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제법 쌀쌀한 늦봄의 밤이었다.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대문 앞에 선 다봄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곧 대문이 한 번 더 열리고 가로등 아래 그림자가 두 개로 늘어났다.
“안 취했죠?”
“그럼. 안 취했어.”
다봄은 제 옆에 선 건오에게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는 취하기 직전 알딸딸한 상태에서 술잔을 멈춘 그녀를 칭찬하듯 보고는 먼저 발을 뗐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고요히 잠든 동네에 잔잔히 울렸다.
저벅저벅, 그 소리가 좋아 다봄은 문득 아스팔트로 시선을 내렸다.
건오의 긴 다리가 그녀의 보폭에 맞추고 있었다.
“이제 손잡을까?”
건오가 맞춰 주며 걷는 것에 기분이 들뜬 다봄이 의사를 물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나 아직 대답 안 했는데.”
“이상하다. 난 대답을 들었는데.”
다봄이 그와 연결된 손을 흔들며 웃었다.
건오는 그녀의 미소를 멀거니 보다가 뒤늦게 밤공기를 삼켰다.
꿈이 아니었다.
자라 온 동네에서 그녀와 손을 잡고 있다는 현실에, 그는 새삼 벅차올라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좀 앉았다 가자.”
다봄은 마냥 해맑게 그를 이끌어 공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괜히 다리를 쭉 펴 보기도 하고, 기지개를 켜기도 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건오는 다봄의 옆에 앉아 그녀를 구경했다.
그러다 다봄의 입술이 자꾸 달싹거리는 걸 발견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 빤히 보여 건오는 잠자코 기다렸다.
딴짓을 하던 다봄은 머지않아 웅얼거리며 물었다.
“너한테 고백했던 직원하고는 잘 지내?”
건오는 웃지 않기 위해 인상을 써야 했다.
민망한 다봄은 애꿎은 미끄럼틀만 보느라 그의 표정을 알지 못했다.
“어색하지는 않아?”
“누난 서지한이랑 어색해요?”
다봄의 고개가 뻣뻣하게 그를 향해 돌아갔다.
지한과 어색하다고 할 수도 없고, 어색하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다봄은 바로 양 손바닥을 보였다.
“알았어. 안 물을게.”
“왜요. 계속 물어. 난 안 어색하던데.”
“안 어색해?”
다봄의 낯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건오는 살짝 웃었다.
이런 반응이라면 서지한을 입에 올린 대가로 충분했다.
“네. 퇴사했거든요.”
“뭐? 너 때문에?”
잠깐 사이 다봄의 낯빛에 다양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뇨. 퇴사 인사하면서 고백했던 거예요.”
건오는 대답하며 그녀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눈썹, 눈동자, 입술, 목소리까지.
그는 다봄이 안심하는 모습까지 보고는 질문했다.
“그게 신경 쓰였어요?”
“아. 응. 그런가 봐.”
다봄의 고개가 도로 미끄럼틀로 움직이려 했지만, 건오는 그렇게 두지 않았다.
“그럼 이제 내 마음 조금은 알겠네.”
다봄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게, 지한 오빠는.”
“나는 그 호칭도 싫어요.”
“호칭이랄 게 없는데…… 오빠 말하는 거야?”
그녀는 그의 싸늘한 침묵에서 대답을 들었다. 다봄이 눈동자를 굴렸다.
“지나간 사람이야.”
지한을 표현하는 다봄의 목소리에서는 홀가분함과 가벼움이 잔잔하게 묻어났다.
“한참 전에 지나간 사람.”
다봄은 건오의 뺨에 손을 올렸다.
서늘한 눈빛을 한 그의 외모는 조각을 빚은 듯 잘생기긴 했으나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를 감출 수 없었다.
그런 겉모습과 어울리게, 건오는 자신이 선함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봄의 따뜻한 눈빛이 닿을 때면 잠시 자신이 착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일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건오야.”
건오는 제게 사랑을 속삭이는 존재가 끝도 없이 사랑스러웠다.
주체하지 못하는 마음을 겨우 숨긴 그가 다봄에게 상체를 숙였다. 건오에게 먼저 다가가려던 그녀는 기꺼이 고개를 비틀었다.
날아갔던 취기가 다시 그들을 찾아왔다.
“사랑해.”
그와 눈을 맞추고 사랑을 말한 다봄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심장이 떨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건오는 이미 하염없는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 * *
다봄은 가장 아끼는 하얀색 정장을 입고 단상 앞에 섰다.
하나로 묶어 내린 단정한 머리를 한 그녀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과분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무거운 책임감을…….”
그녀 아래에는 늘봄 내 10명의 중역과 세 대의 카메라가 자리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과하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조촐하지도 않게.
다봄은 격식에 맞춰 준비한 취임사를 실수 없이 읊어 나갔다.
이제 마지막 단락이었다.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다봄의 여유로운 미소는 사람들의 눈에 자신감으로 비쳤다.
“늘봄이 더욱 비상할 수 있게 힘껏 날갯짓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빛났다.
다봄의 취임식이 짧게 끝난 시각, 주혁은 취임사를 외울 필요도 없었다.
연광그룹을 향한 시선이 곱지 않은 만큼 대표 교체는 조용히 진행했기 때문이다.
오전 10시, 연광그룹 홈페이지에 일석의 사과와 함께 퇴임사가 올라오고 잠시 뒤 주혁의 취임사가 게재되었다.
그 후 태철과 지웅이 구치소에 들어갔다.
저번 주부터 TV 시사 프로그램에선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연광그룹의 가정사를 대놓고 떠들었다.
이제 주혁은 그런 프로들을 반겼다. 그로써 사람들이 연광그룹과 주혁을 분리해 바라본다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빠, 어디예요?”
-다 왔어.
같은 날 대표가 된 부녀는 첫 일정 또한 같았다.
연광그룹의 존재감 덕에 계획대로 무난히 대표 자리에 오른 다봄은 붉은색 립스틱을 옅게 지우고 식당에 들어섰다.
“연주혁으로 예약했습니다.”
“안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다봄이 떨리는 마음으로 직원을 따라갔다.
그녀와 주혁의, 대표로서의 첫 일정.
“안녕하세요, 사장님.”
제양그룹 윤호섭 사장과의 만남이었다.
“축하합니다, 연 대표님.”
“편하게 불러 주세요.”
“그럼 연 대표라고 해도 될까요?”
“더 편하게 하셔도 되는데.”
다봄은 물밀 듯 들어오는 많은 미팅 약속을 미루고 이곳에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만나기로 했던 연광그룹과 제양그룹의 만남에 그녀가 찾아온 상황이었다.
“병문안도 와 주셨는데 제가 제대로 감사 인사를 못 드려서요.”
“괜찮아요. 그리고 그건 사업적으로 간 것도 아니니까.”
호섭이 다봄과 건오와의 사이를 에둘러 언급했다.
때마침 주혁이 안내를 받아 룸 안으로 들어섰다.
“제가 조금 늦었네요.”
“오늘 정신없으셨죠?”
“뭘 이렇게 요란들인지. 제대로 했으면 아주 혼이 나갔겠어요.”
중년의 남자 둘은 힘 있게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다봄은 두 사람의 약속에 낀 것이기 때문에 가만히 밥만 먹을 계획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그녀는 정말 호섭에게 병문안을 와 준 것에 대해 인사를 하고, 또 눈이나 한 번 더 마주치며 잘 보이기 위해 왔다.
“결혼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요?”
그런데 기실 두 남자도 사업 얘기를 하러 만난 게 아니었다.
건오는 선하가 상견례를 잡으라 했던 그다음 날, 바로 호섭에게 연락했다.
자식이 제일 중요한 아버지들은 일단 먼저 따로 만나기로 했고, 오늘 그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사실 당장 경사를 올리기엔 저희 입장이 여러모로 좋지 않아서요.”
주혁이 아쉬워하며 말했다.
친척들이 뇌물, 횡령, 마약으로 수사를 받는데 결혼식을 하는 것도 곱게 보이지 않을 터였다.
타이밍이 애매한 건 호섭 쪽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건오 호적을 정리해야 해서요. 지금 유전자 검사한 걸 가지고 법원에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문제는.”
다봄은 아예 수저를 내려놓고 물컵을 만지작거리며 호섭을 바라봤다.
호섭도 자신을 보는 다봄을 알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다봄은 미안함이 역력한 그의 미소에 일단 따라 웃었다.
“건오와 같은 항렬인 애들이, 아시죠? 고만고만한 지분으로 경쟁 중입니다. 그런데 제 아들이 늘봄과 연광그룹을 처가로 두면 경계가 무척 심할 겁니다. 건오는 이런 싸움에 낄 생각이 없어도 말이죠.”
“그럼 시간이 필요하단 말씀이신가요?”
당장이라도 둘을 결혼시키고 싶은 아버지들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오늘부로 당장 결혼식까지 준비하기엔 벅찬 스케줄을 안게 된 다봄은 아쉬우면서도 아주 살짝 다행이라 생각하긴 했다.
“어쩌니? 괜찮겠어?”
주혁은 마치 정해져 있던 결혼 날짜라도 있던 것처럼 다봄에게 물었다.
다봄은 가만히 생각하다 주혁이 아니라 호섭을 보았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말씀하신 승계 싸움에 건오가 끼게 되면 유리할까요?”
그녀는 짧은 대답 후 호섭의 말 중 가장 궁금한 점을 짚었다.
그런데 그 질문이 참 파격적이라 호섭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때 주혁이 테이블 아래서 딸을 툭 건드렸다.
덕분에 순식간에 바뀐 공기 흐름을 읽은 다봄은 빠르게 사과를 건넸다.
“실례되는 말이었으면 죄송합니다.”
“얘가 건오에게 뭘 바라는 건 아닙니다.”
“아, 네! 전 건오에게 바라는 거 없습니다. 건오는 밥만 잘 먹으면 돼요!”
다봄이 마구 손사래를 쳤다.
주혁이 호섭에게 덧붙인 설명을 듣고 난 후에야 그녀는 제 말이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깨달았다.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며 아무 말이나 하는 다봄을 보며 호섭도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하하하. 압니다. 오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걱정만 했던 부분을 이렇게 다르게 생각할 줄은 몰라서 놀랐던 겁니다.”
“네. 저는 그냥 건오가 조건도 좋고, 머리도 좋은데 경계만 당하느니…… 아뇨, 저는 호적 정리되면 천천히 식 올리겠습니다.”
주혁은 다봄을 한 번 더 건드리고는 낯 뜨거워진 얼굴로 웃었다.
호섭도 주혁을 보며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자꾸 어딘가로 움직였다.
다봄은 머쓱하게 수저를 들었다.
괜히 와서 밉보이고 가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호섭이 그녀 앞으로 고기를 밀어 주었다.
“많이 먹어요.”
“감사합니다. 아버님.”
다봄은 주혁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제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표정으로 인사했다.
* * *
“점심은?”
다봄이 수영장 근처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승훈 곁에 앉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살벌한 그의 등 근육을 보며 다봄은 커피를 마셨다.
“촬영본 봤어. 잘 나왔던데.”
“…….”
“한 번만 더 찍으면 끝난다며.”
“…….”
“오빠, 나 내일 생일이잖아. 생일 선물로 부탁 좀 들어줘.”
승훈이 팔굽혀펴기를 멈추고 신경질적으로 일어섰다.
그는 손을 털며 귀찮음 가득한 눈으로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돈으로 말해.”
“귀신같기는.”
“뭔데?”
“마지막에 환히 웃자. 제발.”
다봄이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승훈은 어리둥절했다.
“나 웃었어. 그리고 잘 나왔다며.”
“뭔가 부족해. 더, 더 활짝 웃으면 돼. 내가 알아서 잘 나온 거 고를 테니까 오빠는 시원하게 이를 보이며 웃는 것만 남겨 줘.”
“아, 이.”
“눈꼬리 주름 잡히게 접고, 입꼬리 올리고, 이 보이고.”
구체적으로 주문하자 승훈은 마지못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수가 저 멀리서 다봄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다봄도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조금 전 먹은 점심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때마침 스텝의 외침이 들렸다.
“자, 다시 들어갈게요!”
“오빠, 내 생일 선물이야. 알겠지? 파이팅!”
다봄은 마지막까지 당부하고서야 마음 편히 의자에 앉았다.
다들 마지막 촬영을 위해 한곳으로 모이는데 돌연 그녀 옆자리가 채워졌다.
다봄이 고개를 돌렸다.
“잘 지냈어?”
지한이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안부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