먹이려고 온 건데, 얼른 먹어.”

“아, 맞다. 연다봄, 아까 그 교생…… 선생님 말야.”

그제야 하람이 뒤늦게 운을 띄웠다. 다봄 덕에 고기를 먹어서 그런지, 그녀가 지적했던 호칭까지 바꿔 주었다.

“왜 여기까지 데려다준 거야? 뭐 실장이라서 챙겨 준 거야?”

다봄은 또 선생님 얘기냐며 눈썹을 찌푸렸다.

동생들의 엄하고 엉뚱한 상상을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다봄은 그저 하람이 성가시다는 듯 대답했다.

“선생님이 우리 엄마 팬이라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봐 여기까지 오신 거야.”

“엄마?”

“응. 잡지까지 스크랩해서 모아 놨더라고. 우리도 안 하는데.”

다봄의 교생 선생님은 올해로 9년째 강선하 선수의 팬이었다. 그는 멀리서나마 선하를 볼 수 있을까 싶어 다봄을 데려다준 것이었다.

그 허무하고 간결한 이유에 하람은 와락 인상을 썼다.

“아니, 그러면 그렇다고 진작 얘길 하든가!”

이번에야말로 다봄도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가 한 번만 더 이상한 떼를 쓰면 내쫓을 거라고 한소리 하려던 순간이었다.

단숨에 기분이 나아진 건오가 다봄이 올려놓은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와 함께 다봄의 시선이 도로 건오에게 돌아갔다.

“어때? 맛있지?”

“네.”

하람이 단순한 새끼라고 중얼거렸지만, 건오는 가뿐히 무시했다.

하람은 성질만큼 크게 싼 쌈을 한입에 밀어 넣었다. 그러곤 빵빵하게 부푼 입으로 투덜거렸다.

“난 제발 연다봄이 연애 안 하면 좋겠어.”

건오가 제대로 먹기도 전에 혼자 마구 먹은 하람은 내일 쪽지시험을 준비하겠다며 먼저 식당을 나갔다.

하람이 뭐라 하든, 다봄에겐 사춘기 중학생의 심술일 뿐이었다.

“건오는 시험 없어?”

다봄은 이제야 제대로 먹기 시작하는 건오에게 신경을 기울였다.

건오는 고개를 저으며 없다고 짧게 대답했다. 있어도 없다고 할 판이었다.

그렇게 건오의 식사가 끝난 후, 계산을 마친 다봄이 운동화를 구겨 신고 식당을 나섰다.

“하람이가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니야?”

그녀는 먼저 나와 있던 건오 팔을 붙잡고 신발을 고쳐 신었다. 반대쪽 신발을 고쳐 신을 땐 그가 손을 내밀었다. 다봄은 망설임 없이 손을 잡았다.

“다른 거 더 먹고 들어갈래?”

따뜻한 작은 손은 짧게 머물고 멀어졌다.

건오는 대답을 망설였다.

항상 가족들 틈에 있다 보니 이렇게 단둘이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거기다 고등학생이 된 다봄이 야간자율학습까지 하자 더더욱 그녀와의 시간이 귀해졌다.

그렇다고 뭘 더 먹자고 하기엔 돈을 쓰는 건 다봄이었다.

“아뇨. 들어가요.”

“그래?”

그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바람을 억지로 눌렀다. 다봄은 별다른 반응 없이 집 쪽으로 방향을 바꿔 걸었다.

어느 때보다 느린 건오도 모르고, 그녀는 몇 걸음이나 앞섰다.

“근데 건오야, 그거 알아?”

“뭐요?”

뒤를 쫓는 그를 향해 고개를 슬쩍 돌린 다봄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오늘 해리포터 시리즈 개봉하는 날인 거.”

그들은 동시에 멈춰 섰다. 그 영화라면, 시리즈마다 승훈과 다봄이 영화관을 찾아가 보았던 것이다.

“오빠도 없고, 하람인 공부한다고 하고.”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건오가 반응이 없자, 다봄이 달싹이는 입술로 제안했다.

“혹시 시간 되면 나랑 보고 올래?”

“……지금요?”

“응. 나 개봉 일에 보고 싶거든.”

건오와 하람의 취향엔 맞지 않는 영화였다. 그래도 건오는 다봄이 좋아하니, TV에서 하는 걸 몇 번 꾹 참고 끝까지 본 적은 있었다.

건오 표정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싫은 것 같기도 해서, 다봄은 얼른 말을 보탰다.

“내가 세계관이랑 기본적인 건 알려 줄게. 연하람한테 말하고 택시 타고 다녀오자.”

둘이서만?

다봄의 천진한 눈이 건오를 올려다봤다. 그 안에 담긴 기대를 읽은 건오는 미간 사이를 긁적였다.

이런 기회를 코앞에 두고도 다봄이 낼 비용부터 떠올라 대답이 미뤄졌지만, 결국 건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꼭 마지못해 긍정하는 것 같아 다봄은 녀석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택시를 타야 하니 도로변까지 거의 뛰듯이 걸었다.

“다리도 긴 애가 속도 좀 내 봐.”

“그럼 누나가 못 쫓아올 텐데.”

“그래도 이건 너무 천천히 걷잖아.”

이제야 그가 느리게 걷는 걸 알아차린 다봄이 웃겨서 건오가 웃음을 흘렸다.

마음처럼 따라 주지 않는 녀석 때문에 그녀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 순간 건오가 다봄의 손을 크게 감싸 잡았다.

“그럼 잘 따라와요.”

그가 다봄의 걸음보다 살짝 빠르게 속도를 내며 그녀를 끌었다.

곧 다봄이 제 뒤로 처지자 건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더 빨리 걸어도…….”

그가 짐짓 무심히 뱉으려던 말이 끊겼다. 돌아본 건오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퍼뜩 시선을 내렸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을 땐 아무렇지 않던 다봄은, 그가 자신의 손을 잡자 여실히 당황하고 있었다.

“……돼요?”

건오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옭아매려 했다. 다봄이 손을 빼지만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아냐. 생각해 보니까 서두를 필요 없을 것 같아.”

다봄이 땀이 나는 손을 등 뒤에 숨겼다. 그녀는 가슴이 콩닥거리는 본인의 반응을 어처구니없어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보다시피 체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아.”

“속도 내 보라고 했던 말 취소. 우리 여유롭게 보고 오자.”

다봄이 민망한 낯으로 배시시 웃었다. 그도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그나 그녀나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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