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47/72)

47.

다봄이 진서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다봄의 시선은 조금 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다봄은 승훈 편을 드느니 무슨 말이라도 거들어 주고 싶었지만, 목덜미를 긁적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 여기에 없어야 할 목소리가 다봄을 대신했다.

“당연히 유죄지.”

다봄과 진서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틀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카페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발걸음에 분한 기색을 담아 묵직하게 걸어왔다.

진서는 갑자기 나타난 남편을 올려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왔어?”

“차 타고.”

“왜?”

“왜? 꼭 여기까지 내가 찾아와야겠어?”

“누가 찾아오랬나, 뭐.”

승훈은 한숨을 쉬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아내 옆에 앉았다. 그러곤 제 맞은편에 앉은 건오를 눈으로 가리켰다.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쟤가 너 데려가래.”

“어머.”

진서는 손으로 입술을 우아하게 가렸다. 그녀는 상황에 맞지 않게 아주 능글능글한 눈빛으로 건오를 흘겨보았다.

“그렇게 티 내 주면 눈치 못 챌 수도 없잖아.”

진서는 신경질 난 남편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즐거워했다.

승훈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아내를 붙잡았다.

“이만 가자.”

“나 커피도 다 안 마셨어. 여보도 한 잔 시켜 줄게. 건오 오랜만에 보는데 좀만 더 얘기하자.”

진서는 빠르게 지갑을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어도 밤새 자신을 기다린 남편이 또 여기까지 달려온 것에 기분이 풀린 그녀가 커피를 추가로 주문하는 사이, 승훈은 진서를 보던 게슴츠레한 눈으로 동생을 보았다.

“연하람은?”

“몰라.”

“몰라? 너한테 동생이 하나야? 왜 건오랑만 놀아.”

“어…… 그러게.”

승훈은 다봄의 애매한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다봄의 핸드폰을 턱짓했다.

“셋이 영화 예매했다며. 연락해서 진서 자리에 연하람 앉혀.”

“형.”

건오는 한없이 낮아진 목소리로 승훈을 부르자, 건조하지만 날카로운 승훈의 눈이 건오를 향했다.

건오는 눈가를 꾹 누르며, 저 부부가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눌렀다.

곁에 있던 다봄이 움찔했다. 두 사람 사이 공기가 달라진 걸 그녀도 느꼈다.

“왜 그래?”

다봄은 무심코 건오의 옷소매를 슬그머니 잡았다.

그걸 발견한 승훈이 미간을 모으고 동생을 보는데, 커피를 가지고 온 진서가 남편 앞에 커피를 놓았다.

“하람이 쉰대.”

진서는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아까 다봄이 준비할 때 전화해 봤어.”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 다봄과 건오는 침묵했다.

“그래?”

“그래.”

“확실해?”

“확실하고 말고 할 게 어딨어? 커피 마시다가 애들 영화관 보내고 우린 집으로 가자.”

진서가 승훈을 보며 예쁘게 웃었다.

그 순간 차가웠던 승훈의 표정이 힘없이 풀어졌다. 승훈도 제 변화를 느끼고 커피를 마셨다.

다봄은 건오를 곁눈질했다. 다시 식은 커피를 들이켜고 있던 그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건오는 눈으로 이유를 물었고, 다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진서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근데 건오는 대체 언제 여보를 여기로 부른 거야?”

“1시간 전에.”

승훈은 피곤하다는 듯 답했다.

1시간 전이라면 셋이 아직 식당에 있을 때였다. 먼저 식사를 끝낸 건오는 다봄과 진서가 밥을 먹을 동안 승훈을 호출했던 것이다.

“건오가 뭐라고 그러면서 불렀어?”

“대뜸 나보고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잖아. 하여튼 많이 컸어, 백건오.”

“건오 30살이야. 다 컸지. 장가보내도 되겠어.”

진서가 턱을 괴고 다봄과 건오를 번갈아 보았다.

“맞다. 봄이 대만 다녀왔다며. 일은 잘되고 있어?”

“아, 응. 언니랑 오빠 선물도 있는데.”

“뭘 또 사 왔어. 그냥 다녀와도 되는데. 그래서 선물은 어딨어?”

대화 주제가 시시각각 바뀌었다.

두 남자는 다봄과 진서가 수다 떠는 걸 가만히 들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다 커피가 식자마자 한 번에 잔을 비운 승훈은 건오에게 신호를 보냈다.

카페 뒤로 나간 승훈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필래?”

“아뇨.”

“왜?”

“누나가 싫어해서.”

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카페 안으로 보이는 진서를 돌아보고는 담배를 도로 넣었다.

“둘이 영화를 왜 봐?”

“언제부터 우리가 영화 보는 데 이유가 있었어요?”

“그래. 이유를 물으면 안 되는데.”

오늘따라 진서는 즐거운 시선으로 다봄과 건오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서 승훈도 번갈아 보았다. 그 덕에 눈치챌 수 있었다.

승훈은 건오의 마음을 알았지만, 다봄의 마음도 알기에 크게 걱정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걱정이 되었다. 오늘 다봄과 건오는 확실히 묘했다.

“안 돼.”

“안 된다고 하기엔 너무 늦었어요.”

결국 승훈은 넣어 두었던 담배를 다시 꺼내고 말았다.

직접 묻기 전까진 설마 싶었는데, 건오는 빠르게 둘 사이를 긍정했다.

승훈은 물고 있는 담배 끝을 잘근 씹었다.

“알고 계셨잖아요.”

“쌍방은 얘기가 다르지.”

“그러니까 늦었다는 거예요. 말리려면 일방적일 때 말리셨어야죠.”

건오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어서 승훈은 한동안 담배만 피웠다.

건오도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이런 말을 들을 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들으니 예상한 것보다 속이 쓰렸다.

“혹시나 형이 후회할까 봐 드리는 말씀인데.”

승훈이 건오를 향해 몸을 틀었다. 담배 연기가 그들 사이를 갈랐다.

“언제 말렸어도 제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승훈이 눈치챈 건 건오가 짝사랑을 진행한 지 이미 10년이 넘었을 때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은 나이 차이가 꽤 났고 승훈은 선수 생활을 하느라 어릴 때부터 바빴다.

그가 여유를 찾았을 땐, 이미 건오의 어리숙한 마음이 자리 잡은 지 한참이 지난 뒤였다.

“오히려 말리셨으면 더 빠르게 진행됐을 수도 있고요.”

반골 기질이 다분한 건오의 말을 들으며 승훈은 담배꽁초를 버렸다.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 대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언제부터 만났어?”

“얼마 안 됐어요.”

“그런 것 같네.”

조심스러운 다봄의 모양새가 그래 보였다.

“얼마 안 됐는데 이런 말 하기 미안한데.”

“이미 미안해하실 말 하셨어요.”

승훈과 건오는 어느새 비딱한 상태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건오는 상대가 하람이 아니고 승훈이기에 성질을 죽이고 있었다. 승훈은 그걸 알고도 개의치 않았다.

“너희 헤어지면 뒷감당은?”

“안 헤어져요.”

예상을 빗나가지 않은 질문이기에 건오는 즉답했고, 승훈 역시 예상 그대로의 대답에 인상을 썼다.

“넌 서지한 같은 존재가 아니야.”

건오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오늘만 두 번이나 거슬리는 이름을 들었다.

“너희가 헤어지면 너무 복잡해져.”

“왜 헤어질 걸 가정하는 겁니까?”

“그러게. 결혼은 더 상상이 안 가서 그럴지도.”

“그 상상도 안 되는 짓을 할 겁니다.”

승훈은 건오의 짧은 말을 몇 번은 곱씹었다. 그가 건오의 말뜻을 완벽히 이해하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승훈이 비로소 받아들였을 때, 건오는 기다렸다는 듯 부연했다.

“길게 끌지 않을 겁니다.”

“백건오.”

“그렇지 않아도 전 오래 기다렸거든요.”

건오의 눈빛은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 아니, 사냥감을 쫓는 맹수와 비슷했다.

다봄과 승훈은 연인 관계로 지내다 마지막 순간이 오는 것을 걱정했다.

그건 건오라고 다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그는 그 가정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싫을 만큼 마음 졸이고 있었고, 승훈이 건드리자 불안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 찰나, 승훈은 그의 불안과 더불어 거기서 비롯된 간절함까지 엿보았다.

“왜 갑자기 그렇게 봐요?”

“내가 어떻게 봤다고 그래?”

“불쌍하게 보셨습니다.”

건오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승훈은 부정도 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였다.

“형은 그냥 형수님만 데리고 가 주세요.”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울컥한 건오를 보고도 승훈은 자신의 말을 바꾸지 않았다. 건오가 결혼을 입에 올린 순간 문제의 초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네가 결혼을 상상하게끔 만들어 봐. 그 정도는 해야지.”

승훈은 눈썹을 으쓱이고는 먼저 카페 안으로 들어가 진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서는 영문도 모르고 남편의 손을 잡았다.

“차 어딨어?”

“다봄이네.”

승훈이 다봄을 향해 통보했다.

“잘됐네. 각자 놀다 저녁에 밥이나 먹자.”

마침 카페 안으로 건오가 들어왔다.

다봄은 대답하기 전에 그를 돌아보았고, 건오는 표정으로 답했다.

승훈의 마지막 말이 때문에라도 그는 승훈의 제안에 응해야만 했다.

* * *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러게요.”

영화관에 들어서며 건오는 눈썹을 문질렀다.

처음엔 짜증만 나던 승훈의 대답이 슬슬 부담으로 다가왔다.

승훈이 다봄의 오빠로서 말하니, 건오도 그가 형이 아니라 온전히 그녀의 오빠로 보였다.

“저녁 안 먹고 그냥 돌려보내도 될 것 같아. 내가 말할까?”

다봄은 건오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 먼저 운을 띄웠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다봄은 한 번 더 물어보았다.

“그렇게 보내도 괜찮아. 오빠는 별생각 없을 거야.”

승훈은 별생각이 많아서 승훈답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고, 그렇게 말하는 다봄이야말로 별생각이 없었다.

개중 가장 생각이 많은 건오는 단호하게 답했다.

“아뇨.”

상영관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그가 덧붙였다.

“그래도 둘이서만 못 노는 게 아쉬우니까 대신 자고 갈게요.”

다봄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소리를 낮춰 나무랐다.

“그런 걸 왜 여기서 말해.”

“그럼 어디서 말할까요?”

건오가 웃으며 다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온기 덕에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어디서든! 둘만 있을 때 말해야지.”

건오는 그를 탓하는 다봄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다봄은 또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화라도 둘이 봐서 다행이에요. 형수님 계시면 이런 것도 못 했을 텐데.”

건오는 제가 입술을 갖다 댄 다봄의 손등을 엄지로 문지르며 속삭였다. 다봄은 더는 뭐라 하지 못했다.

곧 그녀의 붉어진 뺨이 어두워진 상영관 조명에 가려졌다. 그는 그게 못내 아쉬워 영화가 시작되고도 얼마간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 * *

긴 영화가 끝났을 땐 진서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어? 나 여기 알아.”

다봄은 진서가 보내 놓은 일식집 주소를 확인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취향에 맞는 영화를 보고 기분이 좋아져 재잘거리는 다봄 옆에서 건오는 목을 매만졌다.

넥타이를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넥타이를 맨 기분이었다.

“가자. 영화관이랑 가깝다.”

“누나.”

다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건오는 그녀도 느낄 만큼 어딘가 모르게 경직되어 보였다.

“왜? 역시 우리끼리 놀까?”

염려하는 다봄에게 건오는 침착하게 일러 주었다.

“형이 눈치챘어요, 우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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