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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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이제 어떡하지?

오후 회의를 핑계로 대고 먼저 식당에서 빠져나온 다봄은 계속 그 생각만 반복했다.

“부대표님.”

정말 어떡하지?

연광그룹을 경영하겠다 말한 게 정녕 제 입인가 싶은데, 거기다 환영해 줘야 한다 어쩐다 말을 늘어놓게 만든 상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봄이 재차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역시 업무 관련된 연락뿐이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부대표님!”

“아, 음, 네?”

다봄이 핸드폰에서 고개를 들었다.

팀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입사 후 처음 보는 다봄의 모습이 적잖이 당황스러웠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괜찮으시죠?”

“그럼요.”

지금 그들은 다가올 여름을 맞이해 광고사에 의뢰해 받은 세 개의 콘셉트를 두고 회의 중이었다.

그 말은 다봄의 친오빠와 공공연하게 알려진 그녀의 전 연인을 두고 일하고 있단 소리였다.

“그러니까 B안에 C안을 섞는 게 좋겠다는 뜻이죠?”

“네. 저희는 아무래도 두 모델 특성을 살리는 방향이 눈길도 끌고 화제성도 잡을 것 같아서요.”

수영장 물속을 가로지르는 콘티를 다봄이 톡톡 건드렸다.

그 소리에 맞춰 그녀의 정신이 환기되었다.

“이번에도 신제품을 서지한 씨에게 맡길 건가요?”

“그럴 생각이었는데, 광고사 측에서 이번엔 연승훈 씨가 신제품에 더 잘 어울린다는 의견을 전달해 왔습니다.”

다음 달 출시할 늘봄의 신제품은 피스타치오 음료였다.

그 말에 다봄은 모처럼 웃었다.

“좋네요. 그럼 이번엔 둘이 바꿔서 진행하죠.”

“저, 근데 연승훈 씨와 신제품이 영 안 어울리지 않나요?”

팀원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봄 말고는 모두 그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래요? 전 되게 잘 어울리는데.”

“네?”

“우리 오빠, 피스타치오 좋아해요.”

다봄은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을 마치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회의실 사람들의 놀란 표정이 마치 정말이냐고 묻는 것처럼 보였다.

다봄은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그쪽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에요.”

“맞다. 광고사에 연승훈 씨 팬분 있다고 들었어요. 여름엔 그분이 맡겠다 하셨는데 정말 팬인가 봐요.”

“팬이요? 설마요.”

다봄이 습관적으로 의심하는 부분이 나오자 이번엔 팀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봄은 다시금 태블릿을 톡톡 두드렸다.

사실 그녀가 지적하고 싶은 건 신제품이 누구에게 더 잘 어울리느냐가 아니었다.

“그런데 수영하고 나와서 피스타치오 음료 마시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저희도 그 부분을 걱정했는데, 예산 내에서 하려고 하다 보니 그게 제일 낫겠더라고요.”

아, 예산. 그게 문제지.

다봄은 승훈의 광고를 미리 상상하다 고개를 저었다.

막상 영상으로 나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성이 차지 않았다.

“여름 시즌 광고는 B안과 C안을 섞어 가고, 신제품 광고는 A안이 나을 것 같으니까 예산을 더 들이는 방향으로 잡아 보죠. 대표님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이렇게 광고사에 의견 전달 후 콘티 확정되면 다시 회의 잡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요, 부대표님.”

“네?”

다봄이 회의를 끝내겠다는 뜻으로 태블릿을 끄고 자료를 모으는데, 해수가 손을 들었다.

“네, 해수 씨.”

“부대표님 그날 촬영장에 오실 건가요?”

눈을 깜빡인 다봄은 아직 회의실 스크린에 떠 있는 지한의 사진을 가리켰다.

해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봄이 보란 듯이 웃었다.

“그럼요. 우리가 여기에 돈을 얼마나 들이는데.”

팀원들의 걱정과 달리 다봄에게선 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해수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봄을 따라 웃었다.

짐을 챙긴 다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들어가세요.”

회의실 문이 닫혔다.

다봄은 슬리퍼 끌리는 소리도 내지 않으며 복도를 걸었다. 우연히 마주친 직원들과 눈인사도 나누고, 누군가와 대화도 했다.

그렇게 계단을 찾아 비상구에 들어섰다.

그녀의 입꼬리가 단숨에 내려갔다.

“미치겠네.”

이대로 9층으로 올라가면 주혁이 있을 터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일석 앞에서 뱉은 말이었다. 이제 와 발을 빼기엔 너무 크게 저질렀다.

무가 아니라 두부라도 썰기 위해서는 무슨 소리라도 해야 하는데, 건오가 연락이 닿질 않았다.

“받아, 건오야.”

하염없이 통화 연결음만 듣고 있자니 속이 탔다.

결국 다봄은 전화를 끊고 동생을 찾았다. 건오와 다르게 하람은 재깍 전화를 받았다.

비록 아주 퉁명스러웠지만 지금은 그 목소리마저 반가울 지경이었다.

“바빠?”

-응.

“그럼 건오 바꿔 줘.”

하람의 기가 찬 헛웃음이 넘어왔다.

다급한 탓에 평소답지 않게 뻔뻔하게 굴었던 다봄은 조금 창피해졌다.

-백건오 의뢰인과 상담 중이야.

“오전 내내 상담했던 건 아닐 거 아니야.”

-오호. 지금은 또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어?

다봄은 입술을 꾹 물었다. 차라리 전화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동생에게 안달 난 꼴을 다 보여 줄 뻔했다.

-뻔하네. 연다봄, 네가 잘못했지?

“아니야.”

다봄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부정했다.

하람은 두 번째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잘못한 것도 없으면 쟤가 알아서 찾아갈 때까지 기다리지?

“네가 지금 상황을 몰라서 그래. 나 급해. 오죽하면 너한테 전화를 했겠어?”

다봄이 정말 다급하게 말하는데도, 하람은 콧방귀를 뀌며 길게도 말했다.

-그렇게 상황이 급하고 네가 잘못했으면 찾아오면 되잖아. 사무소 문은 항상 열려 있어. 참, 먹을 거 사 오면 더 좋고.

“지금 농담할 때 아니거든.”

-나도 농담 아니야.

“너도 일종의 책임이 있어.”

다봄은 괜히 동생을 탓해 봤다.

물론 하람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누나의 말을 재밌어했다.

-백건오가 퇴사하는 직원에게 고백받은 것 때문에 싸웠다고는 하지 마. 저 새낀 네가 고백받는 것과 서지한이랑 일하는 것까지도 지켜보고 있잖아.

그 지켜보는 짓에도 한계가 찾아왔는데, 다봄이 확신을 주지 않으니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다봄은 한숨을 참으며 비상구 계단에 앉았다.

“바쁘다며. 일해.”

-저 새끼 안 찾아와?

다봄이 지친 목소리로 전화를 끊으려 하자, 하람이 떠보듯 질문했다.

그렇지 않아도 통화하는 중 주혁의 문자가 날아들었다.

회의 끝났으면 찾아오라는 메시지에 다봄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연광그룹이 무거운 건지, 결혼 얘기가 무거운 건지 모르겠다.

“응. 시간 없어. 이 누난 두부라도 썰러 간다.”

-그래. 뭐, 그렇다면.

“건오한테 전화 왔었다고 말하지 말고.”

-어.

다봄은 하람에게 의미 없는 당부를 남기곤 주혁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오늘따라 8층에서 9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너무 높았다.

* * *

“승훈이한테 신제품을 넘기겠다고?”

“네. 오빠 피스타치오 좋아하잖아요.”

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봄이 써 놓은 예산이란 글자를 펜으로 가리켰다.

“신제품은 A안이 낫고, 여름 시즌 광고는 B안에 C안을 섞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예산 초과해도 둘로 나눠서 진행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그래.”

“바로 전달할게요.”

주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다봄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단 듯 일어섰다.

하지만 주혁이 더 빨랐다.

그는 딸을 보며 내선 전화를 들었다.

“차해수 팀장 연결해 주세요. 네.”

빠져나갈 기회를 놓친 다봄이 손을 가만두지 못하는 동안 해수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연주혁입니다. 광고 진행 상황 확인했는데 예산 더 들여서 신제품은 A안, 다른 광고는 회의한 방향으로 진행해 주세요. 네. 수고하세요.”

수화기가 달칵 제자리를 찾았다. 다봄도 그 소리에 맞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주혁이 마른 손으로 입술을 쓸었다.

“이제 누군지 말해 봐.”

그는 돌려 물을 생각이 없었다.

다봄은 어떻게 하면 두부를 썰어도 상처가 나지 않게 썰까 고민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요리나 거짓말이나, 둘 다 재능이 없었다.

다봄이 애먼 손가락만 꼼지락거리자, 주혁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눈썹을 모았다.

“누군지 알아야 환영을 하지.”

“아직 상의가 되지 않아서요.”

그녀가 우물쭈물 한 말에 그는 기어이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와는 상의도 안 하고 네 할아버지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선은 보기 싫었어요.”

“네 할아버지 앞에서 연광을 물려받겠다고 한 순간부터 되돌릴 수 없는 건 알아?”

“어차피 제가 맡게 될 일이었던 것 같던데요.”

다봄이 그렇지 않냐며 눈으로 되물었다.

다봄의 의사를 묻지 않고 그녀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던 주혁은 소리 없는 한숨을 흘렸다.

“너도 자리에 있었으니 알겠지만, 난 네가 싫다고 하면 강요하지 않을 생각이었어.”

그건 그녀도 느꼈다. 그렇다 해서 다봄이 마냥 자유롭지도 않았다.

“결국 아빠 아니면 저잖아요.”

“그래.”

주혁은 어쩔 수 없었다는 걸 강조하듯 눈썹을 들어 보였다.

“네 삼촌과 사촌 대안이, 내가 생각해도 너와 나밖에 없었거든.”

그에 대해선 다봄도 동의했다. 캐나다에 사는 고모를 갑자기 부를 수는 없는 일이었고, 일석에게 전문 경영인이란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그 책임을 지며 결혼하겠다는 남자가 대체 누군지 말 안 해 주겠다는 거냐?”

“아빠도 저 놀라게 하셨으니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어쭈.”

다봄은 뻔뻔하게 대응했고, 주혁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당돌한 딸을 보고 웃을 수도 없고 뭐라 할 수도 없으니 눈과 입이 따로 놀았다.

“참. 집안이 마음에 들 거란 얘긴 또 뭐야?”

“말 그대로예요.”

주혁이 불안한 부분이 있다면 그 집안이었다.

주혁은 일석이 가지고 있는 기준을 잘 알았다. 웬만해선 일석의 눈에 차지 않을 터라 그는 딸 대신 벌써 걱정이 되었다.

“그 친구도 너처럼 경영해?”

“아니요.”

그럼 더 불안했다.

주혁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집안만 알려 줘 봐.”

“일하러 나가 보겠습니다.”

이러다간 건오와 상의도 없이 말해 버릴 것 같아, 다봄은 후다닥 대표실을 도망쳐 나왔다.

주혁이 딸의 뒷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멀찌감치 떨어진 부녀가 동시에 핸드폰을 들었다.

* * *

건오의 핸드폰이 계속 진동했다.

“언제까지 무시할 건데?”

다리를 꼬고 앉은 하람이 무심한 척 물었다. 그러나 입가에 걸린 웃음을 감추진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건오는 울리는 핸드폰을 누구보다 신경 쓰고 있었다.

“그렇게 움찔거리면서 대체 왜 피하는 거야?”

“시끄러워. 하던 말이나 계속해 봐.”

친구의 속사정을 다 알지 못하는 하람은 그쯤 놀리고 하던 말을 이어 가려 했다.

다봄의 전화가 끊기고 연이어 진동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하람의 핸드폰이었다.

“응, 형. 나 바쁜데.”

무표정하게 전화를 받았던 하람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하람이 핸드폰을 귀에서 떼지 않고 건오를 응시했다.

“연다봄이 연광을 뭐 어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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