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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외전 1-1 (68/72)

68. 외전 1-1

“그러니까 왜 갑자기 애를 들이자고 해서! 평소 하던 대로 연탄 나르거나 급식소만 다니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요!”

“하고많은 애들 중 저 새낄 선택한 건 당신이야! 잊었어?”

“아, 몰라요, 몰라. 난 저 애 눈이 너무 싫어요. 애 눈이 왜 저렇지? 귀염성이라고는 하나 없고, 그냥 노려본다니까요? 어쩔 땐 소름이 끼쳐!”

아직 새벽이 물러나지 않은 오전 4시 무렵, 건오가 잠에서 깼다.

밖에서 들리는 대화 또는 싸움을 듣던 아이는 비몽사몽 중에 눈을 비비고 이불을 벗어났다.

어스름한 달빛에 거울을 들여다보는 아이의 눈 주위는 피멍이 들어 부어 있었다. 지난밤 매질은 유독 아프더니 상처도 오래갈 듯했다.

“그냥 애가 싫으니까 다 싫은 거겠지. 어떤 애를 데려와도 당신은 똑같았을걸?”

“뭐라고요?”

“소름이 끼칠 정도면 눈에 뭐라도 씌우든가.”

“씌우긴 뭘…….”

“안대나 넥타이나. 하다못해 수건이라도 싸매. 아니다, 지금 직접 해 줄게!”

벽에 기대앉아 있던 건오는 방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얼른 이불에 숨었다.

머지않아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이가 자든 말든, 우악스러운 손길이 작은 이불을 빼앗아 갔다.

남자는 이미 깨어 있는 아이를 보고 씩 웃었다.

“얘야, 우린 네 눈이 참 마음에 안 들어.”

“…….”

“이유는, 그냥. 없어. 저 여자가 싫대.”

술 냄새가 잔뜩 나는 남자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넥타이를 풀었다. 그러곤 누운 아이를 억지로 일으키더니, 아이의 작은 뒤통수를 거칠게 끌어왔다.

그렇게 쫙 펴진 넥타이가 그대로 건오의 시야를 가리려 했다.

“가만히 있어!”

두려움을 집어먹은 건오의 움직임이 점차 커졌다.

아이의 반항이 우습게 느껴진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곰 발바닥만 한 손을 휙 치켜올렸다.

그 순간, 문 근처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여자가 소리쳤다.

“너!”

누구의 손에도 잡히지 않은 넥타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뿌연 건오의 시야에 여자가 들어왔다.

건오와 눈이 마주친 찰나, 잠시 흠칫한 여자는 얼굴을 팩 찡그렸다.

“네가 직접 해.”

여자의 손가락이 이불 위로 떨어진 넥타이를 가리키자 건오의 시선도 그리 옮겨갔다.

그새 김이 샌 남자는 아이의 이부자리에서 일어나며 압박하듯 물었다.

“네가 할 거야?”

건오는 고개를 쉼 없이 주억거렸다.

그 모습에 아예 건오에게 흥미를 잃은 남자는 여자를 지나쳐 휙 방을 빠져나갔다.

폭풍이 몰아친 듯 방 공기가 헤집어졌다.

여전히 문 언저리에 선 여자가 복잡한 시선으로 건오를 보았다.

“……우리, 눈 마주치지 말자.”

여자의 말투에서는 감출 수 없는 멸시가 묻어났다.

건오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걸 마지막으로 여자는 방문을 닫았다.

사위가 고요해진 가운데, 건오는 넥타이를 들어 접어 제 눈을 가렸다.

몰려오는 졸음을 참고 눈을 제대로 가리기 위해 묶는 연습을 했다. 건오의 좁은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그쯤이 돼서야 다시 졸음이 찾아왔다. 하품한 건오는 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배고픔과 두려움을 품었다.

* * *

며칠 뒤 넥타이는 수건으로 바뀌었고, 또 며칠 뒤엔 안대로 바뀌었다. 이제 건오는 두 사람의 기척이 들리면 알아서 눈을 가렸다.

그와 동시에 아이는 계속해 말라 갔다. 건오에게 몰래 밥을 주던 가정부는 얼마 전 잘리고 말았다.

외로운 줄 모르면서 외로운 건오에게도 나름대로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여자와 남자가 없는 낮.

매일 아침에 사라지는 남자와 달리 여자까지 집에 없는 날이면 건오는 여자가 알아서 먹으라고 놓아둔 식은 음식을 먹은 다음, 마당에 나가 안대를 던져 놓고 아무 데나 쭈그려 앉았다.

그러면 방 안에서는 희미하게 들리던 소리가 크게 들렸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지나가는 자동차 엔진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그중 건오는 옆집 소리를 가장 귀 기울여 들었다.

“다녀왔습니다아아!”

건오에게 초콜릿을 건넸던 그 여자아이였다.

“안녕, 다봄이, 하람이. 오늘은 뭐 배웠어?”

“전 나눗셈이요! 근데 아줌마, 오늘 하람이가 실내화 가방 잃어버렸어요.”

“정말? 또?”

“아니야! 교실에 있을 거야! 진짜야!”

학원을 다녀온 남매와 그들을 받아 주는 가정부의 소리가 짧게 들렸다.

운이 좋은 날엔 옆집 남매가 밖에서 뛰노는 소리까지 듣기도 했지만 오늘은 아닌 듯했다.

건오는 이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해가 지기도 전에 이불속에 들어가 안대를 썼다.

오늘 엿듣는 다른 세상 얘긴 여기까지였다. 아이는 오지도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그날 밤, 남자가 술에 취해 집에 왔다. 겨우 잠들었던 아이는 머리채를 휘어잡히며 눈을 떴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이 까매 사리 분별을 하기 어려웠다.

남자는 그대로 뺨을 내려쳤다. 어마어마한 타격감이 쩡, 방을 울렸지만, 잡힌 머리카락 때문에 날아가지도 못했다.

“이 새끼!”

“여보! 멈춰요!”

“다 네놈 때문이야!”

“그만하라고!”

“네놈을 들여오고 나서부터 다 이 모양이잖아!”

그렇게 양쪽 뺨을 번갈아 맞았다. 그치지 않는 손찌검에 안대만 얼굴을 타고 벗겨졌다.

얼른 눈꺼풀을 내린 건오는 바닥에 던져져도 절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때 등이 밟혔다.

“컥.”

단말마의 신음이 터지자, 공처럼 아이를 차려던 남자가 동작을 멈췄다.

건오는 잠깐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르작거리지도 않아서 남자와 여자는 아이가 혼절한 줄 알았다. 여자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미쳤어요?”

“…….”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그래? 왜? 이제 와 불쌍해? 그럼 당신이 쟤 상태 좀 확인해 봐. 못 하겠지? 건드리기도 싫지? 이게 어디서 위선이야!”

남자의 고함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웅웅 울렸다.

그런데 정말 이상했다. 이 와중에 그 여자아이가, 다봄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오늘 들었던 그 대화였다. 그러더니 제게 초콜릿을 내미는 천사 같은 그 모습이 떠올랐다.

그 상태로 건오는 서서히 정신을 놓았다. 이대로 며칠은 기절하길 바랐지만, 건오는 아침이 되자 어김없이 눈을 떴다.

그새 남자 여자는 사라지고 다시 혼자였다. 안도감에 아이는 가장 먼저 든 생각을 무심코 중얼거렸다.

“배고파…….”

그 말을 내뱉자마자 웬일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 집에 온 뒤론 억지로라도 눈물을 참았는데, 새까만 눈앞을 보니 문득 서러움이 차올랐다.

건오는 한참을 이불만 쥐고 숨죽여 울었다.

건오는 남자와 여자가 모두 사라진 낮이 되어서야 안대를 벗었다. 여전히 배가 고팠지만, 무얼 찾아 먹을 힘은 없었다.

그때 창가에 놓아둔 초콜릿이 보였다. 저걸 먹으면 옆집 아이와 연결고리가 끊길 것 같아 겁이 났다. 하지만 오늘은 배가 너무나 고팠다.

건오가 머뭇거리며 초콜릿 비닐을 깠다. 작은 초콜릿은 입 안에서 순식간에 녹았다.

그게 아까워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또 울긴 싫어 꾸역꾸역 참았다.

그러다 문득 거울을 봤다. 엉망진창에 야윈 얼굴이 건오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다봄이 찾아왔다.

오늘도 벽에 쭈그려 앉아 있던 건오는 대문을 두드리는 소녀를 한참이나 대문 앞에 세워 두었다.

쿵쿵 뛰는 심장은 물론이거니와 부은 얼굴도 감추고 싶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다봄을 돌려보내기도 싫었다.

“저기, 문 열어 주면 안 돼?”

그렇게 망설이던 건오는 다봄이 직접 부탁하자 대문을 열었다. 고민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혼자야?”

건오는 대답 대신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다봄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매일 앉던 벽으로 뛰어가 기대앉았다.

마치 쫓기는 모양새에 소녀는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그게 꼭 겁먹은 길고양이가 도망가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숙인 건오 앞에 새하얀 운동화가 섰다. 소녀 신발과 자신의 검은 안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게 창피해 건오는 줄지어 이동하는 개미만 내려다봤다.

개미를 보는 건오의 정수리를 보던 다봄이 말을 걸었다.

“집에 놀러 오라고 했는데 왜 안 와? 기다렸어.”

기다렸다고?

“이제 성당도 안 다니는 거야?”

아니야, 못 가는 거야.

속으로 대답하던 건오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놀란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다봄은 이제야 건오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이다.

건오는 눈을 끔뻑이며 다봄을 응시했다. 다봄의 맑은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데, 그게 아마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우리 집에 가자.”

“안 돼.”

단호한 거절에 다봄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오늘 건오가 다봄에게 뱉은 첫마디였다.

“우리랑 놀기 싫어?”

아니. 놀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다봄과 계속 같이 있고 싶지는 않았다.

“가. 네가 있으면 나만 혼나.”

“……아, 알겠어.”

다봄은 울먹였지만, 건오 앞에선 끝끝내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건오에겐 찡그린 그 얼굴 역시 천사처럼 예뻐 보였다.

결국 어린 소녀는 돌아갔다. 이내 정원에서 놀던 하람이 울면서 들어오는 누나를 향해 왜 우느냐고 빽빽거렸다.

그 외침이 담을 넘어왔다.

역시 울었구나.

건오는 이상한 기분에 어쩔 줄 몰랐다. 누가 날 보고 울면 원래 이런 느낌인지, 가슴께가 불편했다.

고여 있던 다봄의 눈물이 자꾸만 생각났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서러움이, 비참함이 아주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건오는 불도 켜지 않은 방에 틀어박혀 다봄의 모습만 곱씹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뜰 때까지, 종래엔 하얗고 깨끗하던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되새겼다.

다봄 생각만 하면 속에 가득 차 있던 두려움이 옅어졌다. 그래서 그만둘 수 없었다.

그게 버릇이 될 즈음, 양부모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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