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건오는 다봄이 원하는 대로 발을 멈추었다.
“누나가 이러고 있는데, 나는 밥맛이 있었을까?”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가 느리게 입술을 물었다.
“과로로 쓰러져 놓고 밥도 안 먹고 일하고 있으면 내 속이 안 뒤집히겠어요?”
그의 싸늘한 질책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얼떨떨한 다봄은 몸을 움찔하면서도 건오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건오는 다시금 울컥하는 속내를 누르며 다봄의 손을 직접 떼어 냈다.
“더 늦기 전에 뭐라도 사 올 테니까…….”
한데 그 행위가 다봄의 기억을 건드렸다.
마지막 만남 때, 그때도 건오가 다봄을 이렇게 놓고 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은 탓에 당시의 감정까지 생생했다.
“같이 가.”
다봄은 그를 다시 잡았다.
영문을 모르고 붙잡힌 건오가 그녀를 의아하게 응시했다. 조급한 마음에 무심코 눈에 힘이 들어갔다.
“왜 그래요?”
다봄은 앙다문 입술을 하고는 링거대를 끌고 건오와 나란히 섰다.
그녀가 먼저 발을 뗐지만, 이번엔 건오에게 다봄의 손이 잡혔다.
“나 혼자 다녀오는 게 빨라요.”
“알아. 근데 나 지금 투정 부리는 거야.”
단번에 건오의 말문이 막혔다. 다봄에게서 나올 줄은 몰랐던 단어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튀어나왔다.
다봄은 민망한 마음을 숨기고, 꾸역꾸역 말했다.
“우리 집에서 나 이렇게 떼어 놓고 나갔잖아. 그러고 나서 전화도 안 받고.”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잖아요.
건오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누르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새 손을 뻗은 건지, 다봄이 그의 재킷을 억세게도 잡고 있었다.
건오에게 어리광은커녕 불평조차 없던 다봄이 그에게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미안해, 건오야.”
건오가 자신의 재킷을 잡은 다봄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단숨에 감쌌다.
“보고 싶었어.”
다봄이 건오와 연결된 손을 올렸다.
함께 들린 그의 손등 위로 그녀의 입술이 인사하듯 내려앉았다.
숨을 들이켠 건오의 가슴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링거줄을 단 병원복 입은 여자가 우아하고 성스러워 보이니, 건오는 제가 이 사람에게 미쳐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고 말았다.
곧 부드러운 다봄의 음성이 건오의 손등 위에서 속살거렸다.
“정말 보고 싶었어, 건오야.”
“누나.”
화를 낼 수도 없게 된 건오가 그녀를 야속하게 부른 순간이었다.
다봄이 고개를 들고 불그스름한 눈으로 눈웃음을 지었다.
“사랑해. 지금 키스하고 싶어.”
건오는 질끈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이 순간 다봄의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애꿎은 이만 악물었다.
거친 숨을 내쉰 건오는 다봄과의 거리를 좁히고는 몸을 숙였다.
다봄이 그의 허리를 껴안고 속삭였다.
“몸살 옮으면 어떻게 하지?”
“괜찮아. 그리고 이미 늦었어.”
나지막한 그의 음성을 마지막으로 다봄의 턱이 들렸다.
건오의 고개가 비스듬히 꺾이고 그녀가 눈을 감은 때였다.
똑똑똑.
“연다봄 환자분.”
무시할 수 없는 부름이 문밖에서 들려왔다.
다봄은 감았던 눈꺼풀을 올리고 재빨리 건오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건오가 붙잡고 있는 탓에 고작 한 발자국이 다였다.
“네, 네.”
“들어가겠습니다.”
저녁 회진을 도는 다봄의 주치의는 하필 그녀의 병실을 가장 먼저 방문했다.
“환자분, 어디 나가려고 하셨어요?”
“아, 밥을 안 먹어서요.”
“병원 밥이 맛없으셨구나.”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을 하곤 대외적 이미지를 뒤집어썼고, 다행히 의사는 붙어 있는 환자와 보호자보다 일어서 있는 환자에게 집중했다.
그 덕에 의사는 매우 탐탁지 않은 보호자의 표정을 발견하지 못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아요.”
다봄이 억지로 건오에게서 더 멀어지며 답했다.
그럴수록 못마땅해지는 건오의 낯은 처음부터 의사 뒤에 서 있던 손님들이 전부 보고 있었다.
“빈속에 드시면 안 되는 약이에요. 내일 아침에 검사 다시 하고, 결과 본 뒤 퇴원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혹시 더 입원하고 싶으시면 얘기해 주세요.”
“아뇨. 그냥 내일 퇴원시켜 주세요.”
“시기는 결과 보고 확정해 드리겠습니다.”
건오는 그제야 의사 너머로 나란히 선 세 사람을 발견했다.
간단한 확인을 마친 의사는 별별 선물로 둘러싸인 공간을 둘러보고는 병실을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건오와 제일 친한 친구라 들었습니다.”
“하하. 백건오가 그렇게 표현할 리 없는 거 잘 압니다, 사장님.”
“정말 건오에 대해 모르는 게 없네요, 하람 씨는.”
다봄도 뒤늦게 그들을 발견했다.
병실 앞에서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끌어 가고 있는 하람과, 녀석의 넉살에 웃고 있는 건오의 부모님이 보였다.
다봄이 놀라며 건오를 보았지만 그도 전해 들은 게 없었다.
“윤 사장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부대표 입원했다고 하니까 걱정이 되어서 왔어요.”
호섭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안쓰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다봄이 어떤 이유로 입원했는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가 처한 상황은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감사해요. 이렇게 신경 써 주실 줄 몰라서 너무 경황없이 맞이한 것 같아요.”
“실은, 나는 부대표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선물만 보내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우리 건오 은인인데 가 봐야 한다고 해서 이렇게 왔어요.”
다봄과 호섭이 동시에 한 곳을 보았다.
두 사람이 인사할 동안 우연히 마주친 아들과 대화 중이던 미경이 다봄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건오와 닮아 있어서 다봄은 새삼스레 신기했다.
“민폐인 줄 알면서도 왔어요. 갑자기 찾아와 많이 놀랐죠? 미안해요.”
“아니에요. 사모님. 이렇게 와 주시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해요.”
“어머.”
미경은 다봄의 살가운 대답을 듣고는 무심코 탄성을 흘렸다.
미경의 눈으로 본 다봄은 심성만 고운 게 아니라 말까지 곱게 했다.
그녀는 낯가림 없는 하람과 다정한 다봄을 보며 건오가 어떤 분위기 속에서 자랐을지 충분히 알 듯했다.
뭐라도 쥐여 주고 싶었던 미경은 밖에 서 있던 비서에게 준비한 한우를 받아 와서 다봄에게 안겨 주었다.
“꽃처럼 아름다울 것 같아 꽃다발을 들고 오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와. 감사해요. 먹기도 전에 금방 다시 건강해질 것 같은데요.”
다봄의 능청스러운 말에 호섭과 미경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셋은 건오가 대화에 참여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았다.
하람이 정답게 보이는 세 사람을 구경하며 건오에게 속삭였다.
“너보다 연다봄이 사장님과 더 친해 보이는데.”
건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래도 혹여나 다봄이 불편해할까 면밀히 살피며 하람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 나가서 누나 밥 좀 사 와.”
“뭐?”
기가 막힌 하람이 건오를 노려보았다. 어이없어하는 친구에게 건오는 가차 없이 턱짓했다.
하람은 병실 안을 휘둘러보았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기에도, 여기서 빠져도 되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아무거나 사 온다.”
퉁명스러운 말을 남긴 하람은 결국 병실을 나섰다.
다봄은 동생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호섭과 미경을 소파로 안내해 함께 둘러앉았다.
“뭐 마실 거라도 내드려야 하는데, 잠시만요.”
“아니에요. 우리 마시고 왔어요. 그냥 앉아 있어요.”
“그래도요. 그럼 마실 거 대신 다음에 건오와 함께 넷이서 식사 자리 마련할게요.”
“그래 주면 저희야 너무 좋죠.”
미경은 다봄의 제안을 마다하지 않고 활짝 웃었다.
그 가운데에서 건오는 호섭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할 얘기는 다 한 것 같아 눈짓하니, 호섭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마침 시간을 확인한 미경이 새로운 대화의 운을 띄웠다.
“다봄 씨는, 다봄 씨라고 불러도 되죠?”
“그럼요. 건오 어머님이신데.”
다봄이 부드럽게 웃었다.
다봄도 사모님이란 호칭보다 어머님이란 호칭이 부르기 편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두 사람, 결혼은 생각하고 있어요?”
미경은 조심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돌려 묻지 않았다.
너무 예상 밖의 질문을 들은 나머지 다봄은 목덜미를 매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엔 당연히 건오가 있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모님께 대답했다.
그녀를 감싼 당혹감이 차차 사라졌다.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린 그가 미경과 호섭을 번갈아 보고 확언했다.
“당연히 해야죠, 결혼.”
* * *
한밤이 찾아왔다.
다봄은 간이침대에 누운 건오를 바라보며 호섭이 남긴 말을 곱씹었다.
‘결혼은 언제쯤 생각하고 있니? 다른 게 아니라 그 전에 네 호적을 정리해야지 싶어서.’
다봄의 상황을 아는 그들은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고, 그 연결고리에 건오가 있었다.
윤건오.
다봄은 입 모양으로만 새로운 건오의 성을 붙여 움직여 보았다.
입에 붙지 않고 영 낯설기만 한데, 또 그 느낌이 마냥 나쁘지 않았다.
“안 자요?”
“어떻게 알았어?”
“자꾸 뒤척여서.”
“미안.”
건오가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느릿하게 다가왔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재워 줄게.”
의자에 앉은 그는 정말 다봄을 재워 주기라도 할 것처럼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다봄은 어둠 속에서 그를 빤히 보다 입술을 열었다.
“윤건오.”
“좀, 이상하네.”
건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반응했다.
그는 제 이름이 제 이름처럼 느껴지지 않았지만, 호섭의 뜻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다봄 때문이었다. 본인이 제양그룹 호적에 올라가면 훗날 그녀에게 흠이 되지는 않겠다는 생각만으로 호적 정리를 하겠다 한 거였다.
“윤건오.”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그런 것 같아.”
“난 별로인데.”
싱겁게 대꾸한 건오는 계속 다봄을 토닥거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다봄의 눈이 그의 표정을 어렴풋하게 읽어 냈다.
그녀가 콧등을 찡그린 그에게 말했다.
“윤건오란 이름엔 동생으로 지냈던 시절이 담겨 있지 않아서, 그래서 좋은가 봐.”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건오의 손길이 뚝 멈췄다.
그러자 다봄이 그의 몸 쪽으로 돌아누웠다.
건오는 그녀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네가 윤건오일 땐, 나랑 사랑만 할 거 아니야.”
다봄의 말엔 그에 대한 은근한 욕심이 묻어 있었다. 그걸 느낀 건오는 탁한 한숨을 흘리며 혀로 마른 입술을 쓸었다.
다봄의 욕심과는 다른 욕심이 건오를 부추기는데, 그를 이렇게 만든 그녀는 병원복을 입고 있으니 입술만 깨물 수밖에 없었다.
“얼른 자요.”
“갑자기?”
“잘 자야 조금이라도 더 빨리 회복해서 퇴원하지.”
건오는 다시 다봄을 토닥거렸다.
재우기 위한 그의 손길에 그녀는 모르는 조바심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