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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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이른 아침부터 다봄은 퇴원을 위해 각종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 건오는 출근 준비를 마쳤다.

“언제 왔어?”

다봄이 검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땐 병실에 건오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방금 도착했어.”

모자를 눌러 쓴 승훈은 예리한 눈으로 동생을 훑어보았다.

다봄은 어제보다 확연히 회복된 모습으로 승훈에게 다가갔다.

“혼자 퇴원해도 되는데.”

“알아. 근데 건오가 불렀어.”

“진짜?”

다봄이 건오를 돌아보며 확인했다.

어제와 같은 슈트를 입은 건오는 앞머리를 내린 채 피식 웃었다.

“괜히 내 핑계 대는 거예요. 형이 어제 온다고 하셔서 제가 아침에 전화한 거잖아요.”

사실 어제 상의가 끝난 일이었다.

오전에 일정이 있는 건오는 승훈에게 미리 말해 두었고, 승훈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래 놓고 승훈은 건오를 들먹인 거였다.

다봄은 멋없는 오빠를 위해 화제를 돌려 주었다.

“아침은? 안 먹었으면 건오랑 먹고 와.”

“넌?”

“여기 곧 아침 나와. 오빠가 건오 끌고 가서 출근 전에 얼른 먹여.”

승훈보다는 건오를 위한 재촉에 가까웠다.

그걸 알아차린 승훈이 동생을 흘겨보는데도, 다봄은 실웃음을 흘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건오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눈썹을 으쓱였다.

“아침은 됐어요.”

출발하기까지 고작 30분 남짓 남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봄이나 더 보고 가려 하는데, 이번엔 승훈이 채근했다.

“그냥 가자.”

“그래. 오빠랑 맛있는 거 먹고 와.”

승훈에 이어 다봄도 한 번 더 그를 종용했다.

재차 시간을 확인한 건오가 포기의 뜻으로 브리프 케이스를 챙겼다. 그러곤 다짐을 받듯 다봄에게 말했다.

“이번엔 병원 밥 제때 먹어야 해요.”

“알겠어.”

“진짜요?”

“진짜.”

“이따 집으로 갈게요.”

“응. 집에서 봐.”

다봄이 바로바로 대답하며 손을 흔들었다.

건오가 아쉬운 마음으로 다봄을 뒤로하며 몸을 돌렸다.

그는 곧장 승훈과 눈이 마주쳤다.

“…….”

“…….”

서로 많은 대화가 함축된 눈빛이 오갔고, 먼저 발을 뗀 쪽은 건오였다.

그는 아무래도 예정보다 일찍 출발해야겠다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 * *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했다.

비밀을 쥔 사람이 힘쓰지 않아도 세상에 밝혀질 일이라면 어떻게든 밝혀지기도 한다.

“뭡니까? 당신들 어디서 나왔어?”

지웅이 없는 지웅의 집으로 갑작스레 손님들이 방문했다.

그들은 문을 열어 준 고용인이며 경호원들을 지나쳐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다.

경호 임무를 맡은 이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공간을 울렸다.

“여기가 누구 집인지 알고 이럽니까? 이봐!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경기지방경찰청 마약수사대입니다.”

강경하게 제지하던 경호원들이 급격히 행동을 멈췄다.

아무리 경호원 일을 한다지만, 마약이란 단어를 가까이서 들을 줄은 몰랐던 탓에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넓은 집은 실시간으로 샅샅이 뒤져지고 뒤집혔다.

그때 방 안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찾았습니다!”

“여기도 있습니다!”

이제 이곳은 경찰들과 함께 투입된 수사관 10명만이 바쁘게 움직였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경찰은 소란한 집 안을 둘러보다가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이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연지웅 씨와 관계가 어떻게 되죠?”

“……집안일을 맡고 있어요.”

“언제부터 근무하셨습니까?”

“5년쯤, 되었습니다.”

“참고인 조사하러 저희와 함께 가 주시죠.”

“세상에.”

“거기 경호원분도 협조해 주시죠.”

그들에겐 날벼락 같은 상황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가루가 든 봉지와 일회용 주사기들 보니 죄지은 것도 없이 겁이 덜컥 났다.

그 시각, 사무실에 있던 지웅 역시 압수수색이 진행 중이었다.

지웅은 갑자기 쳐들어온 수사관에게 머리카락을 뽑히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본능적으로 모든 게 끝났다는 느낌이 온몸을 덮쳤다.

“아버지.”

실시간으로 보도가 나가고 연광의 주가가 계속해서 하락했다.

임원진들은 당장 회의를 소집했고, 대책이 나올 때까지 언론매체 대응을 보류하라는 지시가 직원들에게 내려졌다.

“한 번만 도와주세요.”

그 와중에 일석의 사무실에 찾아온 태철이 고개를 숙였다.

불쑥 찾아온 그의 옆엔 내일 오전 10시에 경찰 출석을 하기로 한 지웅이 울먹거리고 있었다.

“아버지,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할아버지.”

일석이 비서에게 손짓하자 비서가 사무실 문을 닫고 나갔다.

쉼 없이 울리던 일석의 전화 소리는 그 이후부터 들리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면 너에게 증여한 주식은 회수할 거다.”

일석은 상석에 앉자마자 정신 줄을 놓은 듯 보이는 손자에게 일렀다.

목에서부터 울음이 찬 지웅이 자리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네. 각오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

“제가 잘못 키워 그럽니다, 아버지. 다시는 사고 안 치게 타이르겠습니다. 어차피 초범이라 징역도 안 나올 겁니다. 자리만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마음이 급한 태철이 지웅의 말을 가로챘다.

그렇지 않아도 자리가 위태롭던 지웅은 이 일로 아예 명패가 사라질 것이 자명했다.

“넌 나와 교육 방식이 참 다르구나, 태철아.”

일석의 쓸쓸한 음성에 제 새끼를 불쌍하게 보고 있던 태철이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일석은 주름진 손으로 거칠한 입가를 매만졌다.

“초범이라 징역도 안 나와? 그게 부모가 할 말이냐? 그리고 네가 누굴 타이른다 말할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게야?”

태철은 일석의 처진 눈꼬리에서 매서운 질책을 읽어 냈다.

태철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웅을 보는 시선보다 더한 책망의 눈빛이었다.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르는 게 당연한 거다.”

침묵이 내려앉으려는 찰나, 일석이 어르듯이 못 박았다.

그러자 지웅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압니다. 치를 겁니다. 어려운 거 바라는 거 아닙니다, 할아버지. 그냥 잘 부탁한다고 몇 마디만 해 주시고 연광에 자리 하나만 남겨 주세요!”

지웅은 억울하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요청을 하는 것도 웃길 정도로 분명 일석에겐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일 텐데, 일석이 제게만 매정한 듯 느껴졌다.

“할아버지…….”

지웅이 간절함을 흉내 내며 일석을 불렀다.

그리고 일석은 손자를 외면했다. 그의 시선은 다시 저와 닮은 첫째 아들에게 닿았다.

“자식이 죄를 지었다고 네가 잘못 키운 게 아니다. 그러니 난 네가 잘못해도 똑같이 생각할 거다.”

“잘못이요?”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말아 달라 사정하려던 태철의 이마에도 곧장 땀이 맺혔다.

태철은 확신했다. 일석이 제 비리를 알고 있었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네 번.

그 신호를 알아들은 일석이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손자와 질겁한 아들을 훑고 일어섰다.

떠나기 전, 아버지는 아들에게 경고했다.

“허튼짓하지 말고 기다려.”

“할아버지!”

일석은 마지막까지 지웅의 외침을 무시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회의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일석은 비서로부터 현재 여론 상황과 주가를 보고받았다.

그가 21층에 도착해 복도를 거닐어 가장 안쪽으로 향하던 중, 그의 뒤편으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왔냐.”

일석이 걸음을 멈추고 곁에 다가온 이를 응시했다.

주혁 역시 여유로운 얼굴을 하곤 아버지를 보았다.

“녀석이 이렇게 일찍 걸릴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우리가 판을 짜려고 했던 게 오만이었어.”

회의장에 들어가기 전, 그들은 남들이 보기엔 꽤 돈독해 보이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다봄이 몸은.”

“직접 물어보세요.”

“내가 연락해 봤자 뭐 좋겠냐.”

“전 아니지만, 제 딸은 아버지를 꽤 좋아합니다.”

“……어디서 딸을 팔아.”

일석은 믿지 않는다는 것처럼 혀를 차면서도 모처럼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내심 긴장하고 있던 주혁은 드러난 표정대로 여유를 되찾았다.

“다봄인 괜찮습니다.”

“몸 관리 잘하라고 해라.”

“아버지가 직접 하시라니까요.”

“그만 들어가자.”

연출은 끝났다.

그들이 계획한 것보다 훨씬 앞당겨 판이 벌어졌다.

타의에 의해 상황이 벌려진 터라 피해도 예상보다 크고 충격도 컸다.

“지금부터 연광그룹 비상 소집 회의를 시작합니다.”

* * *

“몇 시야?”

“7시요.”

퇴원 후, 승훈과 점심을 먹은 후부터 내리 잔 다봄은 문이 열리는 기척에 깼다.

“천천히 일어나요.”

“이제 괜찮아. 뭐 사 왔어?”

“초밥이요.”

메시지를 남겼는데 다봄의 답장이 없자, 건오는 알아서 저녁을 포장해 왔다.

“잘 것 같아서 전화 안 하고 사 왔어요.”

“잘했어. 고마워.”

부스스하게 침대를 빠져나온 다봄은 식탁 앞에 선 건오의 등을 안았다.

음식 포장을 풀고 있던 그는 양손을 식탁에 올린 채 가만히 섰다.

“방금 꿈에 너 나왔어.”

“생각보다 내가 누나 꿈에 자주 나오나 봐요.”

다봄은 그의 너른 등에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그런가?”

“이번에도 야한 꿈 꿨어요?”

그가 짓궂은 농담을 건네자 다봄의 눈꺼풀 위에 자리하던 졸음이 단숨에 날아갔다.

그녀는 언제 건오를 안았었냐는 듯 잽싸게 멀어졌다.

“아니야.”

다봄은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창피해했다.

건오의 씨익 웃는 모습을 보니 그녀는 더욱 부끄러워져 재차 부정했다.

“진짜 아니야.”

“아쉽네요.”

“뭐가 아쉬워? 아쉬워하지 마.”

“내가 더 잘할게요.”

으아!

건오의 이런 모습이 적응되지 않은 다봄은 당황을 숨기고 건오 옆에 다가갔다.

그러곤 수저를 놓고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얼마나 잘할 건데?”

건오는 여봐란듯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설마하니 그녀가 장단을 맞춰 줄 줄은 몰랐다.

건오의 음성이 점차 낮게 깔렸다.

“꿈속의 나보다 더.”

“꿈속의 너…….”

다봄이 무심코 그의 말을 따라 하며 그때 그 꿈을 되새겼다.

다봄만 주시하고 있던 그는 그녀의 생각이 선명히 읽히는 듯했다.

건오가 다봄의 맞은편에 앉았다.

“거기서 내가 꽤 잘했나 봐요.”

상상하느라 살짝 위로 올라가 있던 다봄의 눈동자가 정면의 그에게 닿았다.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대화가 아니라 건오의 눈빛이 그랬다.

새카만 그의 눈동자에 농도 짙은 감정이 깃들었다.

건오는 다봄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녀가 여기서 발을 빼면, 그는 몇 시간 정도는 충분히 기다려 줄 수 있었다.

“응. 네가 되게 야했던 게 기억나.”

그러나 다봄은 물러서지 않았다.

턱을 괴었던 건오가 허리를 폈다. 곤란한 듯 일그러지는 그의 미간을 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우리 꿈에서 욕실이었거든.”

헛숨을 터트린 건오가 곧장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서슴없이 다봄에게 몸을 숙였다.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는 놈을 이렇게 도발하면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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