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다봄과 지한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시선은 승훈의 촬영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는 지한이 그것까지 계산하고 다가온 것이라 확신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그녀에겐 다행이었다.
“잘 지냈어. 오빠는?”
“나도.”
“촬영 일찍 끝났던데 아직 안 갔네?”
“선배가 바꿔 준 덕에 빨리 끝냈지. 촬영본은 봤어?”
“봤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너무 잘 나와서 고마울 정도였어.”
진심으로 지한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다봄은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
지한이 습관처럼 그녀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승훈에게 원하던 표정이 지한에게선 서슴없이 나타났다.
다봄은 음료 모델이 바뀌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생각하다, 문득 그의 어깨가 걱정되었다.
“왜 얘기 안 했어?”
다봄의 시선 끝에 제 어깨가 있자, 지한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러자 다봄이 별안간 그를 타박했다.
“그런 거 숨기지 마. 촬영하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그랬어.”
그녀의 나무라는 어조에 담긴 걱정을 읽은 지한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봄이 너도 아팠다며.”
“말 돌리지 마.”
“너한테 알리고 싶지 않았어.”
“뭐?”
순간 다봄의 표정이 목소리만큼이나 심각해졌다. 그런데도 지한은 여상한 태도로 말했다.
“넌 몰라도 되는 거야.”
지한은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다봄을 앞에 둔 지금, 겉으로 드러나서 괜찮을 감정 같은 건 없었다.
“봄이 넌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멋있게 은퇴한 금메달리스트로 알면 돼.”
차마 어떤 말도 못 하는 다봄에게 지한은 평소보다 더 부드럽게 웃었다. 앞선 촬영 덕에 얼굴 근육이 풀려 있어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 오빠. 나 할 말이 있어.”
지한에 비해 다봄은 확연히 딱딱한 발음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지한을 만나 할 얘기가 있었다.
“벌써 듣고 싶지 않지만 들어야겠지?”
“……혹시 촬영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어?”
“얼마든지.”
지한이 대답하자마자 오케이 사인이 들렸다.
다봄은 그와 눈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나 감독에게 다가갔다.
모니터하던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다봄은 소리까지 지르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욱 만족스러운 결과물이란 건 확실했다.
다봄은 박수를 받으며 물속을 빠져나오는 승훈에게 타월을 건네주었다.
“생일 선물 고마워. 잘 받았어.”
“내년엔 돈으로 달라고 해.”
“생각해 볼게. 그리고 오빠.”
다봄이 승훈을 올려다보다 그들을 보고 있는 지한을 눈짓했다.
“나 차 안 가져왔어. 옷 갈아입고 차에서 좀 기다려 주라.”
“그래. 다른 오빠 만나고 와.”
고개를 끄덕인 승훈이 마지막으로 모니터를 마쳤다.
승훈과 감독의 인사가 오가자, 여기저기서 수고했다는 인사가 울리더니 사람들이 기자재들을 챙기며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승훈은 바로 옷을 갈아입으러 갔고, 다봄은 광고사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럼 나오는 대로 연락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늘봄 직원들만 남았다.
다봄은 여태 이들이 왜 아직 가지 않았나 생각하다가 제가 대표라는 걸 떠올렸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은 척 사람들을 보냈다.
“다들 얼른 들어가세요.”
“대표님은 언제 가세요?”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었지만 누구도 티 내지 않았다.
“전 오빠 다 씻으면 같이 가려고요.”
“맞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대표님.”
“네, 고생하셨습니다.”
촬영하기 위해 빌린 수영장이 마침내 고요해졌다.
마냥 낯설지는 않은 공간을 뒤늦게 둘러보던 다봄은 곧 고개를 휙휙 돌렸다.
아까까지 의자에 앉아 있던 지한이 자리에 없었다. 금세 어딜 간 모양이었다.
혼자 남은 다봄은 물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괜히 그러고 싶었다.
다봄은 물에 손을 집어넣고 움직여 보았다.
매일 닿던 물로 새삼 장난을 치고 있길 얼마나 했을까. 그녀 뒤로 지한이 다가왔다.
“들어가게?”
“설마.”
그가 바로 나타날 줄 알았던 다봄은 놀라지 않고 일어섰다.
“대놓고 둘이 남아 있으면 네가 좀 그럴 것 같아서 잠시 피해 있었어.”
그는 그녀가 묻지도 않은 제 행방을 알려 주었다.
다봄은 마땅한 대꾸가 떠오르지 않아 괜스레 젖은 손을 털었다.
그 후에도 그녀가 망설이길 반복하니, 오히려 지한이 어르듯 말했다.
“괜찮아.”
그는 다봄의 눈을 보며, 정말 괜찮은 것처럼 어깨까지 으쓱였다.
“각오했어.”
“오빠.”
“응, 봄아.”
다정한 부름.
다봄은 자신을 다정하게 부르는 첫사랑을 보며 전했다.
“나 건오랑 결혼해.”
실상 지한은 괜찮지 않았다. 그의 각오는 말뿐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공허해졌다. 다봄은 지한의 텅 빈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애초에 그의 괜찮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오빠 기억에 내가 너무 아픈 사람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할 때, 나와의 기억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해.
다봄은 진심으로 첫사랑의 행복을 바랐다.
그런 그녀의 마음이 느껴져 지한은 더욱 아팠다.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두 다리에 힘을 주어 겨우 버티고 섰다.
“너는 날 어떻게 기억할 거야?”
지한은 흔들리는 음성으로 애써 덤덤하게 물었다. 이런 대화도 마지막이 될 테니까.
그리고 다봄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네도 못 타게 했던 남자.”
그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가벼운 다봄의 목소리가 지한의 속을 파고들었다.
“기억 안 나? 오빠는 나 그네도 못 타게 했어. 떨어질 것 같다며, 위험하다고.”
“기억나. 팔불출이었지.”
“고마웠어. 아껴 줘서.”
얼이 빠진 지한은 머리를 털었다.
그들은 공백의 시간만큼 많은 게 달라졌다.
그녀는 더 이상 첫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이십 대가 아니었고, 지한도 그네를 못 타게 했던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 연다봄이 사랑하는 사람은 서지한이 아니다.
“봄아.”
지한이 다봄의 앞에 섰다.
두 사람 모두 옆으로 한 발자국만 뻗으면 바로 물속이었다.
지한은 그녀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넌 나에게 항상 그 자리였어.”
그를 따라 다봄도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물이 넘쳐와 발을 적실 듯했다.
“이 자리?”
“레인 끝. 우리가 헤어졌을 때도 내 결승선에는 언제나 네가 있었거든.”
그래서 수영장에 돌아온 지한은 다봄이 서 있는 자리를 보고 가슴이 꽉 조여드는 듯했다.
매 경기마다 지한이 상상했던 모습으로, 다봄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널 그렇게 기억할게.”
제가 디딘 곳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다봄은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고마워.”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고마웠어, 다봄아.”
고맙다는 그의 말이 사랑한다는 말로 들리고, 고마웠다는 말이 사랑했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감정이 흘러나와 북받친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또 봐, 오빠.”
다봄은 끝끝내 그를 바라보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수영장을 벗어나 지상으로 나온 그녀는 누군가 쫓아오는 것처럼 다급하게 승훈의 차를 찾았다.
“형 갔어요.”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던 다봄의 고개가 우뚝 멈췄다.
다봄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면서도 돌아보지 못했다.
기다려도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건오는 기꺼이 다봄의 앞으로 직접 걸어왔다.
“내 차로 가요.”
“여긴 어떻게 알았어?”
“왜요. 내가 알면 안 돼요?”
다봄이 질문이 날카로운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건오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뒤틀렸다.
“일단 차에 타요. 또 삼자대면하고 싶지 않으면.”
역시나 건오는 그녀가 지한과 함께 있다 온 걸 알고 있었다.
다봄이 바닥과 붙어 버린 발을 겨우 떼고 건오를 뒤따랐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건오의 차에 올라탔다.
“먼저 대답하자면 난 아버지 연락받고 온 거예요.”
“아빠?”
“상견례 일정 때문에 전화하셨다가 누나가 차 없이 나왔다고 알려 주셔서 왔어요. 이젠 승훈 형이 아니라 제게 말씀하시는데 당연히 와야죠.”
“아.”
약속된 식당이 마침 늘봄 근처라 다봄은 걸어서 그곳에 갔고, 식사 후엔 택시를 타고 수영장으로 이동했다.
주혁은 그 사실을 건오에게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승훈 형과 만났고, 전해 들었죠. 둘이 얘기하고 있다고.”
“결혼한다고 했어.”
“그럴 것 같았어요.”
그는 웃으며 다봄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건오의 웃음은 여전히 어딘가가 어긋난 느낌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더 해 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는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덧붙였다.
“근데 어쩌죠. 난 연다봄, 서지한. 두 사람 이름이 한 문장에 들어간 말조차 싫어서.”
‘연다봄 지금 서지한이랑 남아서 얘기 중이야. 기다렸다 데리고 가. 그런 분위기 아니니까 오해는 말고.’
승훈이 그답지 않게 오해하지 말라는 말까지 해 줬지만 건오는 모든 게 불쾌했다.
결혼한다고 말하고 온 다봄에게, 서지한과 당신 이름이 연결되는 것조차 지긋지긋하다고 하는 건 너무나 비이성적인 짓이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상태를 숨기고 이쯤 해야 했다.
건오는 그걸 알고 뒤집힐 듯한 속을 눌렀다.
“화내도 돼.”
그런데 다봄이 겨우 조이고 있던 그의 끈을 놓아 줬다.
건오는 아슬아슬한 이성의 끈을 스스로 붙잡았다.
“아니. 누난 잘못한 게 없어.”
“나도 질투해 봐서 알아.”
다봄이 괴롭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건오는 다봄이 앉은 조수석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정말 그래도 돼?”
“으응.”
“내 질투가 진절머리 나서 못 견딜 정도인데?”
“난 아냐, 건오야.”
다봄이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머금은 건오는 곧바로 혀를 움직였다.
처음부터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침범한 혀가 그녀의 입 안을 헤집었다.
다봄의 머리를 감싼 그의 양손이 그녀의 고개를 젖히자 혀가 더 깊숙이 들어왔다.
갈급한 키스였다. 입술이 입술에 뭉개지며 타액이 번지고 콧등이 부딪혔다.
립스틱 자국을 마구잡이로 남기며 다봄의 턱으로 내려간 그의 입술이 목선으로 향했다.
“흣.”
그의 혀가 그녀가 약한 곳을 건드렸다. 번들거리는 다봄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렀다.
그 소리에 건오가 다봄을 더욱 끌어당겼다. 차 안이 아니었다면 진작 그녀는 그의 아래에 깔렸을 것이다.
“잠깐…….”
그때 몽롱한 다봄의 시야에 지한이 잡혔다.
주차장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는 인영이 점점 크게 들어찼다.
잠깐, 잠깐만.
“하.”
다봄의 입술 사이로 숨길 수 없는 신음이 한 번 더 터졌다.
목선을 따라갔던 그는 어느새 블라우스에 손을 올리고 연약한 귀를 핥았다.
지한은 계속 가까워졌다.
다봄이 건오의 어깨에 놓여 있던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명확한 거부의 신호에 건오가 열띤 시선을 들었다. 한데 다봄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자연스레 건오의 눈길이 그녀의 시선 끝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