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 (46/72)

46.

밥 먹고 영화를 본다.

보통 연인에게 익숙한 데이트 코스지만, 건오와 다봄 사이에도 이상하지 않은 코스였다.

진서도 그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뭐 보기로 했어, 다봄아?”

“저번 주에 개봉했다는 전쟁 영화 있다고 해서 그거 보려고.”

영화 제목도 모르는 다봄은 멋쩍은 듯 답하며 부엌에서 슬그머니 나왔다.

움직임이 왠지 모르게 어색한 그녀를 보며 진서가 잘됐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나도 그거 보려고 했는데!”

순간 다봄의 시선이 건오에게 닿았다.

진서는 그녀의 눈길을 놓치지 않으며 해맑게 제안했다.

“같이 밥 먹고 영화 보면 되겠다. 그렇지?”

“표는 두 장이에요.”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재깍 돌아온 에두른 거절에 건오를 등졌던 진서는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몇 시 영화인데?”

“4시 영화요.”

“그래? 나는 못 보는 거야?”

진서가 실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건오는 그렇다는 뜻으로 무뚝뚝하게 눈썹만 으쓱였다.

둘 사이에 신경전 아닌 신경전이 오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서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나중에 봐야지, 뭐.”

그리고 다봄은 더욱 불편해졌다. 이렇게 되면 진서만 두고 둘이서만 노는 게 되지 않나.

다봄은 건오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저어 버렸다.

“아니야, 언니. 자리는 취소하고 다시 예약하면 되지.”

“아! 그러면 되겠구나. 우리 다봄이, 똑똑하다니까.”

역시.

진서와 건오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지만,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진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활짝 웃었고, 건오는 입가를 움찔하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고 말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봄과 진서는 그의 반응을 보지 못했다.

“언니, 뭐 먹고 싶어?”

“내가 얼마 전에 부대찌개를 먹었는데 그게 자꾸 생각나네. 우리 부대찌개 먹으러 가자. 이 근처에 맛있는 데 있어? 회사 근처라 식당 많을 것 같은데. 어때?”

“생각나는 데 있긴 있어. 근데 언니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다. 건오는 어때?”

다봄이 건오의 의견을 물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괜찮다며 짧게 대답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진서의 재촉이 들려왔다.

“다행이다. 그럼 다봄인 얼른 들어가서 머리 말리고 옷 갈아입어.”

다봄은 방으로 들어가며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다봄에겐 아침이나 다름없는 이때, 건오와 진서와 함께 회사 근처 골목 부대찌개 집에 가게 되었다.

“그럼 좀만 기다려.”

“그래. 건오랑 나는 표 다시 예약하고 있을게.”

“으응.”

다봄은 눈동자를 몇 번 굴리다 문을 닫았다.

거실엔 표정이 대비되는 두 사람만 남았다.

이성적으로 영화를 취소하고 다시 예약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그는 말없이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다봄은 방 안에서 이마를 짚었다.

“으으. 난 몰라.”

건오는 이 전개가 못마땅한 모양이었지만, 지금 다봄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전의 그녀였다면 분명 이렇게 했을 것이기에 사귄다는 걸 밝히지 않는다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건오도 그걸 알고 있었다.

“내가 끼어도 괜찮지?”

예약을 다 하고도 다봄의 방문이 열리지 않자, 진서가 건오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어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단둘이 할 얘기가 많은 사이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단둘이 얘기할 만큼 서로에게 궁금한 게 없었다.

그러나 오늘 둘의 생각이 바뀌었다.

“괜찮고 말고요. 형수님은 형이랑은 왜 싸우셨다고요?”

“아, 이따 다봄이 있을 때 얘기해 줄게. 두 번 말하자니 또 화날 것 같아서. 건오 너는 언제 봄이 집에 온 거야?”

“조금 전에요.”

질문이 한 번씩 오갔다.

진서의 눈이 빠르게 감았다 떠지고, 건오는 차분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하람이는 일해?”

“글쎄요. 쉬고 있지 않을까요.”

“아아. 하람이 없이 혼자 있어서 물어봤어.”

“제가 왜 왜 혼자 왔을까요?”

진서가 은근히 건오를 떠보자, 그는 의뭉스럽게 되물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진서는 아리송했다.

여유로운 그의 태도를 보자면 다봄과 건오를 두고 제가 엄한 상상을 한 것 같은데, 또 그렇게 생각하기엔 녀석의 눈이 묘하게 보이고.

“연하람보다 제가 누나랑 친하잖아요.”

이 순간엔 그가 덧붙인 말도 상상의 여지가 다분한 것처럼 들렸다.

진서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그 동조의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잠시 멈췄다.

그들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 다른 곳만 보았다.

의심과 고민이 가득한 진서와 다르게 건오는 은근히 입꼬리를 올린 채 만족스러운 낯을 했다.

건오는 갑자기 나타난 진서가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의심은 반가웠다.

진서는 하람 없이 이곳에 온 건오를 이상하게 보고 있고, 다봄과 둘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것에 놀랐다.

그들을 누나와 동생 사이보다 다른 성별을 가진 각각의 개체로 인식했다.

하람과 승훈이 무의식중에 외면하려는 사실을 그녀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재밌겠어요.”

“뭐가?”

진서는 지레 놀랐다.

다봄과 건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가능성을 상상하던 중이었다.

흠칫하는 그녀를 보며 건오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누나와 형수님이랑 노는 거요.”

“어…….”

진서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건오가 나른한 얼굴로 웃은 탓이다.

“역시, 넌 변호사만 하기엔 겉가죽이 너무 아깝단 말이야.”

“그래요?”

“부끄러워하지도 않네. 승훈이도 그러는데. 하긴 어릴 때부터 그런 얼굴로 자라면 익숙해지긴 하겠다.”

“오빠는 뻔뻔한 거지.”

마침 준비를 마치고 나온 다봄이 끼어들었다.

진서가 반죽 좋게 받아쳤다.

“잘생겨서 모델로 세운 거 아니야?”

“말도 안 돼. 혹시나 오빠한테 그런 말 하지도 마, 언니.”

“같이 세워 놓은 지한이도 잘생겼길래 난 또 외모로 뽑은 줄 알았지.”

승훈을 안주로 두어 싱글벙글하던 다봄의 안색이 단숨에 바뀌었다.

그 변화를 마주한 진서는 곧장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입을 합 다물었다.

당황한 다봄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갈까?”

* * *

셋은 아파트를 나와 나란히 걸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아리송했다.

진서는 다봄의 눈치를 보며 자꾸 말을 걸었다. 그리고 다봄도 건오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걸 알아채 버렸다.

그것만으로 둘의 관계를 직감한 진서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언니?”

다봄은 골목 가운데 선 진서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아니야.”

진서가 멍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다봄과 건오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대답도 듣지 않았지만, 진서는 본능적으로 둘 사이를 확신했다.

“괜찮아?”

다봄이 걱정스레 물었다.

“벌레가 날아들어서.”

“진짜?”

“응. 얼른 가자.”

다봄은 진서를 가운데 세우고 이끌었다.

진서는 기꺼이 가운데 섰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식당에 도착한 진서는 다봄 앞에 자리를 잡았다. 당연하게 건오는 다봄의 옆에 앉았다.

주문을 마친 진서는 시누이를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언니, 왜 혼자 웃고 그래?”

“다봄이가 너무 예뻐서.”

“뭐야.”

진서의 주접이 익숙한 다봄은 뜬금없는 말에도 그저 눈썹을 모으며 웃었다. 그 정도로 진서는 평소 다봄에게 예쁘다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진서는 살면서 자고 일어나서도 예쁜 사람을 딱 두 명 보았다.

그게 남편과 남편의 여동생이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예쁜 다봄을 보며 놀라곤 했는데, 그 놀라움은 지금까지 계속되었다.

“얼른 먹자. 다봄이, 건오 둘 다 많이 먹어.”

“언니도.”

신나게 대답한 진서는 점심을 먹으며 동생들을 번갈아 살폈다.

진서가 하도 흐뭇하게 바라보는 탓에 다봄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그녀가 또 민망한 말을 할까 봐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 노골적인 시선은 카페에서도 이어졌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결국 다봄 대신 건오가 먼저 돌려 물었다.

지금껏 진서에게 이런 눈빛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건오는 그녀의 시선이 제게도 뻗치는 게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거기다 대고 진서가 해맑게 받아쳤다.

“잘생김이 묻었지.”

그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외모 칭찬이야 익숙하다지만, 이런 놀리는 농담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표정이 절로 굳었다.

물론 진서는 개의치 않았다.

“내가 감이 죽었었지.”

웬만한 놈에게 다봄을 붙여 주기 아까워 그나마 고르고 골라 연결해 주려 했던 게 지한이었는데, 이제 보니 지척에 짝을 두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분위기가 서로 비슷해졌기 때문인지, 나란히 서 있는 건오와 다봄은 상당히 잘 어울렸다.

“언니, 근데 오빠랑 왜 싸웠어?”

건오의 표정을 살핀 다봄이 대놓고 화제를 바꿨다.

동생들에게 집중하던 진서는 승훈의 이름이 나오자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반응했다.

“얘들아,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그제 지방에서 올라와서 어제 회식이 있었단 말이야. 근데 배터리가 없었어. 그래도 마지막까지 연락도 잘했는데, 막 화를 내는 거야.”

“오빠 이상하다. 회식하다가 배터리가 없을 수도 있지.”

“그렇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차가운 시선으로 날 보는데, 없던 숙취가 생기는 것 같았다니까!”

“오빠가 뭐라고 했어?”

“생각이 없는 거 아니냐면서…….”

진서의 토로가 시작되자 다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애초에 그 수다에 낄 생각이 없었던 건오는 다봄의 옆에서 조용히 커피나 마셨다.

“오빠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 말이! 그럴 수도 있지! 건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지만 진서가 건오에게 동의를 구하는 바람에 건오에게 시선이 모였다. 방관하던 건오는 대답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성질 급한 진서가 승훈에 관한 다른 욕을 시작할 무렵, 건오가 입을 열었다.

“형수님은 지난 상황을 어디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시죠?”

“음, 승훈이한테 배터리가 꺼질 것 같다고 연락한 것까지 기억나.”

“그게 몇 시죠?”

“새벽 1시쯤?”

“회식은 몇 시에 시작됐나요?”

“7시?”

“형수님은 언제 귀가하셨죠?”

“음…… 5시라고 했던 것 같아.”

“언니, 새벽 5시?”

다봄이 놀라 둘 사이에 끼어들었지만, 진서는 어깨만 으쓱였다.

건오는 질문을 이어 갔다.

“5시라고 누가 증언했나요?”

“증언……? 날 업고 온 후배가 그쯤이었다고 하니까 맞을 거야.”

“형수님을 업었다는 걸 보면 남자였겠네요. 승훈 형은 그때까지 형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나요?”

“그랬대. 근데 왜 나 취조당하는 것 같지?”

진서가 뒤늦게 말을 멈췄다.

건오는 다봄을 보며 고개를 까딱했다.

“어때요? 누나가 판결해 봐요. 유죄? 아니면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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