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 (67/72)

67.

“왔어?”

퇴근 시간에 맞춰 건오가 다봄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다른 때보다 유독 반기는 듯한 느낌에 그가 그녀의 테라스를 눈짓했다.

“나도 바로 정리하고 따라갈게.”

다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테라스로 밀었다.

건오가 다봄에게 청혼했던 이곳. 이곳에서 요 닷새간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건오가 고등학교 자퇴한다고 했을 때 처음으로 혼냈는데, 어휴, 애 고집이 말도 못 해요.”

“어머. 그래서요? 자퇴시켰어요?”

“어쩔 수 없이 건오랑 하람이랑 둘 다 자퇴시켰죠. 그래서 걔들 다봄이랑 동기예요.”

선하와 건오의 친모 미경이 여기서 만남을 갖기 시작한 건 상견례 후, 혼배성사 전이었다.

건오가 자라 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미경은 다봄을 통해 선하와의 만남을 부탁했다.

처음엔 어떤 사진을 봐도, 무슨 얘기를 들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던 미경은 사흘이 지나서야 눈물을 흘리지 않고 건오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 왔습니다.”

“건오 왔어?”

두 어머니 사이에 앉은 건오는 이 순간 이곳의 테이블이 원형이라는 점에 감사했다. 둘 중 한 분의 옆에 앉았다면 다른 분께 괜스레 미안해졌을 것이다.

“어서 와. 네 얘기 중이었어.”

“건오야, 고등학교 때 자퇴는 왜 한 거야? 혹시 다봄 양 때문이니?”

미경은 선하가 전혀 상상해 보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선하는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는데, 건오는 바로 긍정했다.

“역시 그랬구나.”

“뭐라고? 다봄이 때문이라고?”

얘기를 들을 때부터 이미 아들의 자퇴 이유를 예상하던 미경은 덤덤히 받아들였지만 선하는 너무 놀라 손을 떨었다.

건오가 그녀의 손을 발견하고는 그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그러곤 남의 얘기를 하듯 선하를 진정시켰다.

“그때는 누나랑 한 살 차이가 너무 커 보였어요.”

담백하게 반복된 인정은 선하를 더욱 얼떨떨하게 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입술만 열고 닫다 뒤늦게 심호흡을 했다.

“그럼 연하람은 뭐니?”

“연하람은 저한테 뒤처지는 게 싫다고 자퇴한 거고요.”

“세상에.”

선하는 순간적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다, 그 손으로 건오의 등을 쳤다.

짝 붙는 소리와 함께 건오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이놈들이 아주!”

“엄마, 진정해.”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다봄이 잽싸게 선하의 손을 잡았다.

건오의 고백 아닌 고백에 다봄도 충격을 받았지만, 당장은 미경의 상태가 더욱 신경 쓰였다.

건오가 선하의 손을 잡은 순간부터 미경은 씁쓸함을 감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어머님, 그러면 오늘은 건오랑 먼저 들어가실래요? 저녁에 아버지께서 회사 짐 좀 정리하러 오신다고 하셔서, 저랑 엄마는 조금 더 있다가 가야 할 것 같아요.”

다봄은 뒤늦게 실수를 자각한 선하의 어깨를 토닥이며 미경을 향해 말했다.

다봄의 살가운 제의가 고마운 것도 잠시. 미경은 건오를 바라봤다.

제 아들과 들어가라는 말이 낯선 탓이기도 했지만 건오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가요, 어머니.”

건오는 일상적인 말을 들은 듯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결같이 침착한 모습에 미경은 다봄과 미리 이야기가 되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다봄과 선하와 헤어진 미경은 건오를 따라 근처 중식당으로 향했다.

아들과 밥까지 먹을 줄은 몰랐던지라 미경은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혹시 못 드시는 음식 있으세요?”

“아니. 없어. 건오도 없댔지?”

“네.”

짧은 대화가 어색했지만, 미경은 그마저도 좋았다.

그러나 건오는 그게 무척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어머니.”

식사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미경을 부른 건오가 나지막이 운을 뗐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요.”

혹시나 본인이 거리를 두는 것으로 생각할까 봐 건오는 그 점부터 짚었다. 그리고 조금은 머쓱하게 덧붙여 말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종종 이렇게 식사하면 좋겠어요.”

처음부터 미경 앞에서 감정의 동요를 보여 주지 않던 건오에게서 쑥스러운 티가 났다.

그래서 미경은 한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흐를 뻔한 눈물을 간신히 참아 낸 그녀는 얼른 목을 가다듬었다.

미경은 저 말이 지금 건오가 제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표현이라는 걸 알았다.

“괜찮고말고.”

미경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행복하게 답했다.

* * *

거실에 미사보를 쓴 다봄과 새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건오의 사진이 걸렸다.

그 사진은 작은 액자로도 만들어져 무려 여섯 곳에 나누어졌다.

다봄의 사무실, 건오의 사무실은 물론 부부의 부모님 공간에도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하람은 액자가 나온 다음 날, 사건에 대한 의견도 나눌 겸 건오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사진 나왔다며?”

“응.”

“잘 나왔네.”

하람은 커피를 내려놓고 액자를 가져가 뚫어지게 보았다.

지난밤 건오가 거실 한편에 자릴 잡고 들여다보던 모습과 비슷했다.

“근데 너 솔직히 우리 엄마 아니었으면 혼인성사 안 했지?”

“아니.”

“아니긴. 엄마랑 연다봄 아니면 성당도 안 갔을 거면서.”

“그래도 성사는 해야지.”

하람은 건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건오가 성당에 가는 이유가 온전히 다봄 때문인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독실한 선하 밑에서 자란 다봄이 혼인 성사를 당연하게 생각하니까 이번에도 그냥 따른 것이리라 여겼다.

하지만 건오에겐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가톨릭에선 이혼을 금기시하니까.”

하람은 하마터면 액자를 떨어트릴 뻔했다.

순식간에 등이며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가 가라앉았다. 무심코 튀어 나가려는 욕을 참고 있으니 건오가 하람에게 다가왔다.

“고해성사도 하고 혼인성사도 했으니 다시 잘 다녀 봐야지.”

얼어붙은 하람을 보고 건오는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곤 하람이 내려놓은 커피와 함께 그의 손에서 액자를 가져갔다.

하람은 몹시 찝찝한 낯이 되어 커피 한 잔을 더 내렸다.

사진 속에서 미사보를 쓰고 순진하게 웃고 있던 제 누나를 떠올리니 아직까지 소름이 가라앉질 않았다.

“그래,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일단 하람도 건오를 따라 성사에 관한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했다.

그는 다 내린 커피를 들고 자리를 잡았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때, 에어컨을 틀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놀란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되는 듯했다.

하람은 조금 전 건오의 말을 잊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참고로 지금부터 말할 건 사무장님이 얘기만 전하라 하신 거야.”

“뭔데.”

“연태철이 구치소에서 우리 사무소에 변호를 의뢰했대.”

태철을 말하자 건오는 환멸 나는 시선으로 답했다.

그들 사건으로 인해 결혼식을 미루게 된 건오는 특히나 감정이 좋지 않았다.

검사는 그들 부자에게 높은 형량과 추징금을 구형했고, 곧 1심 공판이 열릴 예정이었다.

“어느 구치소랬지?”

“한강이던가.”

관심 없는 어조로 한마디 주고받은 그들이 괜히 커피를 한 번 더 마신 참이었다.

“어서 오세요. 정말 바로 알아보겠네요.”

손님을 반기는 사무장의 높은 목소리가 건오의 사무실에 넘어왔다.

두 변호사가 서로에게 눈짓했지만, 그들 모두 상담이 예약된 의뢰인은 없었다.

사무장이 저렇게 반기는 경우가 흔치 않기에 하람은 직접 사무실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건오의 귀에 박혔다.

“정말요? 저 소개도 아직 안 드렸는데.”

“기사 사진도 봤고, 무엇보다 연 변호사님 얼굴이 보이네요. 두 분 중 어떤 분 만나 뵈러 오셨어요?”

“남편이요.”

다봄의 간단한 대답에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고 있던 하람이 혀를 내둘렀다.

“남편이래. 와.”

“참, 이거 나눠 드세요.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이렇게 사 왔어요.”

가뿐히 동생을 무시한 다봄은 양손 가득 커피가 담긴 캐리어를 사무장에게 건넸다.

사무장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그럼 전 들어가 볼게요.”

“네, 네.”

문에 기대 있던 하람은 건오의 눈초리에 슬그머니 사무실을 나섰다.

“일은 제대로 하고 쫓아온 거야?”

그가 건오의 사무실로 걸어오는 다봄에게 잔소리하듯 묻자, 그녀가 하람을 지나치며 대꾸했다.

“너나 잘해. 어디서 누나한테.”

그리고 바로 문이 닫혔다.

어쩐지 벌써 닮아가는 듯한 부부의 모습에 하람이 가볍게 웃었다.

* * *

“바빠?”

“아뇨.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연락도 없이 왔어요.”

“다른 분들께 커피 드리러 온 거야. 네 얼굴은 겸사겸사.”

그런 것치고 다봄은 건오의 품에 안겨 그를 뚫어지게 올려다봤다.

건오도 지지 않고 다봄을 바라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보고 싶을 때 딱 와 줬네요.”

“보고 싶어 할 것 같았어.”

태연한 척 답한 다봄은 건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건오는 다봄의 머리카락을 넘겨 붉어지는 그녀의 귀와 목덜미를 구경했다.

“방금 사무장님한테 남편이라고 했죠,”

“아, 그분이 사무장님이야?”

다봄은 헛기침을 하며 다른 소리를 하려 했지만, 건오는 어림도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한 번 더 불러 봐요, 남편이라고.”

“뭘 또 불러 봐.”

“듣고 싶어서. 응?”

다봄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이전에 본 적 있는 그의 사무실을 처음 오는 것처럼 둘러보며 딴청을 부리다가 책상 앞에 섰다.

다봄은 책상에 놓인 그들의 액자를 보며 살포시 웃었다.

다봄을 시선으로 계속 좇던 건오는 그 미소가 새삼스럽게 예뻐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때 다봄이 그와 시선을 맞춰 왔다. 동시에 그는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곧바로 토해 냈다.

“사랑해요.”

그는 누구보다 사무친다는 마음을 잘 알았다.

절절함도, 그리움도, 그런 감정들에서 비롯되는 고통도. 모두 다봄을 생각하면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절박하게 사랑한 여자가 그를 보며 얼굴을 붉힌다.

“나도 사랑해.”

건오의 시선이 삽시간에 그녀로 물들었다.

다봄은 그의 눈길을 받으며 해사한 얼굴로 속삭였다.

“남편, 우리 집으로 갈까?”

모든 찬란한 빛을 머금은 듯한 눈동자 안에 그가 담겼다.

건오의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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