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 (64/72)

64.

“화내라며.”

“하지만.”

“저 얼굴을 보니 마음이 바뀌었어?”

그런 게 아닌 걸 알면서도 건오는 못되게 말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지한은 계속 가까워졌다.

“눈이라도 마주칠 거야? 뭘 그렇게 빤히 봐.”

“건오야.”

건오는 대답하지 않고 다봄이 예민한 곳을 부러 다시 건드렸다.

속절없이 그녀의 허리가 뒤틀린 순간, 건오가 재차 짧게 입을 맞추더니 몸을 물렸다.

질투에 이성이 날아가긴 했지만 건오는 이런 표정의 다봄을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 없었다.

특히나 그게 서지한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벨트 매요.”

건오가 시동을 걸었다.

지한이 시동이 걸린 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오와 지한의 시선이 마주쳤다.

“갈게요.”

건오는 대답을 듣지 않고 액셀을 밟았다. 검은색 세단이 지한의 곁을 지나갔다.

지상 주차장을 빠져나간 건오의 차가 도로 위를 달렸다.

내부는 고요했다. 다봄은 벨트만 잡고 차창을 응시했고, 건오는 정면만 보았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고 다봄의 아파트에 들어선 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연결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층에서 사람들이 올라탔다.

그들은 가장 뒤쪽에 나란히 서서 바뀌는 숫자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문득 다봄의 오른쪽 손에 온기가 닿아 왔다. 마디가 굵은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작은 손을 파고들더니 옥죄듯 쥐었다.

7층, 21층, 32층.

사람들이 내리는 동안 그의 긴 손이 그녀의 손등이며 손바닥을 문질렀다.

다봄이 건오를 연신 곁눈질했다.

그는 숫자만 응시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손길이 더 은밀하게 느껴졌다.

39층, 41층, 47층.

더 올라갈 곳이 없는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다봄과 건오가 내렸다.

현관문에 들어선 그녀가 종일 신고 있던 구두를 벗었다.

맨발이 바닥과 맞닿는 순간, 그녀의 뒤에 있던 그가 한 손으로 다봄의 허리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약속한 것처럼 맞물렸다.

다봄의 고개가 젖혀지고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 주위를 뭉근하게 핥았다.

그것만으로 그녀는 차 안에서와는 다르게 건오의 움직임이 부드러워졌다고 착각했다.

그의 손이 다시금 블라우스 위로 올라갔다. 차 안에서는 다른 사람이 볼까 봐 단추 한 개도 풀 수 없었던 단추를 이번엔 금세 풀었다.

다봄이 확 고개를 내렸다. 절로 입술이 떨어졌다.

“건오야.”

“응. 왜.”

그는 태연한 목소리로 이젠 그녀의 등 뒤로 손을 움직였다.

팽팽하던 그녀의 속옷이 힘을 잃었다.

뒤이어 그는 다봄의 바지로 손을 움직였다.

“씻고.”

“씻고?”

“응. 씻고 하자.”

다봄이 제 바지 지퍼를 잡은 건오의 손을 다급히 잡았다.

게슴츠레 뜬 그의 시선이 다봄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녀의 상체를 가려 주던 블라우스와 속옷이 겨우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그 벌어진 틈 사이로 다봄이 보였다.

저걸 눈앞에 두고 어떻게 참아.

“그럼 씻으면서 해.”

다봄은 그의 시선을 뒤늦게 눈치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많은 걸 누른 그는 그녀가 협상할 건 그게 전부라는 것처럼 다봄을 응시했다.

그녀는 속절없이 콩닥거리는 본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대답 대신 욕실로 들어섰다.

다봄이 블라우스를 벗자 새하얀 등이 드러났다.

건오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셔츠 단추를 툭툭 풀었다.

이내 상의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다봄이 바지에 손을 댔다.

“꼭 누나 꿈 같네.”

그녀는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왜 멈춰.”

“아니야.”

그 꿈.

다봄이 유독 긴장한 이유를 건오가 입에 올렸다.

“거기서 내가 엄청 야했다고 했지.”

그의 셔츠도 욕실 바닥에 떨어졌다. 건오는 그 상태로 다봄에게 다가와 직접 그녀의 바지를 잡았다.

“아마 물을 맞으면서 했을 것 같은데.”

건오가 제 것처럼 다봄의 지퍼를 내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맞나 보네.”

단숨에 벌거벗게 된 다봄은 인사처럼 다가오는 그의 키스를 받으며 뒤로, 뒤로 밀려났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샤워부스 안이었다.

건오가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수증기를 만들어 냈다.

“너, 바지.”

다봄이 아직 벗지 않은 그의 바지를 발견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부스 안에서 건오는 다봄의 손을 끌어와 본인의 바지춤을 잡게 했다.

“누나가 벗겨 줘.”

그런 말을 신사가 말하는 것처럼 정중하게 속삭였다.

주춤거리던 그녀의 손이 조금씩 움직였다.

그 손을 빤히 내려다보던 건오가 시선을 들었다. 다봄과 건오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세상이 그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이 작은 공간 안에 둘만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했다.

건오가 다봄을 당겨 위에서 내려오는 물줄기 속에 세웠다.

흘러내리는 물속에서 건오의 손이 보란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봄의 숨이 가빠지고, 몸이 다른 때와 다르게 빠르게 반응했다.

건오가 물과 함께 그녀의 살을 머금었다. 다봄은 건오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아, 건오야.”

애타는 소리가 욕실에 울렸다.

눈썹 사이를 좁힌 건오는 다봄의 손을 치우고 바지를 벗어 던졌다.

그 와중에도 그의 입술은 다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물고 빨며 그녀를 적신 그가 다시 다봄의 입술을 찾았다. 이제 건오의 등에 물이 쏟아졌다.

그는 그 상태로 그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 순간 다봄이 무심코 허리를 움직였다.

“하.”

짙은 숨을 흘린 그가 단번에 그녀를 안았다.

공간 탓에 다봄의 숨소리가 숨김없이 울렸다.

그녀는 소리를 죽일 생각도 못 했다. 그저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건오를 느끼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건오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걸 기민하게 알아차린 그는 아예 다봄을 안아 들었다.

“건……!”

“꽉 잡아.”

놀라 부른 그의 이름은 채 완성되지 못하고 허공에 날아갔다.

건오의 움직임이 거세질수록 다봄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팔에 힘을 주고 힘껏 안았다.

다봄은 건오로 인해 쉼 없이 흔들렸다.

귀 옆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도, 제가 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들리는 거라곤 건오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수증기로 뿌옇기만 하던 다봄의 시야가 돌연 점멸했다.

“하아, 하아.”

건오가 숨을 몰아쉬며 축 늘어진 다봄을 고쳐 안았다.

“괜찮아요?”

다봄은 고개를 젓다 힘없이 웃고 말았다.

이럴 땐 또 말을 높이는 건오의 모습이, 탈진할 것 같은 와중에도 입꼬리를 올리게 했다.

“아니. 자고 싶어.”

“이따가. 이따가 데려가 줄게요.”

그는 다봄을 침대로 데려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물을 맞은 지 한참이나 지나서야 건오에 의해 제대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 * *

“건오야.”

“깼어요?”

샤워 후 정말 잠이 들어 버린 다봄은 두 시간을 내리 자고 침실을 나왔다.

창밖은 벌써 어두워졌고, 진작 저녁을 먹었어야 할 건오는 식탁에서 일하던 중이었다.

“내일 재판이 있어서.”

“맞다. 아직 뭐 안 먹었지?”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너 먹고 싶은 거 먹자. 화났잖아.”

다봄이 눈을 비비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모니터와 그녀를 번갈아 보던 건오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노트북에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미안해요. 누나 짝사랑하는 동안 나 혼자 그 새끼한테 쌓인 감정이 좀 많아서.”

다봄이 고개를 기울였다.

자고 일어났더니 건오가 묘하게 여유로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유를 파고들자니 또 건오 앞에서 지한이 언급될 게 뻔해 다봄은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사과할 일 아니야. 사과하지 마. 그나저나 먹고 싶은 거 생각해봐.”

“생일 앞둔 사람이 먹고 싶은 거 먹어요.”

“음, 그러면 푸팟퐁 커리, 우육면, 쌀국수, 분짜, 훠궈. 일단 생각나는 것만 말했어.”

다봄이 손가락을 접어 가며 다섯 가지 음식을 꼽았다.

건오의 눈동자가 흔치 않게 흔들렸다.

“이제 거기서 내가 고르면 돼요?”

“응.”

건오는 다봄의 기색을 살피며 메뉴를 골랐다.

한 가지씩 물어볼 때 가장 괜찮은 표정을 지었던 푸팟퐁 커리가 오늘 저녁 메뉴로 선정되었다.

음식을 배달시킨 뒤 정수기 앞에 선 다봄이 컵에 물을 채우며 화제를 바꿨다.

“결혼식 얘기 들었어?”

“네.”

“상황이 상황이니까 어쩔 수 없지.”

다봄이 건오의 뒤통수를 보며 달래듯 말했다.

당장이라도 결혼하고 싶어 했던 건오니까 당연히 실망했을 거라 여기고 먼저 운을 뗀 거였다.

그런데 건오의 태도는 의외로 담담했다.

“어차피 당장은 너무 급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1년도 준비하는데, 우리도 반년은 넘게 준비해서 제대로 해요.”

“어? 어어. 그러자.”

맞는 말만 하는 건오의 음성은 이성적이고 단조로웠다. 그 탓에 다봄이 오히려 얼떨떨해졌다.

어정쩡한 다봄의 대답을 들은 건오가 몸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왜?”

다봄은 반사적으로 환히 웃으며 물었다. 건오가 눈썹을 으쓱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식사 올 때까지 조금만 더 볼게요.”

“응. 일해.”

다봄이 물컵을 들고 거실로 향했다.

그대로 소파에 앉아서 일하는 녀석을 흘끗거리는데, 묘하게 속이 꼬였다.

다봄은 본인이 왜 이런 불편한 기분인지 알고 있었다. 건오의 반응이 제가 생각한 반응이 아니어서였다.

무의식의 그녀가 상상한 그의 모습은 저렇게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가 아니었다.

다봄이 그의 앞에서 드러내길 꺼리는 감정.

서운하고 아쉽고 못마땅하고 불안한, 그런 부정적이지만 솔직한 감정을 건오가 보여 주길 바랐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아쉬우니, 건오도 당연히 아쉬우리라 여긴 것부터 오산이었다.

“왜요?”

눈이 마주친 건오에게 다봄은 무심코 말했다.

“잘생겨서.”

“그 눈빛이 아닌데.”

그의 의심스러운 말에 다봄이 슬쩍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속을 가라앉혔다.

“건오야.”

아니, 가라앉지 않았다.

머리로는 유치한 걸 알면서도 그녀는 당장 뭐라도 증표를 남기고 싶어졌다.

“나 내일 생일이잖아.”

생일 엄청나게 우려먹네.

속으로 자조한 그녀가 시선을 도로 식탁 쪽으로 돌렸다.

그는 다봄의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판 끝나고 만나. 우리 반지 맞추러 가자.”

반지라는 단어에 다봄은 제가 말하고도 떨렸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건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잔뜩 놀란 다봄은 컵을 떨어트릴 뻔했다.

“반지 맞추기 싫어?”

“그게 아니라.”

건오의 낯이 심각해지자, 다봄은 급히 초연한 척하며 그를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긴장하면서 그를 주시하는데, 그는 그녀를 놀라게 했던 것치고 싱겁게 대답했다.

“그럼 내일 회사로 갈게요.”

다봄과 건오 사이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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