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 (59/72)

59.

다봄은 재생을 멈추기 위해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지만, 건오는 그보다 더 빠르게 그녀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작은 기계에서 멸시가 담긴 다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연광에 들어가는 게 먼전지, 네 죄가 까발려지는 게 먼전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면 아무래도 후자가 더 빠를 것 같거든.

다봄이 얼굴을 붉힌 채 핸드폰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건오의 손은 그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그는 제 위를 올라탄 다봄의 허리를 껴안으며 작게 웃었다.

결국 핸드폰을 포기한 그녀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다들 멍청해서 가만히 있는 거 아니야. 때를 기다리는 거야. 그러니까 몸 사려, 연지웅.

다봄은 이 순간 어디로 사라지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왜 자꾸 웃어!”

“안 웃었어요.”

“웃으면서 안 웃었다고 하지 마.”

건오는 다봄의 핸드폰을 뒤늦게 쥐여 주고는 그녀를 더욱 꽉 안았다.

“연지웅 죄를 누나가 알고 있다고 말했네요.”

건오는 즐거운 기색을 겨우 누르고 기꺼이 대화 주제를 돌렸다.

다봄도 그에 맞춰 뾰로통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러게. 어차피 거기 가서도 몰랐다고 얘기하진 않았을 거야. 마약 아니어도 워낙 저지른 게 많아서.”

“아버지는 연락 없으세요?”

다봄은 혹시나 제가 확인하지 못한 연락이 있나 싶어 다시 핸드폰을 살폈다.

하지만 주혁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다봄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부대표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런데 주혁의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지금 시간은 9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원영 씨. 네, 전 괜찮아요.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대표님 세 번째 회의 들어가셨습니다.

“세 번째 회의요?”

-저희 지금 연광 본사입니다. 오후에 회의가 시작되었는데, 저녁 식사 후 다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봄은 아예 침대에서 일어났다.

연광에서 입장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임원들 사이에서 의견이 좁혀지지 않은 탓이었다.

“언제 회의가 끝날지 기약 없죠?”

-네. 조금 전에 다른 소식도 들어와서요. 아마 훨씬 더 길어질 것 같습니다.

“다른 소식은 뭐죠?”

다봄과 건오의 눈이 마주쳤다.

핸드폰 너머 주혁의 비서는 은밀한 말을 전하듯 목소릴 낮췄다.

-뇌물과 횡령 혐의로 연광 직원들 몇 명을 비밀 수사 중이었답니다. 내일 아침 민국일보에 단독으로 실릴 예정이고요.

“원영 씨, 지금 회의 몇 명 들어가 있죠?”

-회장님과 대표님 포함 열댓 명입니다.

열댓 명뿐이라면 연광그룹의 간부들만 모였다는 뜻인데…….

다봄의 생각이 깊어질 무렵, 인터폰이 울리며 늦은 저녁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머리를 헝클어트린 그녀가 주혁의 비서에게 부탁했다.

“대표님께 저한테 전화 왔었다고 알려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다봄은 건오가 음식을 받아 오고서도 한동안 가만히 멈춰 섰다.

사외이사에 선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주혁이 열댓 명에 포함되어 연광그룹의 비상 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그 사실이 무얼 뜻하는지 아는 다봄은 이후 상황이 그려졌다.

“저녁 먹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버지는 잘해 내실 거예요.”

다봄의 통화를 함께 들은 건오도 그녀와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그리고 다봄의 상황도 자연스럽게 예측했다.

“누나도 지금보다 더 잘할 거니까 잘 먹고 건강해야 해요.”

* * *

다음 날 오전 10시. 지웅이 조사를 받기 위해 변호사와 함께 경찰에 출석했다.

같은 시각, 연광에도 압수수색 영장이 떨어졌다.

뇌물과 횡령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된 상무와 본부장은 공공연한 태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태철은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곧 머리가 잡히겠네.

다봄이 뉴스를 보며 생각하던 참이었다.

“부대표.”

연광그룹으로 출근했다가 오후 2시가 지나서야 늘봄에 출근한 주혁은 딸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연광그룹 뉴스를 보던 다봄은 시선을 돌려 주혁을 보았다.

“이제 출근하셨어요?”

“몸은?”

“괜찮아요.”

“얘기 좀 하자.”

다봄은 군말 없이 일어나 주혁의 사무실로 따라갔다.

9층 직원들이 주혁과 다봄을 흘긋거렸다.

연광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늘봄에서도 무수한 가정들이 생성되던 참이다. 곧 그 여러 가정 중 하나가 진실이 될 터였다.

대표의 사무실 문이 닫혔다.

“딸 생일 얼마 안 남았네.”

일단 주혁은 다봄의 생일을 언급하며 말문을 열었다.

봄의 늦자락에 태어난 그녀는 다가오는 본인의 생일도 잊고 있었다.

“엄마가 이번 주말에 모이자는구나.”

“제 생일 때문이면 괜찮아요. 이 어수선한 상황에 무슨.”

“네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지만 엄마가 낳은 날이기도 하니까,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해.”

“네에.”

다봄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으려는 찰나, 그녀가 운을 띄웠다.

“어제 전화했었어요.”

지금 다봄에게 중요한 건 잊고 있던 본인 생일이 아니라 어제의 상황과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정보였다.

“얘기 못 들으셨어요?”

“들었어.”

“왜 전화 안 해 주셨어요?”

“너 푹 자라고. 아빠 때문에 일하느라 고생 많았잖아.”

순간 머쓱해진 다봄은 콧등을 찡그렸다.

“상사가 이렇게 알아 주시니 가끔 아파야겠어요.”

“아서라. 아빠 청심환 두 번 먹기는 싫다.”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 당시 전화를 받은 그는 선하만큼이나 눈앞이 아찔했다.

그때 주혁은 하던 일을 미루고 급하게 뛰쳐나갔다.

구급차에 함께 올라탄 다봄의 비서에게 일러서 연광 병원으로 가도록 지시한 것도 그였다.

평소에는 쳐다도 보지 않던 연광 병원에서 주혁은 처음으로 혈연을 활용했다.

“이러니 꼭 불효녀 같네.”

다봄이 중얼거렸다.

어째 대화가 그녀가 못 할 말을 한 것처럼 흘러가는 바람에 그녀가 애먼 머리카락만 만졌다.

주혁은 멋쩍어하는 딸을 살피다 은근하게 말했다.

“엄마가 너 만나는 사람 있다고 하니까 주말에 같이 데려오라더라.”

“네?”

다봄이 앉은 소파에서 튀어 오를 듯 놀라자 지켜보던 주혁도 덩달아 놀랐다.

요새 몇 번이나 놀랄 일이 반복된 그는 벌컥 화를 냈다.

“뭘 그렇게 요란스럽게 반응해?”

“제가 뭘 요란스럽게 반응했다고 그래요? 그나저나 지금 이 얘기 하려고 부르신 거예요?”

“말 돌리고 있어. 대답이나 해.”

“아, 몰라요!”

다봄은 당황한 만큼 주혁의 말마따나 요란하게 반응하면서도, 건오를 자신의 연인으로 초대했을 때 주말 풍경을 그려 봤다.

그녀는 곧바로 질색하며 어깨를 떨었다.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생일 선물은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다봄이 확답을 하지 않자 이번엔 주혁이 화제를 돌렸다.

다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재촉했다.

“갖고 싶은 거 없어요. 어제 회의 내용이나 얘기해 주세요. 저 그거 들으려고 따라왔어요.”

“갖고 싶은 게 없으면 아빠가 알아서 선물해 줘야겠다.”

돌아가는 상황이 급박한데, 주혁은 자꾸 선물 타령이나 했다.

일이 잘못 흘러가기라도 하나 싶어 문득 염려된 다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주혁은 그 얼굴을 보며 최대한 부드럽게 웃었다.

“너무 일찍 책임지게 해서 미안해, 딸.”

책임이란 말에 한 번, 미안하단 말에 두 번, 다봄의 심장이 차례로 내려앉았다.

딸은 멀거니 아빠를 응시했다.

“우리 늘봄, 지금부터 딸이 10년만 맡아줘.”

“아빠.”

지금부터 10년.

지금과 10년을 되새기며 다봄이 금세 바짝 마른 입술로 물었다.

“……10년 후에는요?”

모든 상황이 갑작스러웠지만, 개중 다행인 걸 꼽자면 주혁과 다봄은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고 준비도 되어 있었다.

당장 다봄을 연광의 대표로 세우기엔 많은 무리가 있다. 그러니 지금은 주혁이 연광으로 가는 게 옳았다.

“할아버지랑 얘기했던 것처럼 아빠랑 바꾸자.”

늘봄을 세워 딸에게 넘겨 줄 준비를 하고 있던 주혁은 이제 연광 그룹에서 10년 동안 딸의 기반을 마련할 예정이었다.

“곧 네 큰아빠도 혐의가 드러날 거야. 사회에 큰 논란이 되겠지. 할아버지는 모든 사태를 책임지는 명목으로 대표직을 내려놓을 거고, 그 자리에 아빠가 올라갈 거다.”

“하필 그렇게 시끄러울 때…….”

“내가 가면, 네 자리는 이제 여기야.”

주혁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엔 묵직한 책상 위, 대표 명패가 자리했다. 다봄도 그를 따라 아빠의 명패를 보았다.

어깨가 잔뜩 무거워진 다봄은 일부러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자리를 선물이라고 표현하신 거예요?”

“마음에 안 들어?”

“네. 제대로 된 다른 선물 요구할 거예요.”

주혁은 쓸데없이 비장한 딸의 말을 들으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뭐든 말해라. 다 들어 줄게.”

그는 밀려오는 안쓰러움과 걱정을 차마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웃기만 했다.

* * *

“눈 감기가 무섭다.”

“왜요?”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건오의 품에서 다봄이 속삭였다. 그들은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은 채였다.

“내일 참고인 조사 간다고 했죠?”

“응.”

“같이 갈까요?”

“괜찮아. 말 그대로 참고인 조산데 뭘.”

다봄이 그의 빗장뼈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불안해 잠도 안 오는데, 이 와중에도 녀석의 몸은 너무 잘 보였다.

그녀는 그의 넓게 벌어진 어깨에 손이 올라가는 걸 참았고, 선명한 목울대를 만지고 싶은 것도 참았다.

그 부위는 왠지 자신의 욕망이 너무 잘 드러나는 부위 같아 대신 눈앞의 쇄골이나 단단한 허리로 손을 올렸다.

그러다 다봄이 문득 고개를 치켜들었다.

“엄마한테 연락받았어?”

“들었어요. 누나 생일 전 주말이라고 오라 하시던데.”

“엄마가 그날 나 만나는 남자 데려오라고 하셨대.”

다봄을 따라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던 큰 손이 멈췄다.

“어떡하지?”

말할까 말까, 고민이 담긴 다봄의 표정을 건오는 말없이 지켜봤다.

다봄이 고민을 담은 눈으로 건오를 올려다봤다.

“어떡할래?”

“제가 하자는 대로 할 거예요?”

“하자는 대로?”

“그럴 거 아니면 그냥 누나 뜻대로 해요. 난 기다릴게.”

멈췄던 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건오는 다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겨 주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근데 얼마 못 기다릴 것 같긴 하다.”

“그게 뭐야…….”

“이해해 줘요. 평생 기다렸잖아.”

그는 달콤하게 이해를 강요했다.

다봄은 공연히 눈썹을 긁적였다.

“엄마, 아빠 반응이 도저히 안 그려져서.”

그건 건오도 마찬가지였다. 혹여나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할까 봐 겁도 났다.

하지만 다봄 옆에 있는 이상 언제가 되더라도 겪을 일이었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니까.”

그 말에 동의한 다봄은 건오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인사하러 가자.”

그녀는 제가 뱉어 놓고도 영 어색해서 배시시 웃었다.

그도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갑자기 주말이 기다려지는데요.”

“나는 주말도 무서워졌어.”

“별일 없을 거예요.”

그 말을 하는 순간만큼은, 그는 두려움을 감추고 장담했다.

별일.

다봄이 입속말로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요즘, 주말은 부디 평화롭게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재우기 위한 그의 손길에 그녀는 모르는 조바심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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