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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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열심히 하니 이런 과찬도 듣네요. 감사합니다.”

다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녀의 술잔을 채워 준 의원은 제가 다 흐뭇한 표정으로 주혁을 보았다.

“하하. 능력 있는데 겸손하기까지 하고. 연 대표님 자식 농사가 이렇게 풍년이니 걱정 같은 건 없으시겠습니다.”

“아휴. 얘도 아직 배워야 할 게 한가득합니다. 그래도 뭐. 남 부럽지 않게 키우긴 했습니다.”

중년들의 웃음소리가 룸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억지로 웃던 다봄은 광대가 당겨서 이번만큼은 따라 웃지 않고 물잔으로 표정을 숨겼다.

점심부터 강행군이었다.

연광그룹에서 자리 하나씩 차지하는 임원들과 식사를 하고, 다른 이들과 커피를 두 번이나 마셨다.

다봄은 주혁의 이 행태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선임도 되기 전에 이사회 결정을 알고 있던 것처럼 줄지어 약속을 잡아 놓았고, 그 자리에 다봄을 불러내었다.

“우리 부대표도 더 바빠질 텐데, 그 전에 결혼해 둬야 하지 않겠어요?”

“네. 결혼도 곧 해야죠.”

다봄은 으레 그렇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고갯짓의 의미가 달라졌다.

이전에는 얘기가 길어지는 게 귀찮아 짧게 끝내기 위해 대답했다면, 지금은 그 상대를 떠올리고는 주혁을 곁눈질했다.

주혁은 다봄의 형식적인 대답을 아는 터라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상대는 있어요? 보니까 수영하던 친구와 연인이었다 하던데.”

“그분과는 좋은 친구로 남았어요. 아마 다른 좋은 인연이 있겠죠.”

“그래요? 그러면 내 조카 한번 볼래요?”

다봄은 제 앞에 들이 밀어진 핸드폰을 관심 있게 보는 척했다.

“이분은 테니스가 취미인가 보네요.”

“조카가 골프 좀 배우라고, 배우라고 해도 너무 정적이라 싫다는 앱니다. 사교를 몰라요. 자기 좋아하는 거에만 푹 빠져 사는 놈인데 이번에 박사 끝나고 어디 연구소 들어갔다고 하대요.”

“오. 그래요?”

“제 조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애가 참 착해요. 생긴 것도 이만하면 잘생겼죠?”

아니요.

“의원님과 인상이 비슷하네요.”

“얘가 자기 아빠를 많이 닮아서 그래요. 아마 올해 서른이던가.”

건오 나이였다.

다봄이 싱긋 웃었다.

“나이는 딱 좋네요.”

“그러니까요! 내가 볼 땐 둘이 잘 맞을 것 같아.”

다봄은 그림 같은 웃음을 지으며 주혁을 향해 눈짓했다.

집요한 선 자리 제의가 오늘따라 유독 불편할 때, 마침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선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는 다봄이 손을 뻗었다.

살며시 핸드폰을 테이블 밑으로 내린 그녀가 반짝거리는 액정을 보았다.

다봄은 처음에 제가 무얼 잘못 읽은 줄 알았다.

“상황이 골치 아프긴 하죠. 그래도 뭐,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두 중년의 대화 주제가 바뀌었는데, 다봄은 그들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건오가 고백을 받았단다.

누구에게? 아까 건오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시간이 없었나?

아니, 애초에 이런 건 말하는 게 아닌가?

다봄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건오의 대답이 어땠을지는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오묘한 기분이 가시지는 않았다.

“아휴, 오늘 기분 좋게 식사했습니다.”

“반가웠습니다. 다음에 한 번 더 자리 마련해서 만나 뵙죠.”

“그때는 우리 조카도 데리고 올까요? 하하하.”

의원의 진심이 섞인 제안을 마지막으로 식사 자리가 파했다.

의원이 떠나자마자 다봄은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바로 내렸다. 주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과근무 수당 주실 거예요?”

“아예 회식할 때도 수당 달라고 하지?”

“그거 괜찮은데요?”

“흰소리 말고 얼른 들어가서 쉬어. 차는 회사에 있지? 아빠 대리로 가는 길에 내려 줄게.”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

다봄은 손사래를 치며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얼른 집에 가서 이 신경 쓰이는 문자를 어떻게든 해결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혁은 술을 마신 딸을 기어이 차에 태웠다.

“차에 탄 김에 같이 집으로 가는 건 어때?”

“아빠 집에선 강 안 보이잖아요.”

“너 집에 오게 하려면 이사라도 가야겠다.”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은 부녀는 나란히 뒷좌석에 기댔다.

주혁이 눈을 감자 다봄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녀가 아무리 봐도 변함없는 문장을 계속해서 읽어 대던 도중이었다.

지한에게서 전화가 걸려옴과 동시에 주혁이 그녀를 불렀다.

“딸.”

다봄은 흠칫해서 어깨를 올리며 무음으로 울리던 전화를 거부했다.

다행히 주혁은 아직도 눈을 감고 있었다.

“체력 관리 잘해.”

“조기 퇴근시켜 주시면 가능할 것 같아요.”

나름대로 진지하게 말했던 주혁은 김이 새서는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다봄은 웃을 수 없었다.

“여기서 내려 주세요.”

“그래. 주말 잘 보내고.”

“아빠도요.”

다봄은 단지 앞에서 내리자마자 핸드폰을 들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9시가 넘었다.

다봄이 건오에게 전화를 걸며 아파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건오와 하람은 야근을 위해 건물 아래 식당으로 내려가 저녁을 시켰다.

건오는 밥을 먹는 내내 하람을 흘겨보았다. 하람의 미소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하람도 저를 보는 건오의 시선을 알고 있었지만 표정을 바꾸지는 못했다.

“너 왜 그따위로 웃고 있는 건데?”

건오가 하람이 주문한 맥주를 마시며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하람의 표정이 어떻건 무시했을 텐데, 왜인지 지금은 신경이 쓰였다.

“따위라니. 말이 심하네.”

그러면서 하람이 또 입꼬리를 올렸다.

건오는 그게 그렇게 꺼림칙했다.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내가?”

건오는 정말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그럴 일은 전혀 없을 거라는 전제가 깔린 되물음에 하람은 가소롭게 그를 비웃었다.

건오는 하람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슬슬 불안해졌다.

“대체 뭔데 그래?”

“자.”

하람은 열 마디 대신 핸드폰을 내밀었다.

연다봄이란 이름에 건오는 가늘게 뜬 눈으로 하람이 보여 준 메시지 화면을 읽었다.

“아마 연다봄 지금 엄청 신경 쓰고 있을걸?”

하람이 으스대며 확신했다.

그 웃음소리를 듣는 건오는 두통이 일었다. 그렇지 않아도 흉흉했던 그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건오의 낯이 심상치 않자 하람도 다시 핸드폰을 가져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네가 밀당을 못하니까 도와준 거잖아.”

밀당이란 어처구니없는 단어가 하람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건오가 더없이 싸늘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람은 뭐가 잘못된 건지 몰랐지만, 심상치 않은 친구 모습에 말을 아꼈다.

건오는 사무소로 돌아가 일단 야근을 시작하긴 했다.

머리는 계속 지끈거렸고, 다봄에게선 계속 연락이 없었다.

하람은 어쩌자고 그런 걸 말한 건지.

괜히 다봄이 신경 쓰는 건 아닐까 걱정됨과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연락이 없다는 게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그 문자를 받고도 아무것도 궁금한 게 없는 걸까?

그는 핸드폰을 계속 확인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어갔다.

결국 건오는 모든 걸 접고 사무소를 나갔다.

다봄을 보아야겠다는 마음만 가지고 택시를 탔다.

다봄의 집 앞에 도착한 그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려던 때였다.

낯익은 형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건오는 잘못 본 것이길 바랐지만, 그쪽에서도 그를 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아파트 단지의 다른 방향에서 걸어오던 지한이 먼저 건오에게 인사를 했다.

건오는 가만히 서서 제게 다가오는 지한을 물끄러미 보았다.

안녕하지 못했다.

이전이었다면 안녕하지 않더라도 예의가 무엇인 줄 아니 의례적으로라도 마주 인사했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러질 못했다.

“여기서 뵙네요.”

건오 앞에 선 지한 역시 떨떠름한 시선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그를 훑었다.

건오는 가만히 지한의 눈을 주시했다.

“그러게요.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서, 서지한 씨를 뵙네요.”

“아무래도 그쪽도 다봄이를 만나러 온 것 같은데, 연락은 했나요?”

건오는 미간을 모았다.

지한은 연락을 하고 온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눈에 띄게 동요했다.

“안 했나 보네요.”

그리고 지한은 안심했다.

건오가 하도 같잖은 듯 저를 깔아보는 것 같기에 혹시나 하였다.

혹시나, 다봄이 저 동생이란 남자의 마음을 알아챘을까 봐.

“무슨 일로 오셨죠?”

“그걸 왜 묻습니까?”

“다봄이 오면 제가 전해 줄게요.”

지한이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어떻게 보면 으스대는 모양새였지만, 사실 그는 얼른 건오를 보내고 싶었다.

“필요 없습니다.”

건오는 제 상황을 떠올렸다.

이제 그는 다봄에게 질투조차 티 내선 안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한이 제게 던진 질문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삼자대면해야겠네요.”

“굳이?”

“이 밤에, 직장도 아닌 집으로 다른 남자가 찾아오면 그 정도는 해야죠.”

건오의 동요가 사라지고 지한의 안면이 서서히 굳었다.

지한은 건오가 말한 의미를 천천히 되새기며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동생치고 누나에 대한 관여가 상당히 깊은데.”

“그렇죠. 제가 그저 동생이면 이런 행동은 과하죠.”

“……지금 그쪽, 꼭 그저 동생이 아니란 말로 들리네?”

찝찝한 지한의 표정과 달리 건오는 완벽히 평소의 페이스를 찾았다.

단숨에 특유의 덤덤한 모습으로 돌아온 건오는 한쪽 입술 끝을 보란 듯 올렸다.

“잘 들으셨네요, 서지한 씨.”

지한의 충격이 짙어질수록, 건오의 비웃음 또한 짙어졌다.

우려가 현실이 된 상황 속에서 지한은 누가 시간을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건오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지한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지한에게 멱살이 잡힌 건오는 스르르 눈을 내렸다.

지한의 다른 손은 주먹이 쥐어져 있었다.

“장난도 정도껏 해.”

“장난은 서지한 씨가 치는 거여야 할 텐데.”

지한이 높임말을 갖다 버리자, 건오가 제 멱살을 잡은 지한의 손목을 꽉 잡았다.

지한은 건오의 멱살을 당겼지만, 건오는 한 발자국도 끌려오지 않았다.

“분해?”

“뭐?”

“서지한, 그쪽 표정이 그래 보여서.”

지한에게 순순히 멱살을 내준 건오가 조용히 말했다.

지한의 주먹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착각하지 마. 봄이가 널 남자로 본다고? 말도 안 돼.”

지한이 과장된 헛웃음을 흘렸다.

건오는 그의 말에 순간 흐트러진 감정을 이를 악물며 감췄다.

“네가 제일 잘 알지 않아? 그럴 일은 없다는 거.”

어떻게든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지한에게 건오는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난 그쪽이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그쪽이 누나의 뭐라도 된다 착각했나 봐.”

다봄을 짝사랑하던 시절, 건오는 스스로를 깎아내리던 말을 지한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그러니 현재 그녀를 짝사랑하는 지한에겐 타격이 컸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지한이 주먹을 올린 순간이었다.

“누나.”

건오가 다봄을 발견했다.

지한이 주먹을 올린 상태로 퍼뜩 상체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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