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네, 백건오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세상 결혼정보회사 매니저…….
“끊겠습니다.”
건오의 핸드폰이 넓은 책상 위로 떨어졌다. 꽤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그의 시선은 모니터에만 고정됐다.
그러나 잠시 후 들린 노크 소리에 건오는 고개를 돌려야 했다.
“네, 들어오세요.”
노크를 했다는 것부터 연하람은 아니란 말이었다.
이내 문이 참 느릿하게도 열리며 한 직원이 들어섰다.
“저, 변호사님.”
“말씀하세요.”
“인사드리러 왔어요. 저 오늘 근무 마지막 날이라서요.”
조용한 직원의 말에 건오는 그제야 오늘이 누군가의 퇴사 날임을 기억해 냈다.
2주 전 송별회를 했던 윤정민 사원이었다.
“그렇죠. 시간 참 빠르네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기꺼이 일어선 건오는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며 건오의 손을 마주 잡은 정민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짧은 악수를 한 건오는 벽에 걸린 시계로 흘끗 시간을 확인했다.
곧 퇴근 시간이었다.
“변호사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건강하시고요.”
“감사합니다. 잘 지내세요.”
건오는 이만하면 인사를 다 했다고 생각했다.
창문 너머 직원들도 슬슬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럼 들어가 보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요.”
눈으로 인사를 한 건오가 막 몸을 돌렸을 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정민이 확 고개를 들었다.
“변호사님.”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가 도로 정민을 내려다보았다. 정민은 끌어모은 용기만큼이나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여자! 친구 있으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급격히 작아졌지만, 건오의 귀엔 너무도 잘 들렸다.
그러나 그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적어도 놀랄 줄은 알았는데 그에게서 어떤 반응도 없으니 정민의 고개가 절로 수그러졌다.
“갑작스럽겠지만, 꼭 여쭤 보고 싶었어요. 이제 마지막이라 만나 뵐 기회도 없고 해서…….”
정민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짧게 숨을 골랐다. 그러곤 어렵사리 고개를 들었다.
정민이 건오를 마음에 품은 건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고부터였다.
처음엔 여느 다른 직원들처럼 ‘눈이 호강한다, 변호사들 얼굴이 복지다’라며 수다를 떠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직 일이 익숙지 않아 일찍 출근한 그녀는 사무소에서 밤을 지새운 건오를 발견했다.
항상 하고 있던 넥타이는 어디에다 뒀는지 보이지 않고, 단추가 두어 개 풀려 있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사무실에서 나온 건오는 오늘처럼 정민과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되게, 일찍 나오셨네요.’
잠긴 그의 음성이 이른 아침 정민의 정신을 깨웠다.
그 모습은 마치 보면 안 될 걸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제가 아직 일이 낯설어서, 그래서 먼저 왔어요.’
그녀는 묻지도 않은 말을 알아서 설명하고는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람과 건오의 존재가 매우 불편하던 시기였다.
건오가 말없이 사무소를 나가자 정민은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며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눈앞에 파란 바탕화면보다 건오의 정갈하지 않은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미친 것 같아 정민이 고개를 힘차게 젓고 있었다.
‘드시고 하세요.’
금세 사무소로 돌아온 건오가 정민의 책상 위에 커피를 놓았다.
정민이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땐 그는 이미 제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커피잔에 새겨진 늘봄의 벚꽃 로고가 유난히 선명했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에도 벚꽃잎이 불어왔다.
“……좋아해요, 변호사님.”
내내 반응이 없던 건오가 드디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재차 용기를 쥐어짜 냈다. 한 번 말하니 두 번은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1년 넘게, 좋아하고 있습니다.”
정민은 두려움과 두근거림을 동시에 느끼며 제 마음을 전했다.
건오는 그런 그녀를 빤히 내려다봤다. 정민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기 위해 목에 힘을 줬다.
마침내 이제껏 침묵하던 건오가 입을 열었다.
“접으세요.”
그는 더없이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마치 끝나지 않은 잔업이라도 해결하는 것 같아, 정민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그가 무심히 덧붙였다.
“저는 20년 넘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아.
정민은 싸늘한 눈빛을 보며 울 듯이 웃었다.
건오는 말로나 시선으로나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기회 따위는 없다는 걸 못 박는 태도였다.
이건 그녀가 예상했던 그림보다 훨씬 최악이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 보시죠.”
“아…… 네. 저도, 감사합니다.”
서로 마음 없는 감사의 말이 오가자마자 정민은 도망치듯 건오의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고, 그는 블라인드를 내렸다.
자리에 앉은 건오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정민은 1년을 좋아했다고 했지만, 그는 1년 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아예 관심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좋아해요.’
정민이 마음을 다해 고백하는 때에 잔인하게도 건오는 다봄을 떠올렸다.
제가 그 말을 했을 때, 다봄의 복잡한 표정을 기억했다.
누군가의 진심이 기쁘지 않을 수 있다. 그때 그 순간 다봄이 그러했다.
건오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종일 다봄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연광 그룹 임시 주총이 열린 날이었다.
건오가 주혁의 뉴스가 띄워진 모니터를 돌아보던 때였다.
하람이 그의 사무실에 불쑥 들어왔다.
“백건오, 인기 많네.”
벌써 정민의 고백이 사무소를 한 바퀴 돌아 하람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근데 뭐라고 하면서 거절한 거야? 뭔 무슨 말을 했길래 울기까지 해?”
건오를 비난할 준비를 마친 하람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건오는 조용히 기사를 읽었다.
주혁의 연광그룹 사외이사 선임과 태철의 경질을 연관한 수많은 추측이 경제 뉴스 메인에 자리했다.
얼마 전에 늘봄이 세무조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결정된 사안이니만큼 연광그룹의 권력 구도가 재편되고 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말 안 해 주면 나 연다봄한테 전화해서 다 말한다?”
연다봄.
그 이름에 건오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그녀는 어떤 길을 걷게 되는 걸까.
다봄은 알게 모르게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건 그녀가 늘봄에 입사하면서부터 정해진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얜 또 전화 안 받네. 아까도 그러더니.”
“안 받아?”
건오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람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어이가 없는 건 어이가 없는 거다.
“나 연다봄이랑 좀 닮지 않았냐? 연다봄한테 하는 거 반만큼 날 대해 줄 생각 같은 건 안 들어?”
“내 관심이 필요해?”
“아니.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럼 됐어. 누나한테 언제 전화했었는데?
하람은 건오를 흘겨보고는 소파에 앉았다.
주혁의 기사가 난 직후였기에 언제였는지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점심 먹기 전에.”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다봄에게선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하람은 건오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해 봐.”
건오가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그게 꼭 ‘내가?’라고 되묻는 것 같기에 하람은 보태어 말했다.
“네 전화는 받을 수도 있잖아.”
심증만 있는 둘 사이 관계를 떠보는 장난이었다.
그런데 건오는 잠시 모든 동작을 멈추고는 침묵했다. 전화하는 게 대체 뭐라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양새라 도리어 하람이 당황하고 말았다.
“쓸데없이 왜 그렇게 진지해?”
“안 받을까 봐.”
건오는 솔직히 답했고, 이제 하람은 황당해졌다.
“안 받으면 안 받는 거지.”
“그러게.”
백건오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의 오랜 모습이기도 했다.
여전히 혼자 좋아하는 것 같은 불안은 오랜 짝사랑의 폐해였다. 건오도 그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빨리 걸어 봐.”
하람이 재촉했고, 건오는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 연결음이 길어질수록 그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짝사랑일 때는 당연하게 여기던 기다림이 지금은 처음 해 보는 것처럼 영 불편했다. 웃긴 일이었다.
“되게 바쁜가 보네.”
건오가 핸드폰을 내리자 하람은 얼결에 다봄을 변호하듯 중얼거렸다.
그때 아직 끊지 않은 핸드폰에서 다봄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응, 건오야.
건오는 그 작은 부름을 듣고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미안해. 너무 바빠서 연락할 틈이 없었어.
목소리만 들어도 다봄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래서 건오는 괜찮아진 것도 같았다.
“퇴근했어요?”
-아니. 점심부터 아빠 부름에 불려 나가서 연광 사람들하고 계속 인사했거든. 근데 이젠 또 어디 의원이랑 저녁 먹는대. 건오 너도 저녁 먹어야지.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푸념을 늘어놓은 뒤, 잊지 않고 건오의 식사를 챙겼다.
날카롭던 건오의 눈매가 스르르 풀어졌다. 하람은 턱을 괴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먹어야죠. 금방 또 가야겠네요.”
-응. 지금 바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럼 이따 전화해요.”
-응. 저녁 꼭 먹어.
다봄은 마지막까지 당부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하람은 통화 내용을 듣지 못했지만, 다 알고 있다는 듯 팔짱을 꼈다.
건오가 하람을 보며 눈썹을 으쓱였다.
“왜.”
“네가 언제 말해 주려나 싶어서.”
“굳이 내 입으로 듣고 싶으면 더 기다려.”
“언제까지?”
하람은 관심 없는 투로 말했지만 누구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억지로 궁금증을 감추는 하람을 모르는 척하며, 건오가 한 박자 쉬고 답했다.
“결혼 허락받을 때까지.”
하람은 무심코 욕설을 흘렸다.
그는 담백한 건오의 얼굴을 보며 방금 들은 말을 되새긴 뒤 미친놈을 보듯 건오를 보았다.
“언제 얘기가 거기까지 된 건데?”
“처음부터.”
“연다봄도 미친 거 아니야? 선을 본 것도 아니고 무슨 결혼 약속부터 하고 만나?”
다봄에게 결혼은 헤어지지 않는단 약속이었다. 그걸 모르는 하람은 다봄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그의 눈에는 말도 안 되는 일 천지였다.
“야, 나는 네가 전화하는 걸로도 그 꼴이라 잘못 짚었나 싶었다. 대체 왜 아직도 짝사랑처럼 굴고 있는 거야?”
“관성인가 보지.”
건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순간, 하람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는 건오와 다봄의 상황과 오늘 일을 복기해 제삼자의 시선으로 돌려 보았다.
그러곤 섣부르게 내뱉은 질문의 답을 스스로 찾았다.
‘불안한 것도 관성이라면 관성이지.’
하람은 제 친구놈의 순탄한 연애를 위해, 제게만 어떤 연락도 없는 누나에게 친히 메시지를 보냈다.
[백건오 오늘 고백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