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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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해가 지고 테라스에서 사무실로 넘어온 다봄은 책상에 앉았다.

그녀 앞엔 방금 청혼을 마친 건오가 자리했다.

“기다리기 힘들어서.”

건오의 눈매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집착이 묻어났다.

다봄은 그가 가져온 혼인신고서를 뚫어져라 보았다.

증인이 날인하는 칸에 연승훈, 연하람의 도장까지 찍힌, 그녀의 이름만 들어가면 완성되는 서류가 준비되어 있었다.

다봄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건오를 흘끗 보곤 혼인신고서 뒤에 함께한 서류도 확인했다.

사실 혼인신고서보다 더 놀랐던 게 그녀의 전셋집 매매 계약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집주인의 매매 권유를 받고 고민하던 게 석 달 전이었다.

정신이 없어 잊고 있다 이렇게 놓치나 싶었는데.

“싫어요?”

“응?”

다봄이 종이만 들고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자 애가 탄 건오가 재촉하듯 물었다.

건오 돈 많이 벌었구나, 따위를 생각하던 다봄은 정신을 차리고 혼인신고서를 다시 맨 위로 올렸다.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결혼이 미뤄질 때부터.”

“집도?”

“집은.”

건오는 다봄의 기분을 살폈다.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아 그가 솔직히 말했다.

“연하람이 따로 살자고 했을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다봄은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계획적이네.”

건오는 침착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그녀의 말에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다봄도 더는 매매 계약서에 관해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윤건오가 아니고 백건오로 쓰여 있어. 호적 정리가 되기 전에 먼저 하고 싶단 뜻인 거지?”

“누나만 괜찮으면요.”

대답을 들은 다봄은 혼인신고서에 대해서도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종이를 확인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건오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갈 즈음 다봄이 입술을 열었다.

“백건오랑 먼저 사는 건 좋아.”

다봄이 백건오라 적힌 부분을 톡톡 두드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좋은데요?”

그가 초조하게 되물었다.

그래도 결혼식 전 혼인신고를 먼저 하는 건 싫은 걸까.

걱정하는 그의 눈빛에 곧 이채가 돌았다. 다봄이 서랍에서 도장을 꺼냈다.

그 순간 건오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해야 할 게 있어.”

그녀는 빈칸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양쪽 부모님 찾아뵙고, 혼인신고 하기 전에 혼인성사 받아야 해.”

“약속 잡을게요.”

뭐든 한 달 내로 끝낼 수 있는 거면 되었다.

건오는 즉각 대답하며 다봄의 도장을 가져가 뚜껑을 열었다. 그러곤 그녀의 손에 직접 쥐여 주었다.

결국 다봄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 미뤄진 게 나만 서운한 줄 알았어.”

“설마. 붙잡혀 들어간 그 두 새끼, 아마 내가 제일 저주했을 거예요.”

말을 하는 와중에도 건오는 서류를 눈짓했다.

그의 재촉 덕에 다봄은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도장을 찍었다.

기다렸다는 듯 건오는 흡족한 미소로 혼인신고서를 가져갔다.

“영광이에요.”

“영광씩이나.”

괜히 부끄러워진 다봄이 우물거렸다.

그런 다봄과 혼인신고서를 번갈아 보던 건오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내려가요. 저녁 먹어야지.”

다봄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응. 맛있는 걸로 먹자.”

* * *

식당에 들어선 다봄은 건오가 하는 말을 들으며 까르르 웃었다.

그녀는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매로 그를 장난스레 나무랐다.

“편견이야.”

“알아요. 그래서 고민 많이 했어요.”

그녀에 반해 그는 상당히 진지했다.

어두운 식당 안엔 큰 샹들리에와 간간이 놓인 동그란 구슬 조명이 다였다. 타원형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이 공간과 잘 어울리는 그런 곳.

와인 잔이 올라오기 전엔 스테이크를 메인으로 한 코스 요리가 지나간 터였다.

“생일에 훠궈집을 가든 베트남 쌀국숫집을 가든 난 괜찮아.”

식당 예약 전, 건오는 엄청난 고민을 했다.

다봄이 먹고 싶다고 한 식당과 본인이 그녀와 함께하고 싶은 식당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결국 이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그럼 내년 내 생일엔 거기 가자.”

“내년까지 기다릴 게 뭐 있어요.”

“그런가? 그럼 내일이라도 가자.”

“우리, 직접 가서 먹고 와요.”

건오는 제가 생각한 절충안을 제안했다.

다봄은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직접?”

당연히 식당엔 직접 발로 가야지.

다봄은 건오의 말을 평면적으로 해석했고, 그는 그녀의 생각 회로를 잘 아는 만큼 부연했다.

“신혼여행으로 가서 전부 먹고 오자는 뜻이에요.”

신혼여행?

“잠깐만.”

그때부터 다봄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며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신혼여행이라는 달콤한 단어에 그녀는 본인의 스케줄을 생각했고, ‘전부’ 먹으러 가자는 말에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뭘 먹고 싶다고 했지?”

“푸팟퐁커리, 우육면, 쌀국수, 분짜, 훠궈.”

“적어도 3개국은 가야 하는데?”

건오는 긍정하며 가만히 다봄을 직시했고, 다봄의 눈동자는 한동안 정신없이 흔들렸다.

아무래도 인사 배치를 서둘러야겠다.

그렇게 결론 내린 다봄은 꽤 대표 같은 생각이었다고 자평하며 차분해졌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은 없어?”

“딱히.”

“그래도 하나쯤은 있을 거 아니야.”

다봄은 건오가 너무 제 위주로 여행지를 결정한 게 아닐까 우려했다.

그러나 그 장소를 들이민 건오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잠잠히 웃었다.

“난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중요해서요.”

그 말을 전하는 목소리는 물론이거니와 눈빛까지 달콤했다.

순식간에 부끄러워진 다봄은 수줍게 웃었다.

“나도 너랑 같이 가면 어디든 좋아.”

그를 따라 입꼬리를 올린 그녀가 표정을 감추기 위해 와인을 마셨다.

그러자 건오의 눈썹이 모였다. 다봄의 표현엔 여전히 면역이 없는 탓에 이런 말에도 하릴없이 목이 탔다.

그는 그녀가 와인을 비우는 동안에도 표정을 수습하지 못했다.

“근데 아까 차 뒤에 쇼핑백 있던데, 그건 뭐야? 일이야?”

그런 건오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봄은 기습적으로 물었다.

딱히 캐물으려는 것은 아니고, 그의 차가 원체 깨끗했기에 다봄으로서는 서류 가방 옆에 놓인 쇼핑백이 궁금할 뿐이었다.

“누가 일을 쇼핑백에 들고 다녀요.”

건오는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어깨를 내리고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러면?”

“누나 선물.”

“내 선물? 나 이거 받았는데?”

반지를 선물이라고 생각했던 다봄이 당당하게 왼손을 폈다.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만족스럽게 확인한 건오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궁금하면 내려갈래요? 와인도 다 마셨는데.”

선물이 궁금해진 다봄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면 대리는 선물 확인하고 부르자.”

제안한 건오보다 다봄이 먼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힌트를 달라고 했지만, 건오는 별거 아니라며 질문을 피했다.

주차장에 내려오자마자 다봄은 바로 그의 차 뒷좌석으로 향했다.

“내가 봐도 돼?”

봐도 되냐고 물으며 다봄은 이미 뒷좌석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가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줄게요.”

건오의 동작이 조금씩 뻣뻣해지자, 다봄은 씨익 웃으며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요.”

그는 그답지 않게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며 다봄에게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대하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막상 주려니까 창피해서.”

“선물에 창피한 게 어딨어?”

“이건 좀, 그러네.”

정말 건오답지 않게 대답도 말투도 어색했다.

안에 든 걸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다봄은 선물도 선물이지만 건오의 모습을 구경하며 그의 선물을 기다렸다.

그런데도 건오가 쇼핑백을 주지 않자 다봄이 슬쩍 얘기했다.

“건오야, 나는 네가 색종이로 꽃을 접어 줘도 좋아.”

“끔찍한 소리.”

다봄은 나름대로 용기를 주려 한 말인데 건오는 대번 진저리쳤다.

그녀는 그의 반응에 멋쩍게 변명했다.

“나는 다 괜찮다고.”

“여기요.”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다봄의 도발에 걸려든 그는 아주 작은 상자를 그녀에게 건넸다.

다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꽤 큰 쇼핑백에서 이렇게 작은 종이 상자를 꺼내어 준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작은 상자가 문제였다.

빛이 바랜 상자는 딱 봐도 세월이 묻어 있는 데다 상자 디자인부터 분홍색으로 몹시 어린 감성이 묻어났다.

우선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봄이 상자를 열려는데, 그 전에 건오가 또 다른 상자를 넘겼다.

“이것도.”

이번엔 상앗빛 상자가 다봄의 눈앞에 나타났다.

크기는 첫 번째 상자와 비슷했지만, 과연 이 상자가 처음부터 이 빛깔이었을까 의문이 들 만큼 오래돼 보였다.

“으응, 고마워.”

두 개나 받으니 다봄은 내용물도 모르고 고맙다는 말부터 했다.

이제 진짜 분홍색 상자 안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더 있어요.”

“또?”

당혹스러운 되물음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갔다.

다봄은 쇼핑백의 크기를 재차 눈으로 확인하고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냥 한 번에 줘.”

건오는 잠깐 망설였지만, 쇼핑백 안을 흘끗 보더니 포기하고 넘겨주었다.

다봄은 생각보다 가벼운 쇼핑백 안을 확인했다.

그녀는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 가장 먼저 상자의 개수를 확인했다.

10개.

무려 10개의 상자를 받은 다봄은 마른침을 삼키며 건오가 가장 먼저 주었던 상자를 열었다.

“귀걸이네?”

작은 상자 안엔 반짝이는 귀걸이가 빛나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다봄은 상앗빛 상자를 열었다. 그것 역시 귀걸이였다.

다봄은 가만히 있는 건오를 곁눈질하곤 쇼핑백 안 상자 중 아무거나 꺼내 열었다.

먼저 열었던 두 상자와 달리 남색 케이스부터 고급스러웠다.

그 안에선 영롱한 목걸이가 나왔다.

“이게 다…….”

다봄은 어느 순간부터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나머지 상자 안에 든 액세서리는 제각각이었고, 그 품질 역시 제각각이었다.

다섯 번째 상자를 열 때부터 다봄은 선물에만 시선을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모든 선물을 확인했다.

다봄은 가장 비싼 팔찌를 넣어 두고, 누가 봐도 오래되고 저렴해 보이는 귀걸이를 잡았다.

건오가 가장 먼저 준 상자에서 나온 것이었다.

“10년 전 누나 생일날 산 거예요.”

다봄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도카니 귀걸이를 응시했다.

그때의 그녀가 좋아했던 스타일이 다봄의 손안에 있었다.

“근데 너, 내 생일 꼬박꼬박 챙겨 줬잖아.”

“그건 누나가 고른 거. 이건 내가 해 주고 싶었던 거.”

건오는 다봄에게 책 따위를 선물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귀걸이, 목걸이, 발찌, 팔찌. 연인이 선물하는 게 자연스러운 그런 것들을 주고 싶었다.

“내가 주고 싶은 것만 주는 누나 생일은 처음이네요.”

속 시원하게 말하는 건오와 반대로 다봄이 조용히 울음을 눌렀다.

그녀가 성인이 된 후부터 연례행사처럼 쌓인 10개의 상자. 그 상자들은 그의 감춰 왔던 마음과 세월을 상징했다.

이제껏 차마 건네지도 못할 선물을 사 왔던 그는 며칠 전에 산 팔찌를 꺼내 그녀의 손목에 걸었다.

“생일 축하해요.”

다봄은 목이 메어 팔찌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대답을 들은 듯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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