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아, 보고 싶은 것 같은데.
회사 옥상에 올라간 다봄이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투둑투둑, 조금씩 떨어지는 비가 그녀의 이마와 부딪쳤다.
다봄은 조금 전까지 일석이 주선한 식사 자리에 참석하고 온 참이었다.
일석은 다봄이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고 하니 선 자리를 들이밀지는 못했지만, 회사 중역과는 다리를 놓아 주었다.
다봄은 그 중년들과 마주한 채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가 나왔다.
“차후 계획이고 뭐고 알 게 뭐야.”
오늘 태철이 경질됐다. 명분은 실적이었다. 동시에 회사 내에서 정치질하는 부류들이 노선을 결정했다.
다봄과 주혁은 그들이 확정지은 금줄이었다.
“연락 오라는 놈은 감감무소식이고.”
짧은 푸념을 마친 다봄은 남은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녀가 막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다봄은 액정에 뜬 연지웅의 이름을 보고는 이마를 팍 찌푸렸다.
저녁을 먹는 도중에도 지웅에게서 전화가 끈질기게 걸려 왔었다.
“연다봄입니다.”
-왜 이제야 받아?
이럴까 봐 안 받았다.
다봄은 대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 통화가 지긋지긋했다.
“술 마셨으면 용건만 간단히 해요. 당신과 다르게 일이 차고 넘쳐서.”
-이 미친년이.
욕으로 시작된 지웅의 언사는 그의 주위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섞여 소음이 되었다.
회장을 어떻게 구슬린 거냐느니, 지분은 어차피 자기가 더 많다느니, 가면 갈수록 혀가 둔해지더니 그 혀로 같잖은 협박까지 한다.
“할 말 끝났어요?”
-건방진 새끼.
“년보단 새끼가 낫네요. 덕분에 녹음 잘했어요. 이 파일이 세상에 안 나오길 바라면 사고 치지 말고 집에 들어가요.”
-너 당장 와. 그 잘난 면상 좀 보자. 연다봄!
다봄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주변에서 지웅을 말리는 외침을 들으며 눈썹을 문질렀다.
-야, 여기 주소가 어디지? 이년 불러서 좀 가르쳐야겠어.
가르쳐?
누구는 자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들과 밥도 먹고 회사도 떠맡게 생겼는데, 초저녁부터 신나게 놀다 주정 부리는 꼴을 보니 다봄은 도저히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닥쳐, 덜떨어진 놈아.”
다봄은 비를 피할 생각도 안 하고 쏘아붙였다.
음성은 격하지 않았지만, 단숨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내가 연광에 들어가는 게 먼전지, 네 죄가 까발려지는 게 먼전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면 아무래도 후자가 더 빠를 것 같거든.”
-미쳤어? 죄라니. 네년이 뭘 알아!
이 와중에 그녀는 취한 지웅이 행여나 한마디라도 놓칠까 또박또박 발음해 주었다.
“다들 멍청해서 가만히 있는 거 아니야. 때를 기다리는 거야. 그러니까 몸 사려, 연지웅.”
-개……!
다봄이 통화를 끊고 전원을 껐다.
액정에 묻은 빗물을 닦은 그녀가 건물로 들어서서 젖은 머리를 털었다.
9층엔 그녀의 사무실만이 불이 들어와 있었다.
다봄은 으슬으슬한 몸을 담요로 덮고 의자에 앉았다. 창가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온 감각이 쏠렸다.
다봄은 모니터를 응시하던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녀는 온전히 혼자였다.
* * *
“부대표님, 정말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다봄은 오늘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들었다.
괜찮다는 기계적인 대답과 달리 그녀는 누가 봐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웃는 것도 힘겨워 보였고, 눈도 살짝 풀려 있었다.
하필 오늘은 주혁이 연광으로 출근한 날이었다.
“점심은 드셨어요?”
“맞다, 점심. 저 잠깐 밑에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
다른 직원들이 밥을 다 먹고 나서야 다봄은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는 잔병치레가 없는 대신 한번 아프면 크게 아팠다.
그걸 아는 다봄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스스로 이마를 짚어 보았다.
컨디션은 확실히 좋지 않았다. 그래도 열은 없는 것 같으니 괜찮을 것이다.
“아이스…… 아니, 따뜻한 아메리카노랑 샌드위치 하나 주세요.”
다봄은 회사 식당이 아니라 1층 카페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웠다.
그러곤 어제부터 꺼 두었던 핸드폰 전원을 이제야 켰다.
곧 그녀의 눈이 반가운 빛을 내며 크게 떠졌다. 부재중 목록에 건오의 이름이 있었다.
다봄이 서둘러 건오에게 전화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오늘 저녁 8시, 창북동 한식집. 윤민기 상무, 강희연 전무.]
다봄은 액정 위로 뜬 메시지에 숨이 턱 막혔다. 잠시나마 초롱초롱하던 눈동자가 건조하게 변했다.
다봄은 알맞게 식은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며 건오에게 전화하려던 핸드폰을 쥐었다.
우선 사무실에 올라가 조금이라도 자야겠다 싶어 일어서는데, 시야가 빙글 돌았다.
“하아.”
의지와 상관없이 도로 자리에 앉은 다봄이 머리를 붙잡았다. 시간을 두고 크게 호흡하니 눈앞이 다시 환해졌다.
이후 다봄이 수많은 사람 사이를 뚫고 엘리베이터를 잡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색이 안 좋으세요, 부대표님.”
“아……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가 봐요.”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직원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9층에서 홀로 내렸다.
다봄 뒤로 두터운 문이 닫히고, 그녀의 비서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게 다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건오야, 건오야. 어쩌니. 택시는 서울 간다니까 다 취소해 버리고, 버스로는 어떻게 가는 줄 모르고. 이놈 새끼들은 다 전화를 안 받고!
정신없는 선하의 전화를 받은 건오가 눈을 크게 떴다.
“잠시만요, 어머니. 조금만 진정하세요.”
건오는 이유도 모르고 일단 그녀를 달랬다.
덕분에 선하는 의식적으로 숨을 골랐다. 어지간히 놀란 탓에 그녀의 호흡 소리가 컸다.
“서울이라뇨? 무슨 일이세요?”
건오는 선하와 통화를 이어 가며 하람의 사무실을 찾았다.
어이없게도 낮잠을 자는 중이던 하람은 건오가 열어젖힌 문소리에 대번 눈을 떴다.
핸드폰 너머에선 조금이나마 진정된 선하의 말이 들려왔다.
-봄이가 병원이래. 애 아빠는 수액만 맞으면 된다며 알고만 있으라는데, 그래도 엄마가 가야 할 거 아니야.
하람을 흘겨보던 건오는 들리는 대로 사람과 단어를 연결 지었다.
병원? 누가?
그는 삽시간에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해졌다.
무서울 만큼 표정이 싹 변하는 바람에 하람이 하품하던 상태로 벌떡 일어섰다.
“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건오야? 엄마 말 듣고 있니? 마침 승훈이한테 전화 온다. 너흰 바쁘니까 일단 일하고 있어. 엄마가 먼저 병원 가 보고 다시 전화할게.
하람이 건오의 핸드폰을 가져가자마자 선하가 통화를 종료했다.
발신자는 엄마에다가, 이런 낯을 한 건오는 처음인지라 하람마저 덜컥 겁이 났다.
“대체 왜 그러는데?”
“누나가.”
“연다봄이 뭐.”
“병원이래.”
“정확히 말해. 엄마가 뭐라셨어?”
하람은 제가 물어놓고도 건오에게 제대로 된 답을 듣기는 힘들다고 여겼다.
그는 책상 위 엎어져 있던 핸드폰을 들고 주혁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저예요. 연다봄 무슨 일 있어요?”
-왜 너까지 전화했어? 아니야. 일은 무슨.
“병원이라면서요.”
-소문 참 빠르네. 다봄이는 괜찮으니까 막내는 일해.
저도 모르게 사색이 되었던 하람의 낯빛이 천천히 핏기를 되찾았다.
주혁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이 됐지만, 하람은 혹시나 해 또다시 물었다.
“애초에 무슨 일로 간 건데요?”
-과로에 몸살. 감기 같은 게 아니라 열도 없어서 병원을 안 갔나 봐.
하람이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멋쩍어질 정도로 순간적으로 겁을 먹었다.
하람은 한숨처럼 주혁을 나무랐다.
“열만 없어서 안 갔겠어요? 반은 아버지 죄네요.”
-그래. 네 엄마 오면 진짜 혼나겠어.
주혁이 씁쓸한 목소리로 하람의 말을 받아쳤다.
그때 건오가 하람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아버지, 연광 병원입니까?”
-건오야? 그래. 여기 연광 병원이야.
주혁은 건오가 당장이라도 달려올 듯한 느낌에 얼른 덧붙였다.
-너희까지는 올 필요 없어. 다봄이는 자고 있고, 승훈이가 엄마 모시고 온단다.
주혁의 짐작처럼 건오는 이미 문 쪽으로 몸을 돌린 상태였다.
주혁의 만류와 동시에 건오는 하람의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사무장과 눈이 마주쳤다.
건오는 반사적으로 다음 일정을 떠올렸다.
“두 분 모두 상담 예약하신 분들께서 대기 중이십니다.”
건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람은 오늘도 흐트러진 친구의 머리를 보며 제 핸드폰을 가져갔다.
핸드폰 너머 주혁도 사무장의 말을 들었다.
-막내들은 일하고 나중에 보자. 아빠도 바빠서.
“네, 전화할게요.”
주혁과의 통화를 마무리 지은 하람은 사무장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다시 문이 닫히자 그는 친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네 반응이 하도 격해서 나까지 식겁했잖아. 연다봄 안 죽어. 안 죽으니까 일 끝나고 가.”
“어떻게 이러지?”
“어떻게 이러긴? 연다봄이 몸살 났다고 일 내팽개치는 게 더 이상하지.”
하람은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 줄 알고 반박했으나, 건오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다봄이 걱정되는 와중에도 건오는 기가 막혔다.
이쯤 되니 그는 다봄에게 구원받은 대신 평생 그녀를 보며 애타야 하는 운명인가 하는, 되지도 않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심란한 마음을 어쩌지 못한 건오는 마른세수를 하다 버릇처럼 손을 올렸다.
“야, 또 머리! 너 아직 일하는 중이야.”
하람이 잽싸게 건오의 손을 잡아챘다. 흐트러진 머리가 미팅 전에 손 쓸 수 없게 망가질 뻔했다.
“다 됐으니까 가서 몰골 봐. 그래야 정신 좀 돌아오지.”
하람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말은 반은 틀렸고, 반은 맞았다. 하람은 일을 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왔지만, 건오는 멀쩡한 척만 하며 겨우 버텼다.
흐르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흘렀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잡혀 있던 모든 미팅이 드디어 끝나자마자 건오가 사무실을 나섰다.
하람이 붙잡을 틈 같은 건 없었다.
건오는 피가 바싹 마르는 기분을 몸소 느끼며 차에 올라타자마자 넥타이를 끌렀다. 그런데도 숨통이 트이지 않았다.
건오는 마구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입 안에 가둔 채 운전했다.
병원에 들어서고 병실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모든 세포가 불안으로 날뛰었다.
다봄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고 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몸살에 과로다. 병원에서 푹 쉬면 곧 퇴원할 일인데 이렇게 과민 반응하는 꼴도 웃기다.
그걸 알면서도 건오는 바싹 마른 입술을 어쩌지 못했다.
“건오야. 벌써 왔어? 너도 참. 다봄이 일이라면 유난이라니까, 정말.”
병동에 들어서자마자 복도에서 선하와 마주쳤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건오처럼 걱정을 끌어안고 혼란스러웠던 선하가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 덕에 건오는 조금이나마 여유를 흉내 낼 수 있었다.
“일이 일찍 끝났어요. 누나 상태는 어때요?”
“인사 한번 하더니 다시 자고 있어. 근데 건오 너도 아프니? 왜 이렇게 땀을 흘려?”
“덥게 입었나 봐요.”
그래?
선하는 곧이곧대로 믿으며 다봄이 입원한 병실로 건오를 데려갔다.
조용히 문을 연 선하를 따라 건오가 숨죽여 병실로 들어섰다.
그렇게 보고 싶던 다봄이 눈동자에 단박에 들어찼다.
환자복을 입고 굵은 바늘을 꽂은 채로.
건오가 질끈 눈을 감았다. 동시에 잠든 줄 알았던 다봄이 눈꺼풀을 올렸다.
“……건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