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다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펼쳐졌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며 숨을 죽이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지한이 건오의 멱살을 잡더니 손을 올렸다.
다봄의 시야에 그 모습이 크게 들어찼다.
“누나.”
건오와 눈이 마주쳤다. 다봄은 그제야 본인이 달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멀리 있던 그들과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지한도 그녀를 발견했다.
“봄아.”
그의 손이 멈추자 다봄도 발을 멈췄다.
“뭐, 하는 거야?”
다봄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지한이 그녀의 물음에 담긴 비난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그게 아니라.”
지한이 건오의 멱살을 놓고 재빠르게 주먹을 내렸다. 그러나 건오에게 붙잡힌 손은 내리지 못했다.
“아니야. 말하지 마. 들을 생각 없어.”
다봄은 직접 그들 사이로 끼어 들어가 건오가 잡아챈 지한의 손을 떼어 냈다.
그 찰나, 지한은 어깨를 으쓱이는 건오와 눈이 마주쳤다.
“봄아, 아니야. 오해가 있었어. 내가 네 동생한테 뭘 어쩌겠어.”
“무슨 오해?”
지한을 올려다보는 다봄의 눈매가 매서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한은 억지로 불안을 잠재웠다.
남매와 다름없이 자랐는데, 이제 와서 이성으로 엮인다고?
다봄에게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적어도 지한이 아는 다봄은 그랬다.
“백건오 씨가 널 두고 말을 말도 안 되는 소릴 해서.”
지한이 건오를 흘끗 보았다. 여유롭던 건오의 낯이 조금 굳었다.
건오는 다봄의 반응을 걱정한 것이지만, 지한은 그가 거짓말이 들통날까 우려하는 것이라 여겼다.
다봄은 가만히 지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한은 저를 올려다보는 다봄의 표정이 그대로 건오에게 옮겨 가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너와의 관계를 이상한 뉘앙스로 표현해서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이상한 뉘앙스?”
“기가 막히지?”
지한이 다봄을 내려다보며 애써 다정하게 웃었다.
그 꼴을 보는 건오의 눈빛이 점점 가라앉았다. 그녀를 향한 그의 미소가 거슬리기 그지없었다.
그때 다봄이 건오의 손깍지를 꼈다.
“이상한 뉘앙스가 뭔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만 가 줘.”
연이어 그녀가 지한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지한의 낯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다봄은 그 모습을 길게 보지 못하고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다봄과 연결된 건오가 움직이지 않았다.
다봄이 의아하게 건오를 돌아보는데, 지한은 자신을 향하는 건오의 접힌 눈매를 발견했다.
울컥한 지한이 다봄을 붙잡았다.
“다봄아.”
그녀는 시선을 들어 제 손목을 잡은 지한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새 다봄의 시선은 더 차가워져 있었다.
지한은 제게 닿아오는 그녀의 온도를 견디지 못했다.
“동생을 어떻게 남자로 봐.”
그는 반쯤 충동적으로, 반쯤 다봄과 건오를 상처 입힐 작정으로 말했다.
예상대로 다봄이 흠칫하자, 지한은 거칠 것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네가 잠시 착각하는 거야, 다봄아. 네가 얠 대하던 마음을 생각…….”
지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지한은 눈 깜짝할 새 건오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멱살은 이럴 때 잡으라고 있는 거야.”
건오의 고저 없는 음성이 느릿느릿 지한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상대가 주제를 모르고, 나댈 때.”
지한이 멱살을 당겨도 꿈쩍하지 않던 건오가 지한을 무자비하게 끌어와 그를 들어 올렸다.
지한은 숨이 막히기도 했지만, 치욕에, 창피함에 화가 났다.
“정말 미쳤어?”
“내가 멱살 한 번 잡혀 줬잖아. 나도 한 번은 잡아야 공평하지.”
다봄은 머리가 어질해졌다. 그러나 도저히 건오를 말릴 수가 없었다.
여기서 녀석을 말리면 더 큰 폭풍이 불어올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내 눈앞에서 뭐라도 되는 양 건방 떨지 마. 지켜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건오는 음산하게 경고하며 손아귀에 바짝 힘을 주었다.
억지로 고개를 치켜들게 된 지한이 건오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럼에도 건오가 꿈쩍하지 않자 결국 지한은 다시금 주먹을 올렸다.
그는 어떻게든 이 굴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빠!”
놀란 다봄이 손을 뻗었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건오가 드디어 멱살을 놓았다.
지한은 반사적으로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만하자. 그만하자, 건오야.”
다봄은 다급히 건오를 말렸다. 아무리 뭘 모르는 다봄이라도 건오가 힘으로 우위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건오는 아직 확인할 게 남아 있었다.
“서지한,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오빠를? 여기서?”
건오가 가장 거슬렸던 것.
이 시간에 다봄의 첫사랑이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모습을, 그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영문을 몰라 하던 다봄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지한에게 전화가 왔던 게 떠올랐다.
“볼일은 없는데.”
다봄은 흘긋 지한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건오에게 멱살을 잡힌 후 말이 없었다.
다봄은 구태여 지한의 입을 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건오도 그녀의 반응을 보고는 지한이 어떤 약속도 없이 왔다는 걸 알아챘다.
건오가 짧게 흘린 비웃음이 밤공기를 타고 적나라하게 퍼졌다.
“나중에 봐, 오빠. 난 건오랑 들어갈게.”
다봄은 만면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황급히 얘기했다.
지한이 입을 꾹 다문 사이 그녀가 건오를 끌었다.
다시금 두 남자의 서릿발 같은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백건오.”
다봄이 부르자 흉흉하던 건오의 눈빛이 나름대로 순하게 변했다.
마냥 유순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다봄도 그것까진 바라지 않는지 연달아 건오를 당기며 손등을 문질렀다.
지한은 아파트 안으로 사라지는 연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평생을 남매로 지내다가 이제 와 남녀로 만나겠다고?
그들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달라진 두 사람을 지켜본 지한은 다봄에게 기묘한 배신감까지 들었다.
“빌어먹을.”
그에겐 여러모로 최악의 날이었다.
* * *
“화났어?”
“네.”
“나도.”
다봄과 건오가 현관에서 서로를 보았다. 밝았던 센서 등이 꺼졌다.
민감한 센서가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왜?”
다시 말문을 연 쪽은 다봄이었다.
그는 살짝 미간을 모으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다봄은 잠시 밝아진 현관 센서 등 아래서 급히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
“백건오.”
“누나야말로 왜 화가 났는데.”
“난.”
돌아보는 건오의 눈빛을 마주한 다봄은 잠깐 숨을 골랐다.
“지한 오빠가 주먹까지 올렸는데 왜 가만히 있었어? 그러다 진짜 맞았으면 어떡하려고.”
그녀는 속상함 가득한 낯빛으로 그를 걱정했다.
건오의 입장에선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동시에 즐거운 걱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가지고 건오의 표정이 바뀌지는 않았다.
“맞긴 누가 맞는다고. 누나가 화난 건 그게 다예요?”
다봄은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물어볼 말이 많기는 했다.
아니다. 이건 화가 난 게 맞는 건가.
다봄의 생각이 계속될수록 그녀의 입술이 괴롭혀졌다. 건오는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새끼 언제 끊어 낼 거예요?”
다봄의 입술이 드디어 해방되었다.
건오는 그녀의 입술에서 시선을 끌어올렸다.
다봄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가 고개를 떨궜다.
“왜 피해요? 그건 무슨 뜻인데.”
그의 음성이 싸늘하게 깔렸다. 이제 다봄은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했다.
“모델 계약이 남았어.”
“집으로 찾아오는 게 계약 따위라고 말할 건 아니죠?”
“아마 시간, 그러니까 그것도 일종의 계약인데, 저번 이벤트 때 약속했던…….”
다봄은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하고자 했지만 바로 실패했다.
“그래서.”
건오가 그녀의 앞뒤 섞인 변명을 끊어 냈다.
“언제까지 나한테 이 꼴을 보여줄 생각인데.”
그가 다봄을 향해 날을 세우자마자, 그녀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다봄이 그의 부정적인 감정을 접하기 시작한 건 건오가 마음을 드러내면서부터였다.
다봄은 그의 화난 모습이 여전히 낯설었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왜 말을 안 해요.”
“……무슨 말을 원하는데.”
각자 감정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다봄이 도로 고개를 들자 건오가 되물었다.
“무슨 말? 내가 원하는 대답을 알면 그대로 해 주기라도 하려고?”
“내가 부른 게 아닌 거 알잖아.”
“그러면 저 새끼가 누나 찾아올 때마다 누나가 부른 게 아니니까 나는 닥치고 넘어갈까?”
건오는 우뚝 서서 다봄을 내려다봤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다르게 그의 눈빛이 맹렬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숙이려 하자, 건오가 손을 뻗었다.
“원하는 말이 굳이 듣고 싶다면 해 달라는 대로 해 줄게.”
그가 손가락으로 다봄의 머리카락을 빗었다. 다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올라왔다.
“누나,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말이야.”
건오가 사나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내가 원하면 당장이라도 끊어 낼 수 있다는, 그런 빈말이라도 듣고 싶은 거야.”
그가 누나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꼼짝없이 얼어붙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모든 면모가 그녀를 압박했다.
다봄은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줄도 모르고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건오가 빨랐다.
“언제쯤 해 줄래? 내가 얼마나 더 기다릴까?”
배려일까, 비아냥일까.
사실 어떤 게 더 가까운지는 그녀가 더 잘 알았다.
“연다봄.”
“건오야.”
다봄은 30년 넘게 불린 제 이름이 새삼스러워 눈썹을 내렸다.
그녀의 이름을 그토록 많은 감정을 담아 불러 놓고, 그는 메마른 낯을 흉내 냈다.
“내가 다른 여자한테 고백받은 건 신경 쓰이지도 않아?”
건오는 스스로 뱉은 말에 자조했다.
관심을 구걸하고 애정을 확인하려는 제 모습이 구차하고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도 결국 본인이었다.
“아니야. 나 너무 신경 쓰였어.”
다봄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건오는 믿지 않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대체 누나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는데, 애초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
그는 버석하게 마른 입술로 고요하게 전했다.
“피하지 말란 말 취소할게. 애정과 사랑이 헷갈렸다면, 그냥 나에게서 도망가.”
건방지게 굴던 건오는 어디로 가고, 그는 지친 낯으로 덧붙였다.
“잘 생각해요. 진짜 마지막으로 생각할 시간 주는 거니까.”
이 말을 하는 순간마저 그는 다봄이 정말 자신을 버릴까 두려웠다.
동시에 그녀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제가 버려져야 한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버거운 감정을 짊어진 건오가 끝의 끝까지 상상하며 힘들게 입을 열었지만, 다봄은 그런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뭐? 헷갈려? 마지막?”
충격을 받은 다봄이 건오의 말을 곱씹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졌다.
“진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