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 (61/72)

61.

눈을 홉뜬 다봄과 다르게 건오는 조용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다봄은 그런 건오의 표정을 살피다 돌연 씩씩하게 말했다.

“내가 말씀드리고 나올게.”

다봄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걸음을 뗐다.

가만히 다봄을 주시하던 건오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온 그는 제가 앉아 있던 소파를 향해 고갯짓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니야. 내가 말하는 게 나아.”

“내가 들어가게 해 줘요.”

그는 부탁하는 어조로 말했지만, 부탁이 아니었다.

건오는 주춤거리는 다봄에게서 고개를 돌려 승훈과 눈을 맞췄다. 그의 의중을 읽은 승훈이 다봄에게 일렀다.

“건오도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본데, 너는 여기 있어.”

하지만 다봄이 수긍하기엔 선하와 주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여나 그들이 건오에게 상처 주는 말이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안에 계신 분은 할아버지도 큰아버지도 아니야. 우리 부모님이야, 연다봄.”

머뭇거리는 동생에게 승훈이 한마디 더 보탰고, 건오는 다봄의 손을 끌어 직접 그녀를 뒤로 물렸다.

“앉아 있어요.”

평소와 다름없이 덤덤하게 말한 그는 바로 두 사람이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다봄이 더 말릴 새도 없었다.

“저예요. 들어가겠습니다.”

안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건오는 허락의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문고리를 돌렸다. 열린 문틈으로 선하와 다봄의 눈이 마주쳤다.

이내 건오가 문을 닫았지만, 주혁은 정원을 비추는 통창 앞에 서서 등을 보이고만 있었다.

“이리 와.”

통창 곁에 놓인 작은 테이블 의자에 앉은 선하가 건오를 제 앞으로 불렀다.

곧 그들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선하는 언제 건오를 무시했냐는 듯 그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안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선하는 그 눈으로 조금은 서글프게 운을 뗐다.

“건오야, 넌 내 새끼나 다름없어.”

그녀의 나긋한 목소리가 건오를 감쌌다. 덤덤했던 그의 표정이 흔들렸다.

“엄마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딸에게 줄 케이크를 사 들고 온 부부는 잠시 주차장에 들렀다. 지난밤 주혁이 차에 지갑을 두고 내린 탓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 지갑을 찾기 위해 그들은 차 내부를 살폈고, 그러다 건오와 다봄의 애정 행각을 전부 보았다.

“대체 어쩌다가.”

선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장면을 떠올리는 그녀의 얼굴엔 당혹감이 역력했다.

건오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어렵사리 올렸다. 두 사람의 눈이 다시 마주했다.

“좋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묵직한 고백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등만 보이고 있던 주혁이 서서히 몸을 돌렸다.

“제가 제 의지로 멈출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건오의 시선이 숨을 들이켜는 선하를 지나, 그녀 뒤에 선 주혁을 응시했다.

주혁의 눈썹이 잔뜩 내려앉았다. 세월에 주름진 그의 이마를 보며 건오는 고저 없는 음성으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전 결핍이 많은 아이였고, 누나는 그 결핍을 감싸 준 존재였습니다.”

건오는 애틋하다 못해 애절한 자신의 마음을 담백한 어조로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과했다.

선하와 주혁은 동시에 억장이 무너졌다.

그 얼굴을 보며, 무표정을 유지했던 건오의 표정도 무너지려는 찰나였다.

어느 순간 매서운 눈빛을 한 주혁이 입을 열었다.

“너희 하루빨리 결혼해.”

자식들 앞에서 초조한 기색을 내보인 적 없는 그는 처음으로 다급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그 옆에서 선하도 서둘러 동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어. 연다봄, 들어와 봐!”

건오 눈에 비친 그들은 꼭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

선하의 부름을 들은 다봄이 긴장으로 어깨를 바짝 올린 채 문을 열었다.

다봄은 씩씩한 모습을 꾸며 내 부모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 그녀의 기백이 무색하게도 주혁은 심각한 얼굴로 엉뚱한 질문을 했다.

“너 건오, 집안 보고 좋아하는 거 아니지?”

다봄이 대번 황당해하며 눈을 깜빡였지만, 그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건오가 부모를 찾았는데 알고 보니 재벌이다, 사업에 도움이 되겠다, 뭐 이래서 좋아하는 거 아닌지 묻는 거야.”

“아빠, 지금 딸을 어떻게 보시는 거예요?”

따지는 다봄의 목소리가 확 올라갔다. 주혁은 딸의 격한 반응에 도리어 안심했다.

“그런 거 아니면 됐어. 둘이 얼른 결혼해.”

다봄은 단숨에 다른 의미로 황당해졌다. 그녀가 건오를 본들, 그도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다봄이 얼떨떨해 어떤 대답도 못 하고 있으니 기다리다 못한 선하가 엄포를 놓았다.

“싸워서 결혼이 엎어지는 일도 없어야 하고, 당연히 이혼은 절대 안 돼.”

“너희 헤어지면 다봄이, 너는 회사 상관없이 빈털터리로 쫓겨날 줄 알아.”

이에 질세라 주혁의 협박도 이어졌다.

그제야 그들은 주혁과 선하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으름장을 놓는지 알아차렸다.

부모님의 이상한 기세에, 무슨 말이 나오든 맞받아칠 준비를 하고 있던 딸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지금 선하와 주혁은 처음 건오에 대한 마음을 깨닫고 번민하던 다봄의 심정과 비슷했다.

만약의 경우라도 그들은 건오를 잃고 싶지 않은 거였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다봄은 어차피 친딸이지만, 건오는 아니었다.

다봄은 그 심경을 알 것 같아 새삼 목이 메었고, 건오는 그제야 편안한 낯이 되었다.

“두 분 걱정 안 하시게 하겠습니다.”

건오는 어른들이 으레 좋아할 만한 진중한 모습으로 믿음직하게 말했다.

다봄도 건오를 따라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켜 주려 할 때였다.

“근데 헤어지면 연다봄 진짜 빈털터리 되는 거야?”

다봄이 미처 닫지 못한 문틈으로 하람이 제 딴에는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얼마 전까지 이혼 소송을 맡아 진행했던 그는 나름대로 진지했다.

건오는 무심코 주먹을 꽉 쥐었다.

“쟤는 신경 쓰지 말고 사돈 될 분들과 약속 잡아 봐.”

그 주먹을 발견한 선하가 얼른 말을 돌렸다.

그 덕에 건오는 겨우 표정을 관리할 수 있었다.

* * *

저녁 만찬이 끝나자 다봄이 가장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왔다.

그녀가 뭔가를 간지럽히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다가간 곳엔 지금껏 아끼고 아껴 왔던 와인 두 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생일을 자축하는 의미로 한 잔씩 나눠 드릴게요.”

다봄이 들떠 말하자 진서가 까르르 웃으며 잔을 세팅했다.

주혁과 선하가 와인에 곁들일 안주를 준비했고, 승훈이 와인 코르크를 따 주었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인 일곱 잔의 잔에 다봄이 와인을 채웠다.

“난 정말 이 시간이 좋아.”

“언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언제나 그렇듯 식사를 마치고 이어진 술자리는 오늘도 화기애애했다.

술을 잘 못 마시는 하람도 한 잔을 나누어 비우며 자리를 지켰다.

“아껴둔 만큼 맛있다.”

여기서만큼은 다봄도 주당 역할이었다.

간간이 건오가 제지를 할 만큼 다봄은 경계 없이 마셨다. 집은 그녀가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내 것 중에서도 하나 꺼내자.”

주혁도 다봄과 비슷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름이 깊어질 만큼 인상을 쓰고 있던 주혁은 평소보다 더 밝은 표정으로 연신 웃었다.

“두 병 마시면 안 돼요? 사람이 몇 명인데.”

“그래. 그럼 건오가 골라 와라.”

“건오야, 제일 비싼 거 집어.”

다봄은 대놓고 일렀고, 건오는 그런 그녀를 숨기지 않고 귀엽게 보았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을 발견한 선하가 흐뭇하게 잔을 비우는, 평화를 되찾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월요일에 취임식 하면 광고 촬영은 못 오겠네.”

“아니야. 취임식이라고 할 것도 없어. 시기가 그렇다 보니 인사말로 끝날 거야.”

“봄이는 대표 돼도 하던 일 계속하는 거야?”

“응. 당장 맡을 사람도 없고, 어차피 내가 최종으로 확인해야 하는 일들이라서.”

다봄은 와인을 고르는 건오를 구경하며 승훈과 진서의 물음에 답했다.

뭘 저렇게 신중하게 고르는 건가 싶어 다봄이 슬쩍 웃음을 흘렸다.

“언제쯤 와?”

“글쎄. 입원하느라 미뤘던 회의도 있어서 그거 끝나고 갈 것 같은데. 왜?”

“그럼 음료 바꿀 수 있는지 지금 한번 생각해 봐.”

돌연 승훈이 일 얘기를 꺼냈다.

그가 이러는 적은 없었던지라 건오에게 가 있던 다봄의 고개가 승훈에게 향했다.

주혁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오빠 피스타치오 좋아하잖아.”

“내가 생각해도 이미지가 안 맞아. 뭐로 보나 아무래도 서지한 페이스가 신제품 음료에 어울리니까.”

이 상황에 굳이 언급돼서 좋을 게 없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다봄은 이미 광고 얘기를 할 때부터 어렴풋이 예상했지만, 그런데도 입술을 말아 물었다.

다른 가족들도 괜히 건오의 눈치를 살피는데 승훈만 개의치 않았다.

“광고는 나중에 얘기해.”

“당장 모레 촬영이잖아. 여기서 생각해 보고 바꾸게 되면 지한이한테도 알려 줘야지.”

“아빠는 어때요?”

다봄은 주혁에게 결정을 미뤘다.

마침 와인 셀러에서 와인을 꺼내 온 건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승훈이 네가 그 음료 좋아하는 거 아는 사람들에겐 그게 더 자연스러워.”

“그 숫자가 얼마나 된다고. 대중적으로 가세요.”

“딸, 네가 결정해. 월요일부터는 네가 대표잖냐.”

도로 권한이 돌아온 다봄은 눈을 부릅뜨며 승훈에게 왜 이러냐고 물었다.

물론 승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안 되겠어. 식상해.”

다봄이 부정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승훈이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날 서지한 수영해야 한다며. 걔 어깨 재활 끝난 지 얼마 안 됐어.”

다봄은 소리만 지르지 않았지, 너무 놀라 모든 동작을 멈췄다.

다행히 건오를 등진 상태라 그녀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겨우 진정했다. 허공에 멈춘 손도 내리고 입술도 닫았다.

그러나 다봄이 놀랐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대체 언제…… 아니, 에이전시에 컨셉 전달했을 때 아무런 말도 못 들었어.”

“그건. 아무튼 촬영 시작하면 몇십 번이나 레일 오가야 하니까 내가 하는 게 나아.”

“그래. 바꿔. 오빠가 수영해.”

다른 의견을 보태지 않고 바로 결정한 다봄은 핸드폰 메모장에 무언가를 적었다,

일요일인 내일, 팀장에게 연락해 두어야 할 일이 생겨 버렸다.

“지한 오빠한테는 내가 연락…….”

“형이 해요.”

건오가 다봄의 말을 자르며 승훈의 잔을 채워 주었다.

건오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승훈이 그 모습을 보며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지한은 다봄에게 본인 상태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 내가 할게.”

그때 선하가 건오에게 잔을 내밀었다.

“어우, 넌 오늘 같은 날 왜 일 얘길 하고 그래.”

선하는 건오를 보고 다정하게 웃으며, 말로는 승훈을 타박했다.

건오는 조용히 선하의 잔도 채워 주었다.

“비싼 거 잘 골랐네. 나도 한 잔 줘라.”

주혁의 잔마저 채우자 이제 남아 있는 빈 잔은 건오와 다봄의 것밖에 없었다.

진서는 먼저 마시던 와인이 남아 있었고, 하람은 첫 잔을 아직도 나눠 마시는 중이었다.

“누나.”

“응?”

빈 잔을 건오 앞으로 민 다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다봄을 보지 않고 말했다.

“이따가 나랑 같이 바람 좀 쐬고 와요.”

“나 별로 안 취했어.”

“내가 취했어요.”

취했다는 건오는 전혀 흐트러짐 없는 시선으로 다봄을 보았다.

그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다봄의 잔을 채운 뒤 제 잔도 마저 채웠다.

다봄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잔을 들었다.

이제 와서 승훈을 흘겨볼 수도 없는 그녀는 그저 허허 웃으며 와인을 마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