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 (60/72)

60.

하람은 오늘따라 직원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회의 시작 전에도, 회의가 끝난 후에도, 복도를 걸을 때도 유난히 저만 보는 사람들 때문에 여간 신경이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결국 그는 화장실에서도 시선이 따라붙자 마침내 폭발했다.

“왜요, 왜. 묻고 싶은 거 있으면 빨리 물어요.”

“아뇨, 그게요, 변호사님.”

하람을 화장실에서까지 곁눈질했던 직원은 손사래를 쳤지만, 그 옆에 있던 사무장은 옳다구나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기회를 잡은 사무장은 돌려 묻지 않았다.

“변호사님, 저희 연광 주식 매도할까요?”

주식하는 이들 중 열에 일곱은 연광을 매수한다는 말이 있다. 일월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이들도 그 일곱에 속했다.

아침부터 뉴스에 연광그룹 압수수색이 뜨니 괜히 그들 심장까지 벌렁거려 일이 되지 않았다.

“그것만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버티라고 하면 버틸게요.”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 예상과 다름없어 하람은 기가 막혔다.

때마침 건오가 사무소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참고인 조사가 끝난 다봄과 밖에서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래. 뭐라도 말해 줘. 다들 일해야지.”

건오가 흔치 않게 입꼬리를 올리곤 제 사무실로 들어갔다.

하람은 약이 오른 눈으로 친구의 사무실을 흘겨보다 헛기침을 했다. 그 작은 신호에 사람들 눈이 반짝거렸다.

하람은 졌다는 듯 운을 뗐다.

“지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버티고.”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주식에 관심이 없는지, 모니터만 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마저 덧붙였다.

“없는 사람들은 이른 시일 내에 사세요.”

“변호사님, 확실해요?”

사무장이 작은 목소리로 비밀스럽게 물었다.

그의 간절한 눈을 보며 하람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그가 종교라도 되는 것처럼 나머지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나요?”

“그런데요, 변호사님.”

“네.”

모니터만 보다가 하람의 말에 혹한 한 직원이었다. 그녀는 그를 보며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변호사님도 연광 주주이신 줄은 몰랐어요.”

“저요? 아뇨. 저 연광에 투자 안 했어요.”

“네?”

하람은 무슨 소리냐는 듯 대번 부정했다.

심각하게 그의 얘기를 경청하던 직원들이 다 같이 멍해졌는데도, 그는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전 제양 주주예요.”

“그럼 말씀해 주신 연광 주식은…….”

“그건 확실하다니까요. 그럼 다들 파이팅하세요.”

하람은 박수까지 두 번 치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혼돈에 빠진 사람들을 두고 건오의 사무실로 들어선 그가 친구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 재밌다는 기색이 헛것이었던 것처럼 건오는 표정이 없었다.

“연다봄은 잘하고 왔대?”

“궁금하면 네가 연락해 봐.”

건오는 하람을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래서 하람은 안심했다.

“네가 가만 있는 걸 보면 별문제 없었나 보네.”

“그렇게 봐야 하나.”

한데 건오가 애매하게 동조하자, 하람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왜. 무슨 문제 있어?”

건오는 다봄에게 지웅과 싸웠다고만 진술하고 통화 내용은 말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지웅이 어떻게 말한 건지, 다봄은 소변검사를 하고 머리카락까지 뽑아야 했다.

“미친 거 아니야?”

“피곤하게 굴까 봐 해 주고, 녹음했던 것도 그냥 들려줬대.”

“녹음?”

다봄의 욕이 떠오른 건오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녀의 거친 말까지 그에겐 마냥 귀엽게 들렸다.

지웅과 다봄 사이에 오간 욕설을 대충 전해 들은 하람은 웃고 있는 친구를 해괴하게 보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럼 거기서 연다봄한테 뭘 알고 있길래 협박한 거냐고 물어봤을 거 아냐.”

마약 말고도 그는 태철과 함께 뇌물을 주고 회삿돈을 횡령했다.

그러나 다봄은 어차피 드러날 이런 비리 대신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진실을 말했다.

“연지웅이 연태철 비서랑 만나고 있다고?”

연태철의 비서는 남편이 있는 여자였다.

하람은 아빠의 비서인 유부녀와 눈이 맞은 지웅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다봄에게 더 놀랐다.

“연다봄은 그걸 어떻게 알았대?”

“그러게.”

그것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건오도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으로 하람을 응시했다.

건오의 모니터엔 다봄이 경찰청으로 들어가는 기사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야, 너는 알아서 조심해라.”

하람은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남기고 사라졌다.

* * *

연광그룹이 사회면을 장식하길 사흘째, 마침내 연태철의 뉴스가 실렸다.

다봄은 연태철 출국금지 조치라는 헤드라인과 공항에서 잡힌 태철의 영상을 보며 모든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월요일에 늘봄 대표 단다고?”

동생과 함께 TV 화면을 보고 있던 승훈은 다봄의 일정을 재확인했다.

그녀는 힘없이 긍정했다.

“응. 그냥 조용히 하기로 했어.”

“우와, 우리 봄이 멋있다!”

“언니, 지금 날 봐. 하나도 안 멋있어.”

본가에 와 소파에 거의 눕듯이 앉은 다봄은 스스로를 가리켰다.

선하의 닦달에 오기는 왔는데, 새벽까지 일하고 잠들었던 터라 거의 반수면 상태였다.

진서는 피곤한 다봄 대신 하람에게 건오의 행방을 물었다.

“하람아, 건오는 언제 와?”

“일이 있어서 따로 오겠대요. 아까 출발했다고 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예요.”

먼저 본가에 와 낮잠까지 자고 일어난 하람은 낯이 아주 반질반질했다.

느릿하게 주방으로 가 냉수를 마신 그는 허전한 집을 둘러보며 물었다.

“형. 엄마, 아빠는 어디 가셨어?”

“너 자는 동안 연다봄 케이크 사 올 겸 동네 산책하러 나가셨어.”

“아하.”

하람이 의미 없는 감탄사를 흘리자마자 대문 안으로 검은색 세단이 들어섰다.

익숙한 엔진 소리를 들은 다봄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어제는 서로 바빠 각자의 집에서 잤던 터였다. 다봄은 그 이유만으로 건오를 마중 나가기 위해 신발을 신었다.

“알아서 들어올 텐데 왜 나가는 걸까?”

그녀의 등 뒤로 하람의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말이 들려왔지만 다봄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곧 현관문이 여닫히며 다봄의 모습이 집 안에서 사라졌다.

진서는 다봄의 귀여운 마중에 웃음을 터트렸지만, 승훈은 떨떠름하게 혀를 찼다.

같은 시각, 차고에 주차한 건오가 진서와 비슷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왜 나왔어요?”

“나 원래 너 마중 나오잖아.”

차가 잠기고 건오가 다봄 앞에 섰다. 하루 사이 달라진 것도 없는데, 건오는 다봄을 참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아무리 생각해도 누나 탓도 있어요.”

그는 다봄의 손을 잡으며 일부러 미간을 모았다.

그 장난스러운 모습도 잘생겨 그녀의 입꼬리가 속절없이 올라갔다.

“뭐가 내 탓인데?”

“이렇게 특별대우해 주니까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었지.”

“내가 언제 특별대우해 줬다고 그래?”

다봄은 엉뚱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실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건오는 꽤 진지하게 대꾸했다.

“누나 연하람 머리 털어 준 적 없잖아요.”

“내가 걔 머리를 왜 털어 줘?”

다봄이 순간적으로 진저리를 쳤다. 졸음이 가득하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건오는 그것 보라며 턱을 까딱였다.

“연하람 밥 먹인다고 수저 들고 쫓아다닌 적은 있어요?”

“걘 알아서 잘 먹었어.”

“안 먹었어도 안 쫓아다닐 거면서.”

“당연하지.”

“연하람 훈련소 들어갈 때 안 울었으면서 나 훈련소 들어갈 땐 서럽게 울어 젖히고.”

그 당시 제 모습을 떠올린 다봄은 슬슬 창피함이 몰려왔다.

그녀가 건오와 연결된 손을 흔들었다. 그만하라는 뜻을 알아들은 그는 약간의 원망을 담아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 놓고 동생이라는 말은 얼마나 잘하는지.”

건오의 입장에서 들으니 그게 또 그랬다.

다봄이 헛기침을 하며 민망해하자 건오가 습관처럼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댔다.

“미쳤어.”

“어차피 오늘 말하기로 했잖아요.”

“말이랑 뽀뽀는 다르지!”

기겁한 다봄은 건오의 팔을 툭 치고는 차고 입구를 살폈다. 다행히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나 갑자기 떨리는데.”

“괜찮아요. 내가 다 말할게.”

건오는 힘이 들어간 다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와 연결된 그녀의 손이 하염없이 꼼지락대며 움직였다.

“아니야. 그래도 내가 말해야지.”

다봄은 잔뜩 긴장했으면서도 말만큼은 다부지게 했다.

건오는 굳이 입씨름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저 떨기 시작한 다봄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반응은 즉각 왔다.

“여기선 안 된다니까.”

다봄은 소리를 낮춰 그를 나무랐다. 그 모습에서 더 이상 긴장감은 보이지 않았다.

건오는 만족스럽게 눈꼬리를 접었다.

“응원이에요. 힘내라고.”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을 앞에 둔 다봄은 참지 못하고 안겨 들었다.

목적을 이룬 건오도 그녀를 꽈악 품에 안았다.

그들은 한참이나 서로를 껴안고 있었으면서도 아쉬워하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생일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

하람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건오를 맞이했다.

다봄은 동생이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얼른 다른 화제를 바꿨다.

“엄마랑 아빠는 아직도 안 오셨어?”

“응. 조금 늦네.”

다봄이 방금 제가 들어온 현관과 창문을 번갈아 보았다.

그 후로 1시간이 더 지났다. 시간은 5시가 넘어가고 있는데 아직도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으니 다봄이 핸드폰을 들었다.

이어지던 통화 연결음이 부재중으로 넘어가자 그녀의 표정이 걱정스럽게 변했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오셨어요?”

“엄마!”

짧은 시간 다봄을 훑고 갔던 염려는 기우였다.

선하는 큰 케이크를 한 손에 들고 주혁과 함께 집으로 들어섰다.

“케이크 하나 사 오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다봄은 공연히 선하를 나무라며 케이크를 받아 들었다.

한데 코앞에서 마주한 선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다봄이 괜히 투정을 부리면 똑같이 대응하던 선하가 가만히 딸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엄마, 무슨 일 있었어요?”

다봄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반응은 선하 뒤에 있던 주혁에게서 나왔다.

마치 들으라는 듯 크게도 한숨을 쉰 그는 먼저 신발을 벗고 다봄을 지나쳤다.

굳어 있던 선하도 현관에서 들어와 주혁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다봄의 손엔 맞춤 제작한 케이크만 덜렁 들렸다.

“이 분위기 대체 뭐야?”

“연다봄, 너 뭐 잘못했어?”

하람과 승훈이 연이어 물었지만, 다봄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선하와는 다정하게 통화했고 주혁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도 모르겠어.”

다봄은 대체 제가 뭘 잘못한 건지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일한 기억밖에 없다.

아, 일해서 화가 나셨나?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다봄이 되지도 않는 여러 추측을 해 보던 중이다.

진서가 팔짱을 끼고 조용히 말했다.

“근데 어머님, 아버님께서 건오에게 인사를 안 하셨어.”

“설마. 못 보신 걸 거예요.”

하람은 바로 부정하면서도 진서와 함께 목소리를 죽였다.

선하와 주혁이 그럴 리 없지만, 정말 다봄과 건오에게 동시에 차가워졌다면 합리적 의심이 가능했다.

“아냐. 건오가 인사하려는데 두 분이 그냥 들어가셨어.”

모든 장면을 지켜본 진서가 낮은 목소리로 부연했다.

멍해진 다봄을 보며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밝히기 전에 들킨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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