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다봄의 어지러운 시야 안에 건오가 잡혔다.
주변은 새하얀데 오직 그만 보였다. 그래서 꿈인 줄 알았다.
“벌써 왔어?”
그때 그녀의 주변에서 승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물음이 감각을 깨웠는지 병원 냄새와 정체 모를 단 냄새가 섞여 코로 들어왔다.
그녀가 잠시 눈을 떴을 때 맡았던 냄새였다.
현실이었다.
“……건오야?”
다봄이 잠긴 목소리로 건오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대답하듯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 순간 새하얗기만 하던 공간에 색이 입혀지며 제대로 보였다.
건오 곁에 선 선하도, 소파에 앉아 있던 승훈도, 다봄 근처에 서 있던 제 비서 승희까지.
“아까 일어났을 때도 건오부터 찾더니. 뭐 해, 건오야? 네 누나가 너 찾는다.”
선하가 웃으며 다봄 근처에 놓여 있던 과일 바구니를 들고 승훈 옆에 앉았다. 그제야 건오가 움직였다.
다봄은 가까워지는 건오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마저도 버거워 보이는 모습에 그는 그렇지 않아도 가까운 거리를 금세 좁혔다.
무심코 그를 향해 손을 뻗던 다봄이 주변 사람들을 의식해 동작을 멈췄다.
건오의 눈동자가 다봄의 움직임을 좇다 그녀에게 고정됐다.
다봄은 뚫어질 듯한 그의 눈길이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지금 몇 시야?”
그녀가 긴 머리를 빗어 넘기며 선하에게 물었다. 그렇게 건오의 시선을 자연스레 피했다.
물론 그는 여전히 그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5시 반이네. 너희 사과 좀 먹어. 승희 씨도 드세요.”
“감사합니다.”
“건오야, 누나 뚫어지겠다.”
침대로 다가온 선하가 비서와 다봄에게 접시 하나씩 전해 주며 농담조로 덧붙였다.
지레 찔린 다봄이 건오를 보며 사과를 내밀었으나 그가 입술을 벌리지 않는 탓에 그 사과는 다봄이 먹었다.
“어디서 또 들어온 거 있어요?”
그녀는 건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이번엔 비서를 향해 눈을 돌렸다.
다봄의 입원 소식을 들은 회사들이 쾌유를 빌며 각종 먹거리와 과일 바구니를 보냈다.
늘봄의 거래처뿐만이 아니었다. 연광그룹 관계자들과 연광과 관련된 곳까지 선물을 보냈다.
덕분에 다봄은 퇴원하자마자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야 했고, 승희는 그때를 대비해 작은 것까지 기록하고 있었다.
“서랑유업, 눈솔도자기에서 소고기를 보내 왔습니다. 그리고.”
“네.”
비서가 건오를 흘끗하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송열전자 최우섭 씨가 과일 바구니와 카드를 보냈습니다.”
“그래요?”
우섭의 선물에 관심을 가진 이는 선하밖에 없었다.
“뭐라고 쓰여 있니?”
“쾌차하라고요.”
다봄은 비서가 건넸던 카드를 다시 넘겨주었다.
딸의 떨떠름한 표정을 본 선하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사과를 먹었다. 그 틈에 다봄이 승훈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 눈짓을 본 승훈이 귀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니, 밖에서 저녁 먹고 이만 돌아가시죠.”
“오늘 자고 가려고 했는데 무슨 소리야?”
“아니야. 오빠도 엄마 데려다주고 집에 가야지. 나는 혼자 자는 게 편해. 간호사 선생님도 계속 오갈 텐데 엄마 여기 있으면 제대로 못 자.”
다봄이 속사포로 선하를 만류했다.
딸이 길게도 말하며 거부하니, 선하는 어쩔 수 없이 짐을 정리했다.
“저녁도 같이 안 먹고?”
“난 병원 밥 먹어야지.”
“그럼 일할 생각 말고 푹 쉬어.”
“알겠어.”
다봄은 선하와 인사를 하며 승훈에게 눈으로 재차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승훈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하가 한발 빨랐다.
“건오야, 나가서 밥 먹자. 엄마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저는 괜찮…….”
“고기 먹어, 고기.”
잠시 선하에게 돌아갔던 건오의 눈길이 제 말을 자른 다봄에게 날아들었다.
그녀가 건오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저녁 먹고 와. 나 너 끼니 거르는 거 못 보잖아.”
그것만으로 선택권을 빼앗긴 건오가 입술을 꾹 물었다. 서늘한 인상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화가 나 보였다.
그때 다봄이 살짝 손을 움직여 건오의 손가락을 잡았다.
제게 닿은 따뜻한 체온을 느낀 그가 조용히 눈동자를 내렸다.
“승희 씨, 우린 다음에 봐요.”
선하가 다봄의 비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봄과 건오를 지켜보던 비서가 흠칫하며 일부러 선하 앞까지 다가가 인사했다.
“네, 사모님. 다음에 기회가 되면 뵙겠습니다.”
“쟤 퇴원할 때까지 일 못 하게 해 주세요. 애 아빠가 쟤나 승희 씨한테 뭐라고 하면 나 팔아먹고.”
“염려 마세요. 제가 부대표님 일 못 하게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슬슬 가자, 건오야.”
승희가 나서서 인사하는 이유를 알고 있던 승훈은 적절한 때 건오를 불렀다.
승훈의 신호를 알아들은 다봄이 그의 손가락을 놓아주었다.
한데 건오가 멀어지는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다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승희와 시계를 번갈아 본 선하가 말을 걸었다.
“다봄아, 승희 씨도 얼른 퇴근해야겠다. 곧 차 밀리겠네.”
“네, 네. 그래야죠.”
상사의 대답에서 당황을 읽어 낸 승희가 요령껏 선하의 시야를 가렸다.
건오는 오랜만에 잡은 다봄의 손을 꽉 잡고는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의 엄지가 그녀의 손등을 녹진하게 매만졌다.
다봄이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건오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는 다봄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딸, 엄마 먼저 갈 테니까 자기 전에 연락해.”
“……네.”
“백건오.”
승훈이 건오를 두 번째 불렀다.
그제야 그는 손을 풀고 다봄에게 말했다.
“전 다시 올게요. 쉬고 있어요.”
“건오 네가 얘 아빠보다 낫다.”
선하의 원망 섞인 비교를 마지막으로 그들은 그녀의 병실을 떠났다.
선하를 향해 손을 흔들던 다봄은 문이 닫히자마자 힘없이 팔을 내렸다.
선하에게 들킬까 심장을 졸여서 그런 건지, 건오의 손길이 이상하게 탐욕적으로 느껴져서 그런 건지…… 그녀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심장 박동을 경험했다.
“부대표님.”
“아, 고마워요.”
다봄도 승희가 직접 선하 앞으로 나서서 인사한 이유를 눈치챈 뒤였다.
승희가 다봄을 보며 싱긋 웃었다.
“두 분 사이를 모를 수가 없던데요.”
“그래요?”
“네. 부대표님을 향한 시선이 워낙 열렬해서.”
다봄이 뜨거워지는 얼굴을 손으로 매만졌다.
승희는 가볍게 웃다 고개를 갸웃했다.
“사모님께서 전혀 눈치를 못 채시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아빠도 몰라요.”
“와. 그 정도면 두 분, 부모님들 눈엔 아예 남매로 못 박혔나 보네요.”
그 말에 올라가 있던 다봄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갔다.
바로 시들시들해진 다봄을 보며 승희는 잠시 당황했다. 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모양새는 상사가 아니라 여동생이나 대학 후배처럼 보였다.
“두 분, 잘 어울려요.”
승희가 위로를 담아 말했다. 짧은 응원이기도 했다.
그 뜻을 알아들은 다봄은 애써 어깨를 으쓱였다.
“퇴근하셔야죠.”
“그래서 말인데, 부대표님. 저 노트북 그냥 제가 가져가면 안 될까요?”
다봄이 잠깐 깼을 때 그녀의 부탁으로 가져온 노트북이 병실 침대 뒤에 있었다.
“사모님께 대답하는데 얼마나 찔렸는지 아세요?”
“진짜 일 안 해요. 그래도 노트북은 있어야죠.”
“안 믿어요.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요.”
“왜 안 맞아요? 되게 잘 맞는데.”
“그럼 적어도 오늘은 정말 쉬셔야 해요.”
이 싱거운 말씨름의 끝은 다봄의 격한 끄덕거림으로 마무리되었다.
승희가 퇴근하고 병실에 다봄 홀로 남았다.
그녀는 병실을 가득 둘러싼 선물들을 보다가 기다렸단 듯 노트북을 꺼냈다.
특별한 걸 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메일을 확인하고 밀린 일정을 확인하는 것 정도는 해야 직성이 풀릴 뿐이었다.
“이런.”
내일 있을 미팅이 다음 주로 밀리는 바람에 광고 촬영과 겹쳤다.
승희가 어떻게든 조정한 일정이라는 걸 알기에 다봄은 군말 없이 기억해 두었다.
“다음 회의는 해수 씨한테 맡겨야겠네.”
다봄이 중얼거리며 바뀐 스케줄을 마저 확인하고 있을 때 병원 밥이 도착했고, 다봄은 식판을 옆으로 밀어 두었다.
“뭐 이렇게들 보냈어?”
이왕 노트북을 켠 김에 조금 전 승희가 정리해 둔 선물 목록도 살폈다.
옆에선 황태국과 밥이 식고 있는데, 다봄의 눈과 손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연다봄 환자분.”
“네에.”
노트북 화면에 집중한 다봄이 대답을 길게 늘어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다봄을 부른 쪽은 간호사인데, 그녀의 시선은 간호사 뒤에 박혔다.
어느새 밥을 먹고 올라온 건오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식사 끝나셨어요?”
“아, 네.”
다봄이 침대에서 일어서 한 입도 건드리지 않은 식판을 들었다.
왼쪽 팔이 링거와 연결된 탓에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말없이 서 있던 건오가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30분 후 이 약 드시고, 곧 저녁 회진 있을 거예요.”
건오가 다봄의 식판을 받고, 다봄은 간호사에게서 약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다봄이 식판을 놓으러 나가는 건오의 뒷모습을 보며 간호사에게 인사했다.
수액까지 살핀 간호사가 나가고 곧 건오가 다시 들어왔다.
병실에 둘만 남았다.
다봄 옆에 선 그는 눈썹을 매만졌다.
속에서 울컥 치미는 모든 것들을 억누르며 건오는 기꺼이 다봄을 보았다.
“뭐 먹고 왔어?”
시선이 마주치길 기다린 그녀가 준비한 질문을 던졌다.
건오를 보며 방긋 웃는 다봄은 병원복을 입고 있었다.
식판을 놓으라고 달린 침대 테이블 위엔 노트북이 올려져 있고, 그 노트북을 누른 손은 링거와 연결되어 있다.
다봄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건오를 대했지만, 그의 눈에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누나는 뭐 먹었어요?”
“난 밥맛이 없어서.”
건오는 다봄의 식판을 보고서도 질문했고, 그녀는 그가 알면서 묻는 물음에 답했다.
“왜 그래, 건오야?”
굳은 그의 표정을 마주한 다봄이 건오의 팔을 잡았다.
그는 대답을 피했다.
“빈속에 약 먹지 마요. 나가서 뭐라도 사 올 테니까 기다리고.”
“아냐. 귀찮게 뭐 하러 그래.”
건오가 지갑을 챙기는데 다봄이 그를 만류했다.
그런데도 그가 움직임을 멈추지 않자, 그녀가 손을 뻗어 건오를 붙잡았다.
“나 정말 괜찮아.”
건오를 귀찮게 하기 싫은 다봄의 마음이 기어이 그의 인내를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