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 (65/72)

65.

다봄의 생일날, 대부분의 신문사 경제면의 메인 기사는 연광그룹의 주가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리고 그 연관 기사엔 늘봄의 새 대표가 된 다봄의 소식이 짧게 실렸다.

아침부터 그 신문을 받아 본 하람은 건오의 사무실에서도 같은 뉴스를 보게 되었다.

모처럼 일찍 일을 마친 하람은 TV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볼 때마다 이상해.”

“뭐가?”

-연광그룹의 주가가 하루 만에 반등하고 있습니다. 대표 교체라는 초강수와 함께 발 빠른 대처를 보여 준 연광그룹을 향한 투자자들의 심리가…….

“아버지랑 연다봄이 뉴스에 언급되니까 꼭 다른 사람들 같잖아.”

연광그룹 영향 같은 건 받지 않고 자랐다고 생각해 온 하람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두 핏줄이 낯설었다.

마침 일을 마무리하던 건오도 다봄이 언급되자 TV 뉴스를 응시했다. 그녀가 경찰청에 들어가는 모습이 영상으로 짧게 나왔다.

“처음부터 다른 부류였어.”

하람의 감상에 건오는 동조하지 못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를 부족한 것 하나 없이 키워 준 주혁과 그를 구원해 준 다봄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그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걸.

분명 한 집에서 숨을 쉬지만, 다봄과 그는 애초에 딛고 선 곳이 달랐다.

“어릴 땐 그런 말을 하는 네가 이해가 안 돼서 짜증 났는데.”

하람이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과 거리를 두는 건오가 미웠던 시절이 떠오르니 그때의 다봄도 함께 기억났다.

“연다봄도 진짜 웃겼지. 지도 어린데 너 챙기겠다고 숟가락 들고 너 쫓아다녔잖아.”

가족 모두가 가끔 하람처럼 웃으며 다봄과 건오의 10살, 9살 시절을 추억했다.

하지만 정작 다봄과 건오는 가족들과 같은 마음으로 웃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하람에게 건오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반응했다.

“그때마다 연하람 넌 식탁에서 자지러지게 울었고 말야.”

적당히 대꾸한 건오의 시선이 다시 TV로 향했다. 태철과 지웅의 뉴스가 연달아 나왔다.

그는 시끄러운 TV를 끄고 뜨거움이 한결 가신 커피를 마셨다.

이제 하람은 당연히 어깨를 으쓱이며 기억이 안 나는 체해야 했다. 그래야 지금까지의 레퍼토리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내가 왜 울었는지 알아?”

그런데 하람이 처음으로 이 대화의 방향을 바꿨다.

“연다봄 관심을 뺏겨서. 그래서 자지러지게 울었어.”

장난스러운 어조엔 당시를 회상하는 추억이 묻어났다.

건오가 굳이 대답하지 않고 기다리니, 하람은 성격대로 바로 말을 이었다.

“내가 처음에 널 싫어했던 것도 연다봄 때문이었어. 제일 친한 친구를 빼앗긴 기분이었거든.”

하람이 커피 잔을 내려놓고 건오의 책상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복잡한 사건을 맡은 것처럼 심란해 보이기도 했다.

“어른이 되니 이젠 연다봄이 내 제일 친한 친구를 데려가네.”

하람의 시선이 건오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 멈췄다.

이미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그는 서류를 가져가더니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둘이 잘 살아. 그래야 나도 같이 오래오래 놀지.”

이 말을 하기 위해 하람은 그답지 않게 먼 길을 돌아왔다.

그는 괜히 서류를 팔락거리며 눈썹을 으쓱였다.

남매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 모습은 확실히 다봄과 닮아 있었다.

“누나한테 잘 전달할게.”

의자에서 일어선 건오가 하람에게서 서류를 도로 가져갔다.

하람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서도 다봄이 보이자 서류와 함께 짐을 챙기기 시작한 건오의 손이 빨라졌다.

바지런히 움직이는 건오를 보고 하람도 시간을 확인했다.

하늘은 벌써 노을을 만들어 낼 준비를 마쳤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전해 줘?”

건오가 재킷을 걸치고 아직도 같은 자리에 선 친구에게 물었다.

하람은 대번 질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간질거림 한계치야. 그쯤 해.”

“형은 따로 했을 텐데. 생일 축하한다고.”

하람을 지나쳐 문 앞에 선 건오가 그를 돌아봤다.

건오와 눈이 마주친 하람은 모든 걸 포기한 듯이 말했다.

“그럼 전해 주든가.”

“간다.”

빨리 나가라는 하람의 손짓을 마지막으로 건오가 퇴근했다.

* * *

다봄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자꾸 도착하는 선물 때문에 일의 흐름이 끊긴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방금 연광그룹 홍보팀에서도 퀵이 도착했는데요.”

“연광이요?”

종일 이런 식이었다.

다봄이 상자와 카드를 받아들자 승희가 이때다 싶어 미뤄 두었던 질문을 했다.

“민국일보에서 여성 CEO 인터뷰하고 싶다고 요청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시잖아요. 앞으로도 그런 건 다 거절하세요.”

“그래도 대표님 기부나 선행 같은 것도 알아서 조사해서 자료 실어 준 곳이라서요.”

다봄의 꾸준한 기부 활동이 알려지면서 다봄은 물론 덩달아 주혁까지 이미지가 좋아지긴 했다.

그러나 다봄은 생각이 확고했다.

“기부는 그쪽도 기사 쓸 아이템으로 알아보다가 얻어 걸린 걸 테고, 무엇보다 전 자수성가가 아니라 운이 좋게 좋은 집에 태어난 사람이라 인터뷰해도 할 말이 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비서는 두 번 권유하지 않고 의견을 물렸다.

다봄은 연광그룹 홍보팀에서 보낸 카드를 읽고 다시 일에 몰입했다.

어떨 때는 타자기 소리만 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최종 결재를 위해 보고서를 들고 왔다가 그 자리에서 회의가 열리기도 했고, 어떨 때는 초기 기획서부터 까이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진심으로 이 시안이 귀여워서 올린 거예요?”

“앱이 업데이트 후 오류가 계속 나는데 거기선 뭐라던가요?”

“새로 출시될 베이커리 제품이 맛은 좋은데 이름이…… 미안하지만 영 마음에 안 드는데요.”

쉴 틈 없이 일한 다봄은 서둘러 인사 배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직원들 명단을 살폈다.

제가 했던 역할을 해 줄 사람들을 세 명 정도 뽑아 인사이동을 시키고, 그 빈 자리를 다시 채울 계획이었다.

“대표님, 커피 드세요.”

“고마워요. 와, 온몸이 뻐근하네요. 저 테라스 가서 좀 쉬고 있을게요. 퇴근 시간 되면 인사하지 말고 들어가세요.”

하루를 빽빽하게 채운 다봄은 퇴근할 힘도 나지 않아 커피를 들고 대표실 뒤편으로 향했다.

주혁의 특권이었던 이 테라스는 이제 다봄의 공간이 되었다. 대표가 된 그녀는 정말 이 공간 딱 하나만 마음에 들었다.

“하암.”

다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마시고 선 베드에 누웠다.

그 상태로 기지개를 켜고는 카디건을 담요처럼 덮으니 바로 몸이 노곤해졌다.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다봄은 눈을 감았다.

‘10분만 자자.’

해가 기운 탓에 햇빛이 그녀의 얼굴 정면으로 향했다.

눈을 감은 채 표정으로 불편함을 드러낸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햇빛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려 했다.

하지만 다봄이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의 공간이 다시 어둡게 물들었다.

“으음?”

깊게 잠들지 못했던 다봄은 이상함을 느끼고 눈꺼풀을 천천히 올렸다.

“깼어요?”

그녀가 눈앞의 건오를 끔뻑끔뻑 응시했다.

그는 몽롱한 다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어떻게 들어왔어?”

“음. 잘?”

“여기 보안이 엉망이네.”

다봄이 나른하게 웃으며 건오를 향해 돌아눕곤 여전히 비몽사몽한 상태로 그의 하루를 물었다.

“재판은 잘했어?”

“그것도 잘했어요.”

“다행이네.”

“대표 되니까 어때요?”

“귀찮아.”

그녀는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미간을 좁혔다.

건오는 다봄의 짧고 솔직한 대답이 마음에 들어 입꼬리를 올렸다.

다봄은 그 미소를 보며 그와 하려던 일을 떠올렸다.

“우리 반지 맞춰야 하는데, 지금 몇 시야?”

벌써 해가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상체를 세운 다봄이 선 베드를 짚으며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세상에, 7시가 다 됐…….”

그녀의 말이 뚝 끊겼다.

고요히 숨을 들이쉰 다봄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천히 제 왼손을 들었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는 처음 보는 반지가 제자리인 양 안착해 있었다.

다봄의 시선이 느릿하게 건오에게 향했다.

건오의 자세가 이제야 보였다. 그는 처음부터 한쪽 무릎을 꿇고 다봄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숨에 긴장한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거, 그거야?”

“누나가 말하는 그거가 청혼이라면, 맞아요.”

그는 반지가 자리한 다봄의 왼손을 잡아 제 손 위에 올렸다.

선명하고 깨끗한 눈동자가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만을 주시했다.

기억이란 게 있을 때부터 그는 불행했다.

처음부터 부모가 없는 줄 알았고, 보육원에선 눈칫밥을 먹었다.

그를 입양했던 양부모는 작은 소년을 굶기고 때리다 돌연 죽어 버렸다.

아이가 주어진 불행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 다봄은 기꺼이 행운이 되어 주었다.

다봄은 울지도 못하는 소년을 대신해 울어 주었고, 곁에 있어 주었다. 그의 끼니를 유난스레 챙겼고, 그가 받는 대우에 누구보다 예민했다.

중학생 때는 용돈을 털어 고기를 사 주고, 고등학생 때는 유명한 뮤지컬, 전시회, 연주회에 데려가 주었다.

다봄 덕에 건오는 따뜻했다.

그래서 건오 생의 모든 노력은 다 다봄을 위한 것이었다.

뭐라도 해 주고 싶고 조금이나마 그녀와의 간극을 좁히고 싶어 죽어라 공부했다.

결국 그 틈을 좁힐 수는 없었지만, 그 노력은 그를 제법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 수 있게 했다.

“난 누나가 너무 소중해요.”

그윽한 음성의 끝이 살짝 떨렸다.

다봄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지금까지 보육원에 기부하고 있다는 걸 뉴스로 알았을 때, 그때도 이렇게 손이 떨렸다.

그녀는 그가 생각도 하지 못한 다른 방식으로도 한결같이 그를 아끼고 있었다.

“내 세상엔 누나뿐이었어요. 정말, 연다봄이 다였어.”

건오가 떨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자 다봄이 고개를 내렸다.

그의 손안에 잡힌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가 보였다.

건오의 마음을 담은 작은 징표가 마치 온도라도 있는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난 평생 이렇게 살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누나만 보면서, 누나를 우선으로. 그러니까.”

다봄은 일렁이는 눈동자로 다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감정이 무엇 하나 덧대지 않고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봄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괴롭혔다.

그녀의 어딘가가 북받치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을 때, 건오는 다봄이 좋아하는 예쁜 눈웃음을 그리며 바랐다.

“나랑 결혼해 줘요.”

다봄의 눈앞에 건오를 처음 만난 순간이 흘러갔다.

‘저기, 초콜릿 먹을래?’

‘어, 내 이름은 연다봄이야.’

‘너 우리 집에 놀러 올래?’

‘괜찮아, 건오야…… 내가 있잖아.’

다봄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을 참아 내며 물었다.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돼?”

“바보 같은 질문이에요. 그거 말고.”

“……사랑해.”

그녀의 속삭임만으로 건오는 심장이 저렸다.

“너랑 결혼할래, 건오야.”

그 고백이 미치도록 좋아서, 그는 제게 안겨 오는 다봄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영원을 믿지 않고 살던 건오는 이제 영원이란 걸 믿어 보기로 했다.

그래야 다봄과 제가 영원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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