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다봄이 고개를 기울였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를 보는 시선도 깊어졌다.
다봄의 싸늘한 반응을 보며 건오는 고요하게 대꾸했다.
“난 누나한테 진심이 아니었던 적 없어.”
그는 여전히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제게 향한 감정이 사랑인지, 다른 애정의 형태인지.
그리고 다봄은 이런 대답을 해야 하는 것 자체가 기가 막혔다.
“넌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랑 키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녀가 고개를 바로 세우고 건오를 똑바로 보자, 다봄을 보는 그의 시선도 점차 짙어졌다.
“내 오래된 짝사랑에서 비롯된 피해의식이라고 해도 좋아.”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느릿하게 덧붙였다.
“누나가 나한테 어떤 확신을 주었지? 키스? 섹스?”
무표정했던 건오의 낯에 서서히 금이 갔다. 그는 다봄의 반문이 가소로웠다.
“내가 20년 넘게 바란 건 연다봄 몸이 아니라 감정이야.”
“감정을 어떻게 더 보여 줘야 하는 거야. 눈으로, 말로, 몸으로, 난 다 했는데 왜 내 마음을 확신하지 못해?”
다봄은 만면에 억울함을 드러냈지만, 그럴수록 건오의 눈빛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는 전혀 친절하지 않은 표정으로 친절하게 짚어 주었다.
“누난 단 한 번도 말로 표현한 적 없어.”
“…….”
“내가 원한 건 몸보다 말이고.”
“하지만, 그건 너도!”
다봄이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정말 언어로 건오에게 표현한 적이 없었다.
당황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건오도 똑같다며 탓을 하려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변한 그의 낯을 보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누난, 알고 있잖아요.”
건오가 상처받은 얼굴로 속삭였다.
“내 감정, 너무나 잘 알잖아. 그러니 안달 같은 거 내지도 않고, 나도 똑같다며 고고하게 말할 수 있고 말이야.”
조금 전까지 억울했던 다봄은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누나가 그렇게 나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불안할 때마다 그냥 몸이나 섞을까?”
그가 그녀를 원망하고 있었다.
“건오야.”
이 와중에도 그녀는 사랑한단 말을 하지 않았다.
건오가 바라는 말만 해 주면 되었다. 다봄도 그걸 알면서 입술을 열지 못했다.
“갈게요.”
건오는 움찔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보다 먼저 돌아섰다.
그의 등을 보며 멍하니 서 있던 다봄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서야 급히 그를 따라갔다.
건오가 제 옷깃을 붙잡은 다봄을 내려다봤다.
“잠깐만, 건오야. 잠깐만.”
건오가 제게 닿은 다봄의 손을 살포시 쥐고 조심스레 떼어 냈다.
이 상황을 믿기 힘든 다봄이 제 손을 보다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나만 놓으면 끝날 관계는 너무 아프잖아.”
“아니야. 건오야.”
“……잘 자요. 누나.”
현관문이 닫혔다.
다봄은 문고리를 다급히 잡았으나 그를 따라 나가지는 못했다.
자신은 헤어질까 불안해 시작하기도 전부터 건오를 밀어냈으면서, 불안을 표현하는 그를 앞에 두고 사랑한단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 손과 다리를 핑계로 지금도 건오의 불안을 방관하고 있다.
다봄은 불현듯 그 이유를 깨달았다.
@‘사랑해, 오빠.’
‘내가 더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할걸?’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데?’(이탤릭)
지한과는 이러지 않았다. 한때 사랑한단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랬던 그와도 이별했다.
헤어짐이 다 그렇듯, 다봄도 참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일로 도피했다. 제정신으로 일했던 적도 있고, 제정신인 척 일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건오와 같은 일이 반복되면…… 그때는 일로 도피하기는커녕 아예 무너질 게 분명했다.
“건오야…….”
건오의 마지막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렇게 나가면서까지 사랑한단 눈빛으로 자신을 보았다는 것도.
다봄은 우두커니 현관을 바라보며 문을 열진 못하고 다시 열리길 기다렸다.
그러나 건오는 떠났고, 그녀는 남겨졌다.
다봄은 한참이 지나 자리에 주저앉았다.
* * *
“왜 이렇게 매가리가 없어?”
“아, 잠을 못 자서요.”
다봄은 힘없는 얼굴로 물병을 집었다.
딸의 까칠한 얼굴을 본 주혁은 내심 걱정이 되어 그녀 앞으로 반찬을 밀어 주었다.
“전 괜찮아요. 그나저나 오늘은 또 누구예요?”
“너도 아는 사람.”
이제 회사 점심시간에 불려오는 것쯤이야 익숙해진 다봄은 그러려니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마저 힘이 없어서 주혁이 미간을 모은 때였다.
미닫이문이 열리고 백발의 노인이 들어섰다.
반사적으로 일어서려던 다봄은 일석이란 걸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할아버지.”
“그래.”
일석은 비서가 빼 준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다봄은 너무나 당황스러워 주혁과 일석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 큰아버지까지 오시는 거면 마음의 준비 좀 하게 미리 말씀해 주세요.”
다봄은 벌써부터 질색한 낯으로 주혁을 향해 당돌하게 말했다. 기운 빠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됐다. 걘 안 불렀으니까 편히 먹어라.”
주혁 대신 일석이 답했다.
마침 다시 미닫이문이 열리고 식사가 차려졌다. 3인분의 차림에 다봄이 안도했다.
불고기전골을 앞에 둔 삼대는 조용히 수저만 움직였다.
다봄은 일석이 불편하지 않았다. 어릴 때는 아빠와 할아버지의 사이를 생각지 못하고 일석을 찾아갔던 터라 도리어 편하다면 편한 쪽에 가까웠다.
다만 둘 사이에 태철이나 주혁이 끼거나, 일 얘기가 나오면 말이 달라졌다.
“큼.”
괜히 사레가 들린 다봄은 기침을 참으며 물을 마셨다.
일석이 얼굴이 빨개진 손녀를 보며 물을 삼켰다. 주혁의 눈엔 일석이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보였다.
“다봄이에게 이만 설명해 주시죠.”
“뭘 설명까지 할 게 있어. 어쩌다 이렇게 밥 먹을 수도 있지.”
“아버지.”
다봄이 물컵을 내려놓지도 않고 눈동자를 굴렸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주혁과 달리 일석은 느긋했다.
“몇 번 더 이렇게 밥 먹자꾸나.”
“네?”
“한 세 번쯤이면 충분히 소문이 돌겠지.”
다봄이 반문할 때, 주혁은 상을 치워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삼대는 코앞에 매실차가 놓인 후 제대로 된 대화를 이어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봄에겐 대화보다 통보에 가까웠다.
“다음 경영을 위해 구도를 미리 재편하려는 거다.”
“다음 경영이요? 할아버지, 늘봄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니. 늘봄은 연광 밑으로 들어오고, 다봄이 네가 다음 연광을 맡을 거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봄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충격적인 말을 들어서 그런지 현실감도 들지 않았고, 그저 어른들이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려는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1년 반 뒤에 늘봄에서 쓰는 우유부터 연광 유업 제품으로 바꾸고, 그 외 자잘한 것들도 바꾸면서 5년 뒤엔 아예 계열사로 들어와. 이 정도 시간이면 되겠지.”
“늘봄 직원들 인사는 저희가 책임지는 겁니다.”
“그래. 주혁이 네가 5년 뒤 아예 연광으로 들어오고, 다봄이가 늘봄 대표를 하다가 적당한 때 네가 다시 늘봄으로 돌아가고 다봄일 연광으로 보내.”
“그건 연태철이 건드리지 못할 시기에 진행하겠습니다.”
두 대표는 거의 질겁한 다봄의 낯을 보고서도 그들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다봄이 생각할 시간을 주고자 찻잔을 들었다.
그녀는 이리저리 엉킨 머릿속이 복잡해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넋이 나가 있던 다봄은 겨우 의견을 내 보았다.
“저에겐 너무 과분하고 막중한 임무예요, 할아버지.”
“그래? 그럼 연태철이나 연지웅이 연광을 맡아도 된다 생각하는 거냐? 아니면 연광은 너와 상관없고, 늘봄만 지키고 싶은 거냐.”
일석의 비꼬는 듯한 질문이 다봄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비꼬고자 물은 게 아님을 알기에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네. 제가 지킬 건 늘봄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모든 걸 배우고 감당하고 있어요. 연광 경영을 누가 하건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다봄의 목소리가 딱딱했다.
일석은 고정되지 않고 방황하는 손녀의 눈동자를 보다가 주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봄이가 상관없다니, 연광은 네가 맡아야겠다. 그렇게 알고 천천히 준비해.”
“아빠.”
다봄이 주혁의 팔을 붙들자, 주혁은 괜찮다며 딸의 손을 다독였다.
다봄이 싫다면 주혁은 억지로 많은 걸 떠넘길 생각이 없었다.
다만 이제 그는 연광그룹이 태철 부자에게 넘어가는 모양을 눈 뜨고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둘에게 넘어간다면 연광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일 게 자명했다.
“늘봄은 네가 있지만, 연광은 누구도 없잖아.”
“하지만.”
“다봄이는 송열 외손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주혁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석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겨우 한마디였는데, 다봄은 이미 그 다음 말을 들은 것처럼 흠칫 놀랐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번엔 이 친구 한 번 만나봐라.”
식탁 위로 누군가의 명함이 놓였다.
정체도 모르지만 다봄은 이전처럼 받아 들 수 없었다.
“아뇨. 이젠 이런 데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녀에겐 건오가 있었다.
“나가서 만나면 또 생각이 달라져. 어떻게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아?”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 적 없어요.”
“연광 물려받기 싫은 것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다. 결혼만큼은 안 돼.”
“아버지.”
일석의 엄한 소리에 반응한 쪽은 다봄이 아니라 주혁이었다.
그는 질린 눈빛으로 일석을 응시했다.
“참 여전하시네요. 얜 아버지 아들 아니고, 제 딸입니다. 연 끊었던 아들이 돌아온 것 같으니, 제 딸 혼사까지 참견하십니까?”
“사업하는 집안에 운동선수만 넘쳐나서 뭐 하려고? 다봄이 전에 만나던 놈도 운동하던 놈이라면서.”
“운동하는 놈이든, 농사짓는 놈이든 다 우리 애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무슨 소리야! 다봄이만큼은 도움 되는 사람 만나야지.”
“할아버지.”
방황하던 다봄의 시선이 한자리에 멈췄다.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충동적으로 말한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다봄은 지금 이 고백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너 지금 무슨 소리야?”
주혁이 다봄 옆에서 황당하게 물었으나 그녀는 일석만 보고 뜻을 전했다.
“할아버지 눈에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것 같다면, 연광을 물려받고 결혼을 제멋대로 하겠습니다.”
다봄이 제안한 건 일종의 거래였다. 일석이 정말 연광의 총수 자리에 자신을 올리고 싶은 거라면, 결혼은 원하는 사람과 하겠다는 조건을 건 것이다.
그런 손녀의 의도를 파악한 일석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흰 눈썹을 움직였다.
“아니. 네가 말하는 꼴을 보니 그 운동하던 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구나. 그럴 거면 되었다.”
“그 사람 집안은 마음에 드실 거예요.”
다봄이 건오의 부모를 떠올렸다.
건오의 친부모가 제양그룹이라 다행이다,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거기다 연락 없는 건오를 떠올리니 혼자 김칫국 마시는 제 모습이 웃겼지만, 지금 다봄은 건오가 아니면 안 되었다.
건오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냥 허락해 주세요. 그게 누구든. ”
다봄이 주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빠도 약속해 줘요. 무조건 환영해 주겠다고.”
건오는 반드시 환영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