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외전 1-2
당시 자리를 잡은 늘봄은 크게 성장하던 중이었다. 그만큼 주혁은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김없이 새벽에 출근하려 나선 그는 대문 앞에 쭈그려 앉은 아이를 발견했다.
옆집 아이였다.
“선하야!”
주혁은 당장에 건오를 집으로 들였고, 기겁한 선하는 아이를 보살폈다.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기 싫었던 아이가 자신이 유일하게 아는 곳으로 도망친 것이다.
그 후 부부는 계속 선택했다. 경찰을 부른 것부터, 변호사 친구인 중규에게 도움을 청한 것, 그리고 이 아이의 거처를 결정한 것까지.
모든 선택엔 책임이 뒤따랐다. 그 책임을 어느 정도까지 질 수 있느냐, 부부는 끊임없이 상의했다. 그들이 한 선택이 늘어갈수록 건오의 인생이 바뀌어 갔다. 이제 건오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 * *
“너 정말 이 아이 후견인까지 할 거야? 야, 현실적으로 생각해.”
주혁 사무실에 찾아온 중규는 거칠게 염려했다. 이미 많은 걱정을 들은 주혁은 심드렁히 받아쳤다.
“따로 변호사 선임했으니까 건오 얘긴 됐어. 선하나 나나 어렵게 마음먹었고.”
중규는 이해하는 대신 그러려니 했다. 주혁에 관해선 그게 편했다.
돈 많은 집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나 그게 세상인 줄 알며 사는 것 같더니, 갑자기 운동선수와 결혼한다 하질 않나, 기어이 집을 박차고 나오질 않나.
이젠 생판 모르는 어린놈을 도와주다 못해 제가 키우겠단다.
그에게 키우라는 것도 아니니 중규는 더 할 말을 찾지도 못했다.
“……그래, 너희가 그렇다면야. 선하 씨도 아이가 학대당하고 있는 걸 두고 보진 못할 성격이니까.”
“그나저나 가정폭력이 법정까지 가기도 힘들었을 텐데, 수고했다.”
“양부모였던 놈이 국회의원이라 화력이 셌지. 어쨌든 아무리 너라도 선임후견인 되는 게 쉬운 건 아냐.”
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후견인이 되지 못할 경우는 그의 고려 사항에 없었다. 결심한 이상 그는 건오의 법적 후견인이었다.
“지금 잘해 줘. 어릴 때 기억이 중요하니까. 별별 사건을 다 봐서 전해 들을 땐 감흥 없더니, 막상 애 얼굴 보니까 짠해 죽겠더라.”
중규가 보탠 말을 들으며 주혁도 건오를 떠올렸다.
아직 집이 낯설어서 그런지 방에서도 잘 나오지 않았다. 말도 없는 데다 심지어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움츠러든 게 보여 하람과 다봄이 다니는 수영 학원도 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말수가 늘지는 않았다.
건오를 떠올리며 심각한 표정을 짓던 주혁이 문득 가볍게 웃었다.
건오 돌보는 일에 누구보다 열성인 딸내미 때문이었다.
“나랑 선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는데, 글쎄 다봄이가 아주 지극정성이야. 제 동생보다 더 챙기더라니까?”
“그래?”
“말도 마. 밥 안 먹으면 숟가락 들고 쫓아가고, 매번 잘 자는지 확인하고서야 제 방에 들어간다고.”
“하하하! 이러다 후견인에서 장인어른 될 수도 있겠는데?”
시간이 흐른 뒤, 주혁은 그날 중규의 농담을 떠올릴 때마다 점쟁이가 따로 없다며 혀를 차곤 했다.
어쨌든 그렇게 건오는 주혁의 보호 아래에 들어갔다. 선하와 주혁은 기꺼이 건오의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게 그들의 선택이었고, 책임이었다.
* * *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건오와 함께, 다봄의 집안엔 소소한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너 왜 우리 누나한테 누나라고 불러?”
여기서 하람이 지칭한 ‘우리’는 ‘자기 자신’이었다.
하람의 세상에서 다봄을 누나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오직 본인뿐이었다. 그런데 제 일상에 불쑥 끼어든 녀석이 다봄을 누나라고 부르자 배알이 뒤틀렸다.
거기다 다봄이 정도를 모르고 건오만 챙기니 그렇게 아니꼬울 수가 없었다.
“누나가 누나라고 하랬는데.”
건오가 다봄이 쥐여 준 숟가락을 받아들며 대꾸했다. 드물게 감정이 서린 어투였다.
“너 말고 우리 누나라니까?”
“나는 9살이고 누나는 10살이래. 그러니까 나도 누나라고 해도 돼.”
“아무튼 우리 누나라고!”
부부는 이 이상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옳은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샘이 많아진 하람을 부부와 승훈이 최대한 신경 쓰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다봄에 대한 하람의 애착은 부모의 생각보다 끈끈히 형성돼 있었다.
“야, 연하람. 건오는 나한테도 형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뭐라고 하든지, 왜 누나 갖고만 그러냐.”
“아, 몰라! 형은 빠져!”
“쪼끄만 게. 너 지금 차별하는 거야?”
승훈이 어이없이 웃자 하람이 고개를 팩 돌렸다. 이 와중에도 다봄은 건오 숟가락 위에 반찬을 올려 주었다.
그걸 또 곁눈질로 본 하람이 소리 나게 숟가락을 내려놨다.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하람아. 건오한테도 다봄이가 누나고, 하람이한테도 누나야. 그러니까 둘이 같이 누나라고 부르자. 응?”
“아냐, 엄마! 우리 누난데 왜 쟤가 누나라고 해? 쟤가 누나라고 부르니까 누나가 쟤하고만 놀잖아!”
“형이 장담하는데 나중엔 어차피 너 건오랑만 놀 거야. 그러니까…….”
“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나빠! 제일 싫어! 으아아아앙!”
훗날 하람이 기억하지 못한다며 우기는 날이었다.
* * *
꿈에서 깬 건오는 팬티가 젖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몽정인지, 스스로가 한심해 한숨이 터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는 올해 16살이었다.
흔히 이팔청춘이라 부르는 혈기 왕성한 중학생은 오전 3시부터 창문을 열고는 샤워를 했다. 그래도 꿈속 다봄이 아른거려 수학 문제집까지 꺼냈다. 그제야 겨우 진정이 됐다.
시간이 지나, 여느 때처럼 주혁이 출근 준비를 시작하면서부터 집 안에 소음이 나기 시작했다. 건오도 새벽부터 풀던 문제집을 챙기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1층으로 내려가니 주혁과 하람이 먼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선하가 1층 다봄 방을 향해 소리쳤다.
“딸! 일어나야지!”
“엄마, 오늘 연다봄 개교기념일이랬잖아.”
“알지. 근데 약속 있다고 깨워 달라던데? 건오 어서 와서 앉아.”
건오는 다봄의 방문을 보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선하의 고함이 이어졌다.
“연다봄!”
“일어났어, 일어났어!”
건오는 일부러 느릿하게 젓가락질을 했지만 등교할 시간이 자꾸 가까워졌다.
얼굴은 보고 가고 싶은데.
“아버지, 오늘 우리 태워다 주라. 자전거에 바람 빠졌어요.”
때마침 쉬지 않고 불고기를 먹던 하람이 주혁에게 부탁했다.
주혁이 내려다보던 종이 신문에서 눈을 떼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30분에 출발하자.”
“앗싸. 밥 더 먹고 가야지.”
그렇게 출발 시간이 늦어졌다. 건오 기준으로 하람이 오랜만에 아주 쓸 만한 짓을 했다.
하람이 아침부터 두 그릇을 비우는 사이, 금세 젓가락질을 멈춘 건오는 방에 올라가 가방을 챙겼다. 체육 수업을 확인하고, 잘 개켜진 체육복도 꺼냈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건오는 새벽에 열어 둔 창문을 돌아봤다. 헐레벌떡 집을 나서는 다봄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 보고 싶었는데.
마른 입술을 축인 건오는 아쉬운 마음으로 가방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마침 배를 채운 하람이 다봄에 대해 묻고 있었다.
“연다봄 어디 가는데, 엄마?”
“반에서 어디 간다는 거 같던데.”
“오늘 교생 선생님이랑 반 애들 몇몇이 모여서 대학 탐방 간다고 했어. 그나저나 준비 다 했으면 나가자.”
고개를 갸웃하는 선하 대신 넥타이를 맨 주혁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고딩 됐다고 별걸 다하네. 엄마 다녀올게요!”
다봄에게 흥미가 끊긴 하람은 바로 가방을 챙기고는 현관을 벗어났다. 하람을 시작으로 건오와 주혁도 선하와 인사를 나누었다.
주혁의 차로 이동하니 강산 중학교까진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주혁은 갓길에 차를 세우곤 하람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잘 다녀와라. 하람인 수업 시간에 자지 말고.”
“왜 나만? 백건오는요?”
“건오가 흠잡을 데가 어딨어. 네가 너무 설렁설렁 다녀서 그렇지.”
“네에네에. 저희 갈게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녀올게요.”
고개를 꾸벅 숙인 건오와 대충 손을 흔든 하람이 주혁에게서 멀어졌다. 교문에 가까워질수록 하람과 건오는 익숙하게 떨어져 걸었다.
이윽고 매일같이 듣던 소리가 오늘도 귀를 때렸다.
“저 선배 진짜 얹혀 사나 봐.”
“연하람 아빠랑 백건오 아빠랑 친구였대. 그래서 키워 주는 거래.”
“난 그냥 후원만 받는다고 들었는데?”
“둘이 주소가 똑같아. 우리 오빠가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직접 봤다 그랬어.”
집에선 시끄럽던 하람도 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 입을 다물었다.
3학년 9반 교실로 들어간 하람은 바로 책상에 엎드렸고, 7반 교실로 들어간 건오는 영어 문제집을 폈다.
건오가 영어 단어를 5개쯤 외웠을 때 담임이 들어와 출석을 부르고 조회를 했다.
어김없는 하루였다.
선생님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학생들 틈에서 돌연 건오가 복도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건오가 주혁을 발견한 동시에 짧은 조례가 끝났다.
“그럼 이따 수학 시간에 보자꾸나.”
담임이 출석부를 안고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건오도 벌떡 일어섰다. 곧바로 담임의 놀란 목소리가 교실로 넘어왔다.
“어머, 아버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건오 아빠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 애가 차에 체육복을 두고 가서 잠시 올라왔습니다.”
복도로 나서던 건오의 발걸음이 잠시 주춤거렸다.
주혁이 스스럼없이 자신을 건오의 아빠라 지칭하자 당황한 담임이 급하게 말을 받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건오는 제가 불러 드릴…….”
“아뇨. 저기 나왔네요. 건오야, 이거 놓고 갔더라.”
담임에게 묵례를 해 보인 주혁이 뒷문으로 나온 건오에게 훌쩍 다가갔다.
쉬는 시간을 맞아 시끄러운 복도 가운데서 건오가 주혁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굳이 가져다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다봄 생각에 깜빡한 체육복쯤이야 연하람에게 빌리면 그만이었는데.
“……출근은요?”
“좀 늦는다고 했다. 그래도 양심이 있으니 서둘러 보려고. 그럼 이따 집에서 보자. 공부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하람에게 건넨 말과 전혀 달라 건오는 웃음이 날 뻔했다.
미미하게 올라간 건오의 입꼬리를 놓치지 않은 주혁이 그의 뒤통수를 벅벅 쓸었다.
마침 시끄러운 복도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어!”
복도 끝에서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하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큰 보폭으로 주혁과 건오 앞에 선 하람은 우두커니 선 건오의 뒤통수를 슬쩍 쓸어 주었다.
건오가 아침에 가라앉혀 놨던 곱슬머리가 주혁 탓에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건오가 하람의 손을 무심히 쳐 냈지만, 하람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매점 가자.”
“또 배고프냐?”
“아니, 나 말고 너. 아침 덜 먹었잖아.”
“연하람, 건오 핑계로 용돈 달라는 거지?”
“역시 아버지! 척하면 척이셔.”
하람을 무시하고 건오 담임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주혁은 바로 계단을 내려갔다. 하람이 그 뒤를 쫓으며 재잘거렸다.
“아니면 아버지도 같이 매점 가셔도 좋고. 백건오, 빨리 와.”
부자가 만진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빗은 건오가 마지못해 그들을 따라갔다.
표정이나 발걸음이나 잔뜩 귀찮은 티가 났지만, 그 걸음이 가벼운 것은 건오만 알았다.
그날 인스턴트 햄버거를 억지로 건오에게 먹인 하람은 핫도그를 3개나 사 들고 교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