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 (48/72)

48.

승훈과 진서의 맞은편에 앉은 후부터 다봄의 말수가 줄었다.

영화는 재밌었냐는 질문에도, 사람이 많았냐는 질문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진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과 다른 다봄의 모습이 의아하기만 했다.

“많이 먹어. 승훈이가 산대.”

진서가 다봄의 앞에 접시를 놓아 주며 다시 말을 걸었다. 평소 같았으면 엄청나게 먹겠다며 주문을 더 했을 다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승훈은 동생의 저런 모습이 익숙했다.

“누가 혼낸대?”

“아니?”

승훈이 운을 떼자 다봄이 재깍 대답했다. 그는 태연하게 동생을 몰아갔다.

“근데 왜 눈치를 봐?”

“내가, 언제?”

다봄이 부자연스럽게 되묻자마자 통화를 하고 온 건오가 나타났다.

여러모로 어설픈 다봄과 달리 건오는 여유로워 보였다. 긴장을 숨기는 것쯤이야 그에겐 일도 아니었다.

진서가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건오는 토요일인데도 바쁘네.”

건오는 제 앞에 놓인 새우 죽을 다봄 앞에 놓아 주며 답했다.

“연하람이었어요. 저녁 먹고 오냐고 물어봐서.”

다봄은 당연하게 그의 몫을 가져가며 진서의 말에 보탰다.

“이리 오라고 하지.”

“귀찮대요.”

“아아.”

다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죽부터 떠먹었다.

그게 뭐라고, 건오는 조금 더 그녀를 지켜보다 젓가락을 들었다.

지금껏 유별났던 건오의 시선을 돌이켜 본 진서는 웃음을 참았다.

어떻게 이렇게 재밌는 관계를 앞에 두고 몰랐을까.

“마실래?”

“응.”

다봄은 승훈이 내미는 술을 받아 들었다.

가족끼리 종종 술을 마셔서 이 상황이 이상하거나 낯간지럽지 않았지만, 지금 다봄은 온몸이 민망함으로 뒤덮인 기분이었다.

“건오는?”

건오도 긍정의 뜻으로 승훈 앞에 술잔을 내밀었다.

건오의 잔이 채워지는 동안 다봄은 무심코 먼저 잔을 비웠다.

“봄아, 그렇게 마시고 싶었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다봄 덕에 진서는 결국 키득거렸다.

다봄도 제 행동이 멋쩍었는지 머리를 긁적이고는 스스로 두 번째 잔을 채웠다.

“아니, 다 맛있어서.”

“뭐가. 두부가?”

“어어.”

“괜찮아. 괜찮아. 뭘 잘못했다고 그래?”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한 진서가 아무 말이나 하는 다봄의 앞에 연두부 튀김을 밀어 주었다.

승훈은 다봄이 배를 채울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술잔을 비웠다.

그의 대각선에 앉은 건오는 형을 따라 잔을 비웠고, 승훈이 건오의 잔을 채워 주기를 반복했다.

“둘이 그만해.”

진서가 무척 웃기다는 얼굴로 승훈을 만류했다.

그는 진서가 건네준 참치를 먹고선 다봄을 보았다.

“얘랑 결혼도 할 거야?”

몇 단계를 건너뛴 질문이 훅 들어왔다. 승훈은 이 질문을 위해 술을 마신 것이었다.

다봄은 동그랗게 뜬 눈을 도르륵 굴려 건오를 올려다보더니 대답을 미루고 술잔을 비웠다.

다봄의 침묵이 이어지자 그녀를 보는 건오의 시선이 점점 짙어졌다.

그럼에도 그녀가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만 있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진서까지 괜히 긴장됐다.

기묘한 분위기가 그들 위로 내려앉았다.

“내가 따라 줄게.”

마침내 입을 연 다봄은 비어 있는 승훈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빈 술잔도 내밀었다.

“나도 따라 줘.”

“그래.”

겉으로만 보면 여기서 애가 타는 이들은 건오와 진서뿐이었다.

남매는 다봄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들 옆에서 나란히 술잔을 비웠다.

곧 다봄은 살짝 무거워진 눈을 똑바로 들었다.

“걱정돼?”

“응.”

승훈은 빠르게 대답했다.

“뭐가?”

“건오가 밀어붙여서 따라가는 건 아닐까, 뭐 그런 것들.”

승훈의 걱정은 현실적이며, 이제껏 두 사람을 지켜봤다면 응당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건오는 승훈의 질문이 불편했다. 정곡이 찔린 탓일지도 모른다.

건오가 밀어붙인 건 사실이라 다봄은 그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탓에 건오의 눈빛이 점점 가라앉았고, 옆에서 보고 있던 진서는 급격히 자리를 뜨고 싶었다.

“연다봄.”

“어, 응?”

승훈의 부름에 다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녀는 자신이 말을 멈추고 있단 것도 이제 알았다.

본인에게 집중된 시선도 뒤늦게 깨달은 다봄은 경직된 테이블 분위기와 동떨어져 혼자 부스스 웃었다.

“오빠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

지금 다봄이 짓는 미소만으로 승훈은 그녀의 대답을 알 수 있었다.

“근데 나는 건오가 밀어붙여 줘서 고마워.”

다봄은 언제 경직되었냐는 듯 수줍어하는 얼굴로 천천히 얘기했다.

승훈은 제 동생의 그런 모습이 여전히 어려 보여 가슴이 철렁했다.

“결혼에 적극적이지 않은 남자랑 어떻게 평생 살아? 그렇지, 언니?”

“그럼. 물론이지.”

갑자기 날아든 질문이었지만 진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전적으로 동의했다.

결혼에 미지근하다는 건, 다봄에게는 평생 연애만 하자는 소리와 같았다.

“나 얘 없으면 못 살아, 오빠.”

다봄은 뺨이 새빨개지지도 않고 당연한 명제를 말하는 것처럼 못 박았다.

승훈이 눈썹을 모으고, 진서는 드디어 마음 놓고 하하 웃었다.

“여보는 무슨 돌이라도 씹은 것 같잖아. 그러지 말고 애들 축하해 줘야지.”

“얘네 연애도 제대로 안 했어. 그래 놓고 결혼한다 어쩐다 하잖아.”

“결혼하고 연애하면 됩니다.”

진서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대꾸한 건오에게 흐뭇한 얼굴로 엄지를 척 내밀며 술을 따라 주었다.

승훈은 동생을 보며 술잔을 비웠다.

조금 전까지 애정 가득한 말을 태연히 했던 다봄은 건오의 말에 무척이나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자, 그만 무게 잡아. 아까는 건오라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진서가 남편의 허리를 쿡쿡 찔렀지만, 승훈은 말없이 한 잔을 더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당을 벗어난 그는 흡연 구역 구석에 자릴 잡고 라이터를 딸깍거렸다.

다봄이 저렇게 직접적인 말을, 저런 표정으로 할 줄 몰랐다.

승훈은 기분이 마냥 좋진 않았다.

참 아이러니했다.

진서의 말처럼 다른 누구도 아닌 건오라 진심으로 안도했는데, 이 씁쓸한 심정 역시 진심이었다.

“그나마가 뭡니까?”

승훈을 따라 나온 건오가 그 옆에 앉았다.

승훈이 라이터를 집어넣었다.

“그나마라고 해 준 게 어디야.”

“형이 절 봐 온 게 20년인데, 다른 놈들하고 똑같이 보시면 안 되죠.”

“다른 놈들이었으면 이렇게 나란히 앉지도 않았어.”

둘밖에 없는 흡연 구역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승훈은 담배로 향하려는 손을 연신 잠재웠다. 담배 냄새가 밴 채 안으로 들어가면 진서가 싫어할 터였다.

“근데 넌 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냐?”

“설마요.”

“그래?”

승훈은 벽을 보며 조금 전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건오가 없으면 못 산다는, 승훈이 듣기엔 아주 파격적인 표현을 다봄이 했을 때였다.

그 순간 가라앉아 있던 건오의 눈이 파도에 휩쓸리듯 물결쳤다. 입술을 꾹 문 녀석은 분명 복잡한 감정을 참아 내고 있었다.

“부모님께는 언제 말씀드릴 생각인데?”

“누나랑 상의해서요.”

“연하람은 알아?”

“말은 안 했는데 알고 있을 거예요.”

하긴. 같이 사니 어떻게든 티가 났을 것이다.

승훈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건오를 보았다. 건오도 승훈이 자신을 보는 걸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카페에선 건방질 정도로 단언했던 건오는 그때와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너희 싸웠다고 헤어지지 마.”

“제가 감히.”

어떻게 누나랑 싸워요.

건오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승훈과 그는 동시에 피식 웃었다.

그들이 자리로 돌아왔을 때, 다봄과 진서는 실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딱 봐도 취기가 오른 게 보여 승훈은 대놓고 혀를 찼다.

진서는 다봄만 만나면 높은 확률로 취했다. 오늘도 그 확률을 높이는 날이었다.

“귀여운 다봄이. 예쁜 다봄이. 진짜 누구 옆에 세워도 아까울 것 같았는데 건오라니. 건오면 말이 달라지지.”

“건오야. 내가 계산할 테니까 네가 대리 좀 불러 줘라.”

“형수님 차는요?”

“나중에 가져가지 뭐.”

진서는 건오의 자리를 차지하고 다봄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자리를 잃은 건오는 진서의 자리에 앉아 대리를 부르곤 맞은편의 두 사람을 구경했다.

“봄이가 남편보다 더 예뻐.”

“오빠보단 예뻐야지, 언니.”

“그래? 아니야. 그거 쉬운 거 아니다, 봄아?”

“정말? 난 평생 오빠보다 예뻤는데?”

가족들이 진서의 주접에 익숙해질 정도로 그녀는 다봄에게 예쁘단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건오도 진서의 주정을 익숙하게 흘려듣고 있는데, 다봄이 문득 그를 보았다.

“많이 먹었어?”

술기운이 오른 다봄은 눈매를 접으며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물었다.

그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드는 감정이 그의 속 안에서 마구 뒤섞였다.

“왜 그래, 건오야. 어디 아파?”

술을 마셨어도 그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다봄은 걱정스레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닿기 전에 계산을 마친 승훈이 돌아왔다.

“대리 불렀어?”

“네.”

“오면 나가자.”

다봄은 슬그머니 손을 거두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건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연다봄은 네가 챙겨. 이 상황은 뭐, 익숙하네.”

대리 기사가 온 뒤 승훈은 진서를 챙겨 자리를 떠났다. 다봄은 건오가 어련히 알아서 잘 챙기리라는 걸 알기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차에 올라탄 승훈은 그나마 건오라 다행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한편 아직 식당에 남은 다봄은 장어 요리를 가리켰다.

“아까워서 일어날 수가 없는데.”

“술이 아까운 게 아니라요?”

다봄은 배시시 웃으며 술잔을 다시 채웠다.

말릴까 말까 망설이던 그는 결국 제 잔도 채웠다.

“여기 다른 음식도 맛있을 것 같던데, 우리 하나만 더 시킬까?”

다봄이 제안하자마자 건오는 직원을 호출해 다시 메뉴판을 받았다.

11시가 넘어서야 두 사람만의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그는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다봄 곁에 있을 때 그의 시간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갔다. 어릴 때부터 그걸 체감하며 자란 건오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귀한 시간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역시 어디 아프지? 그냥 들어갈까?”

다봄이 또 걱정스럽게 다가왔다.

건오의 귀에 그녀의 질문과 조금 전 말이 엉켜 들렸다.

‘나 얘 없으면 못 살아.’

진서와 승훈은 다봄의 표현에 놀랐지만, 건오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물론 놀라지 않았다고 해서 황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는 황홀했고, 동시에 불안했다.

건오는 다가오는 다봄의 손을 당겨 그녀를 감쌌다. 그가 뭘 하려는 건지 깨달은 다봄이 놀라 물었다.

“여기서?”

건오가 대답 없이 고개를 비틀며 다가오자, 다봄은 큰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이 닿고, 호흡이 뒤엉켰다.

그의 손가락이 다봄의 손바닥을 어루만졌다. 연약한 곳을 훑는 손길이 농밀했다.

그는 바르작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안아 숨 쉴 틈 없이 혀를 얽었다.

다봄은 호흡이 가빠지는데, 그는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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