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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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늘봄의 월요일 오전 회의가 취소됐다.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직원들의 관심은 예고 없이 들이닥친 세무조사에 쏠려 있었다.

“회계팀이 발칵 뒤집혔대.”

“그럴 만도 하지. 특별 세무조사가 웬 말이야.”

정기 세무조사를 받은 게 2년 전인데, 느닷없이 제보가 접수됐다며 국세청에서 조사관이 파견되었다.

<늘봄, 국세청 특별세무조사 받아>

어떻게 알았는지 오전이 지나기도 전에 짤막한 인터넷 기사까지 나갔다.

그런데 이 소식에 늘봄 직원들보다 연광 직원들이 더 동요했다.

이미 권력 교체를 예감한 그들은 누가 누구와 커피를 마시는지, 누가 누구와 담배를 피우러 가는지, 회장과 사장의 사이는 어떤지 예의주시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늘봄 세무조사 기사가 나가고, 연주혁 대표가 아버지 연일석 회장을 찾아갔다.

곧 주혁 옆에 붙은 사람들 이름이 직원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그 시각, 다봄은 비서에게 일정을 확인했다.

“저 수요일 오후에 스케줄 없죠?”

“잠시만요. 네, 없습니다.”

“그러면 수요일 오후 2시와 4시에 오늘 미뤘던 회의 잡아 주세요. 전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다봄은 유독 지친 목소리로 지시한 뒤 사무실을 벗어났다.

예고도 없이 방문한 조사관은 회계팀은 물론 9층에도 들어섰다. 그들이 받았다는 제보는 주혁을 겨냥한 게 틀림없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한 번, 아니, 두 번 추가해 주세요.”

차가운 커피를 받아 든 다봄이 카페 구석에 앉아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막 1시를 지나는 숫자 아래 건오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시간 나면 전화해요.]

커피를 쭉 들이켠 다봄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왜 벌써 1시지? 내 오전이 사라졌어.”

건오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봄은 가볍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런데 건오의 목소리가 다봄의 것보다 더 무거웠다.

-고생했어요.

“벌써 기사 본 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다봄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입가에 머물렀던 미미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곧 연광 임시 주총이라서 그런가 봐.”

여기서 많은 얘기를 할 수는 없어 그녀는 딱 그 정도만 말했다.

그는 다봄의 한마디로 대강 상황을 파악했다.

-아버지가 힘드시겠네요.

조금 전, 조사관이 돌아가자마자 주혁은 제보자가 태철일 것이라고 특정했다. 하도 확신하는 탓에 되레 다봄이 주춤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보다는 주혁이 태철을 훨씬 잘 알고 있었다.

곧 있을 임시 주총을 둘러싸고 연광 내부에서 수많은 소문이 오갔다.

독보적이던 입지가 위태로워진 태철은 동생을 깎아내기 위해 여론몰이를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덕분에 주혁이 가지고 있던 티끌만 한 죄책감이 사라졌다.

“과연 힘드실까? 오히려 잘됐다며 독기가 바짝 올라 지금 연광에 갔거든. 그럼 나는? 내가 뒷수습 다 했어.”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다봄은 침착하고자 했지만 막상 얘기를 시작하니 침착할 수 없었다.

건오에게 태철과 주혁을 향한 울분을 토하고 있는 동안 카페 안엔 사람이 많아졌다.

웅성거리는 소음을 들으며 심호흡한 다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나도 모르게 흥분했다.”

-그럴 만한 얘기예요.

그녀가 멋쩍게 사과하며 컵을 반납하는데, 건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다봄은 그게 뭐라고 가슴이 간질거렸다.

“너 밥 먹어야지.”

-할 말 없어서 내 밥 챙기는 거 아니죠?

“아니야.”

-아니긴.

건오의 농담에 다봄도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카페를 들어갈 때만 해도 모든 고민을 다 끌어안은 것 같았는데, 그와의 통화가 끝날 때쯤엔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그건 건오도 마찬가지였다. 표정엔 변화가 없는데 그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막 건오의 사무실로 들어선 하람은 그 미세한 차이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적응 안 되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라.”

“그런 얼굴이 뭔데?”

“사람 같은 얼굴. 뭐가 됐든 티 내지 마.”

남들이 보면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를 말을 심각하게 뱉은 하람은 보란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건오에게 다가왔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표정도 영 떨떠름해 보였다.

건오는 하람의 기분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랐다.

그들은 근처 식당에 와 점심을 먹으며 승훈의 선배인 강필 코치가 전한 내용에 대해 상의했다.

“제자들이 잘못했다며 우니까 처벌하지 않고 싶다 하시더라고.”

강필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할 때부터 이렇게 흘러갈 걸 예상했던 하람과 건오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 외에도 다른 의뢰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끝낸 그들은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가 주문을 마쳤다.

“이제 우리 따로 사는 것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하람은 커피를 기다리며 벼르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건오는 덤덤히 응했다.

“아예 집을 내놓는 건 어때.”

“야, 근데 덥석 동의하니까 좀 그렇다?”

“먼저 말 꺼낸 게 누군데?”

“혹시 섭섭해?”

하람이 은근한 기대를 담아 질문하자마자 아메리카노가 준비됐다.

건오는 대답도 하지 않고 혼자 커피를 받아 갔다.

“저걸 친구라고.”

제 커피를 챙긴 하람이 건오의 뒤를 따라 걸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경멸하는 눈빛은 하람에게는 너무 익숙한 나머지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

* * *

혼란스러웠던 늘봄의 월요일이 어찌어찌 지나갔지만, 주혁과 다봄이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연광그룹 임시 주총을 앞둔 주혁은 임원들을 만나느라 내내 바빴고, 다봄은 주혁의 일까지 대신 처리하느라 정신없었다.

건오 역시 5월엔 재판 일정이 몰린 데다 새로운 의뢰가 계속 들어와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바쁜 일상은 당연하고 익숙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관계가 새로 정의되면서 건오는 이 익숙한 야근에 불만이 생겼다.

다봄을 마지막으로 본 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체감상 한 달은 되는 것 같았다.

“저녁은요?”

-거래처랑 광화문 쪽에서 먹기로 했어. 너는?

“전 연하람이랑 근처에서 먹었어요.”

금요일 저녁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내일은 주말이었다.

“내일 점심에 집으로 갈게요.”

-응. 맛있는 거 먹자.

금요일 밤이 되니 충분히 느린 건오의 시간이 더없이 더디게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그렇게 기다린 토요일이었다.

점심을 약속한 건오는 아침 10시부터 다봄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입차 알림에 놀란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비척비척 현관으로 걸어갔다.

“몇 시에 일어났…….”

길래 벌써 와?

다봄은 짧은 질문도 끝마치지 못하고 건오의 품에 안겨야 했다.

그는 그녀가 버둥거리고 나서야 팔에 힘을 풀었다.

“조금 더 자요.”

“잠 다 깼어. 씻고 와야지.”

“알겠어요.”

“그럼 풀어 줘.”

건오가 아쉬움을 누르고 겨우 다봄을 놓아줬다. 그녀는 그제야 방에 연결된 욕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 다봄은 같이 자란 건오가 5일 만에 어색해지기라도 한 듯했다.

심지어 캐주얼한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모습마저 오랜만인 것 같다.

분명 그는 대만에서도 편하게 입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새삼스러운지 이상한 일이었다.

다봄이 심각할 필요가 없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며 씻고 있을 때였다.

욕실 밖에서는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건오는 소파에서 일어나 끊기지 않는 진동 소리를 따라 걸었다. 좋지 않은 기억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힌 상태였다.

“흠.”

건오는 협탁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의 액정을 확인했다. 그 후에도 그의 미간이 펴질 줄 몰랐다.

때마침 욕실 물소리가 그쳤다.

“누나.”

“응?”

샤워를 끝내고 나온 다봄은 방에 들어와 있는 건오를 보고 살짝 놀랐다.

뭐라도 입고 있길 다행이었다.

“전화 왔는데, 형수님이에요.”

“진서 언니?”

젖은 머리를 털던 다봄이 손을 멈췄다.

그녀의 핸드폰이 재차 울렸다.

“네. 또 오는데 받을까요?”

지금 다봄과 건오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발신자가 지한이 아닌 건 참 다행이지만, 연달아 걸려온 진서의 전화 역시 이상하긴 했다.

일단 다봄은 핸드폰을 받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언니, 나 씻고 있었어.”

-봄아, 언니 너희 집 거의 다 왔어.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우리 집? 언니 서울이야?”

-응. 어제 왔어.

지방으로 출장을 갔던 진서가 갑자기 다봄의 집으로 오고 있단다.

당황한 다봄은 건오의 팔을 꽉 쥐었다.

“오빠랑 안 붙어 있고, 왜…….”

-승훈이랑 아침부터 대판 싸웠어. 친정이나 가려고 무작정 차 끌고 나왔는데, 정신 좀 돌아오니까 거긴 안 되겠더라고.

남편과 싸운 새언니는 친정 대신 시누이를 찾아오고 있었다.

다봄은 진서의 신선한 발상이 고마우면서도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으면 가서 요리나 해 줄게. 아, 전화 들어온다. 곧 봐, 봄아!

다봄과 건오는 통화가 끊긴 그녀의 전화를 내려다봤다.

건오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승훈 형은 왜 하필 오늘.”

“그러게.”

멍하니 동조하던 다봄은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다.

씻고 나온 모습으로 건오와 함께 있다면, 진서는 의심하지 않더라도 다봄이 민망했다.

하지만 그녀가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인터폰이 울렸다.

다봄은 해맑은 방문자를 보고 목덜미를 긁적였다.

“안 들키겠지?”

“누나만 진정하면요.”

건오는 긴장하지도 않는지, 너무나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덕에 다봄은 진정했지만, 실상 건오에게는 모처럼의 데이트가 무산된 상황에 들키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건오는 승훈을 떠올리며 처음으로 이를 갈았다.

곧 진서가 초인종을 누르고, 다봄이 문을 열어줬다.

“봄이가 벌써 씻다니. 일찍 일어났나 보네?”

“응, 언니. 대체 오빠랑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아니, 내가 어제 회식을 갔다가 핸드폰이 꺼졌는데…… 어라?”

천진하게 웃으며 다봄의 집에 입성한 진서는 익숙한 인영에 우뚝 멈췄다.

진서가 건오를 보고 멀뚱히 서 있자, 그가 그녀를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훈련은 잘 다녀오셨어요?”

“내가 훈련하는 것도 아닌데 뭐. 근데 건오야, 네가 왜 여깄어? 하람이도 있어?”

진서는 두리번거리며 하람을 찾았지만, 이곳에 남자 신발은 한 켤레뿐이었다.

진서의 눈동자가 다봄과 건오를 정신없이 오갔다.

“뭘 그렇게 놀라, 언니? 이렇게 된 거 같이 밥 먹자.”

다봄은 진서의 시선을 피해 부엌으로 향했다. 건오가 봐도 아주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하지만 진서에겐 영 아니었던 듯싶다.

“놀라지. 하람이도 없이 건오만 여깄는데. 그럼 원래 너희 나가서 먹기로 했던 거야?”

“아직 안 정했어.”

“무슨 일 있어? 건오 너 왜 혼자 여깄는 거야?”

진서는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계속해 물었다.

그녀가 이렇게 끊임없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던 다봄은 부엌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가족들에게 다봄과 건오가 함께 있는 모습은 장소를 불문하고 당연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진서는 승훈과 결혼한 지 고작 1년이 넘었다.

진서는 건오를 가족이라고 여겼다. 동시에 건오가 이 식구와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이라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무슨 일은요.”

건오의 대답은 짧고 담백했다.

만약 이 대답을 주혁이나 선하가 들었더라면 별생각이 없었겠지만, 진서에겐 토요일 오전에 아무런 용건도 없이 왔다는 말이 무척이나 묘하게 들렸다.

진서가 말없이 건오를 보고만 있자, 건오가 덧붙였다.

“그냥 밥 먹고 영화 보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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