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44/72)

44.

고작 10살이었던 그때,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다봄은 집으로 도망쳤다.

소녀가 버린 공은 지나가는 차에 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람은 공이 죽었다고 울어 젖혔고, 다봄은 옆집 아줌마가 무서워서 울었다.

자신이 들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옆집 아줌마가 자신을 데려가 마구 혼낼 것 같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일요일이 돌아오고 성당에 갔다.

아이들을 놀이방에 맡긴 어른들은 고해성사를 하기도 하고 친목을 쌓기도 했다.

다봄도 형제들을 따라 놀이방에 들어섰다가 구석에서 혼자 창밖을 보는 옆집 아이를 발견했다.

‘형, 나 화장실 갈래.’

‘넌 몇 살인데 아직도. 다봄아, 여기서 기다려.’

‘응, 오빠.’

승훈이 하람을 데리고 화장실로 가니 다봄도 혼자가 됐다.

다봄은 건오라는 이름만 아는 그 남자아이 옆으로 가 앉았다. 그러고서도 괜히 옆집 아줌마가 나타날까 봐 두리번거렸다.

시간이 지나도 누구도 오지 않았다.

옆집 아줌마도, 승훈도, 하람도 없는 걸 확인한 다봄은 주머니 속 초콜릿을 꺼냈다.

‘저기, 초콜릿 먹을래?’

건오가 다봄을 돌아보았다. 아이의 시선이 천천히 초콜릿으로 향했다.

빤히 보기만 하기에 다봄은 조금 더 손을 내밀었다.

건오는 고개를 들어 다봄을 보더니 그제야 초콜릿을 가져갔다.

‘……고마워.’

‘응.’

작은 손으로 초콜릿을 받은 건오는 또 그것을 뚫어지게 보았다.

‘어, 내 이름은 연다봄이야. 내 동생은 연하람이고, 오빠는 연승훈이야. 나는 10살인데, 하람이는 9살이야.’

다봄은 제 소개를 했다.

건오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드디어 초콜릿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러자 다봄은 삼 학년 일 반이라는 것까지 알려 주며 한 번 더 주위를 살피고, 쪼끄만 손바닥을 접어 주먹을 꾹 쥐었다.

‘너 우리 집에 놀러 올래? 하람이랑 셋이 공놀이하자.’

다봄은 이 아이가 불쌍했다.

동정은 쉽다고 했던가. 어린 건오는 10살 소녀가 동정할 만큼 가여웠다.

그 안쓰럽던 소년은 훌쩍 자라 다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누나가 날 구했어요.”

그에게 그녀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의 존재며 진리였다.

다봄은 이 맹목적인 마음을 평생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는 이 마음 덕분에 생을 버텨 왔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난 한 게 없어.”

“내 곁에 누나가 있었잖아요.”

다봄은 도리질을 쳤지만,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다봄의 존재는 그에겐 변함없는 명제였다.

그는 다봄 덕분에 외롭지 않았고, 다봄 덕분에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울라고 하는 소리 아닌데.”

울컥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다봄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건오는 먼저 말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울지 마요.”

“안 울어.”

“그렇게 불쌍해요?”

“그런 말 하지 마.”

그는 실웃음을 흘리며 와인을 마셨다.

건오는 다봄에게 제 존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처럼 대신 울어 주고 아껴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것만으로 족하던 때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욕심 없는 그가 다봄에 관해선 왜 그렇게 욕심이 많은지.

점점 더 원하는 게 많아지고 깊어졌다. 양심 없이 커진 욕심은 그녀의 사랑이 갖고 싶었다.

“그만 마실래.”

“그럼 올라가요.”

건오는 돌아갈 때도 자연스럽게 다봄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손을 잡고 눈빛만 봐도 자신을 바라보는 다봄의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부족했다. 키스와 섹스와는 다른 갈증이었다.

이제 그는 그녀의 마음을 언어로 듣길 원했다. 그 별거 아닐 수도 있는 것에 애가 탔고, 동시에 제 욕심에 기가 막혔다.

“누나.”

“응.”

“한 침대에서 자도 되죠?”

“……너, 그런 것도 묻지 마.”

건오는 퉁퉁거리는 다봄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나 그런 바람은 얼마든지 억누르며 기다릴 수 있다.

지금껏 그녀를 향한 마음도 인내하며 살아왔으니, 이런 기다림은 문제도 아니었다.

건오는 오만하게 자신했다.

* * *

귀국 후, 출근 전.

다봄과 건오는 밀린 일이 쌓여 여유가 없었다.

다봄은 확인하지 못한 이메일과 회사 프로그램으로 올라온 일들을 확인해야 했고, 건오는 바로 서면 작성에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봄의 집에서, 멀쩡한 책상을 두고 굳이 식탁에서 마주 보고 앉아 노트북을 폈다.

“연하람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연하람은 시작이에요. 전 형 반응이 가장 걱정인데.”

하람의 반응만 생각하던 다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자판 위에 올라가 있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가 엄청난 선택을 한 것 같은데.”

“영광이에요.”

정작 걱정이라고 말한 건오는 즐거워 보였고, 오히려 다봄의 이마에 근심이 모였다.

잠시 아찔했던 생각을 털어 낸 그녀는 쌓인 일을 하나씩 처리했다.

열심히 움직이던 다봄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멈췄다.

그러고 보니 곧 연광그룹 주주총회였다.

“건오야.”

다봄이 노트북 화면에서 눈동자를 들자 그도 화면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보았다.

“아빠가 연광그룹에 발을 뻗을 것 같아.”

다봄은 조심스럽게 연광과 늘봄의 상황을 아는 대로 전했다.

건오는 차분히 그녀가 전하는 말을 듣다, 다봄의 마지막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많이 바쁠 거야.”

“미리 말해 주는 거예요?”

“어, 음. 아무래도 사이가 달라졌으니까.”

다봄이 모니터로 시선을 피하며 뺨을 긁적였다. 그녀의 민망한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는 말하기 전에도 민망할 걸 예상했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다봄의 유일한 연애 상대는 국가대표였다.

지한은 바쁘기도 참 바빴기에, 다봄은 그 상대 입장을 아주 잘 알았다.

“괜찮아요. 누나 바쁜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나도 그리 한가하진 않아서.”

하지만 건오는 개의치 않았다.

당시 지한과 다봄의 상황과 지금 건오와 다봄의 상황은 달랐다.

“맞아, 너도 바쁘지, 참.”

“서지한이 그렇게 바빴어요?”

뺨에서 내려간 다봄의 손이 어색하게 멈췄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건오에겐 다봄의 반응이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날 좋아하면서 만나기도 전에 헤어질 걱정부터 한 것도 서지한 때문이겠죠?”

건오는 답을 알면서 물었다.

지한을 향한 그의 감정은 다봄을 품에 안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봄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은 초조해 보이는 그가 보였다.

“그 불안감이 널 밀어내기도 했지만, 이젠 그만큼 더 꽉 붙잡게 되지 않을까.”

다봄은 멋쩍은 표정으로 귀까지 빨개져서 말했다. 그래서 건오는 다시 웃을 수 있었다.

다봄에게서 불현듯 서지한과의 기억이 느껴지면 속이 쓰렸지만, 그녀는 지금 제 옆에 있으니까.

“저녁 뭐 먹을래?”

다봄은 그의 미소를 보곤 급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건오가 티 나는 그녀의 연기에 어울려 주려던 때였다. 건오의 핸드폰이 진동하며 하람에게서 전화가 온 것을 알렸다.

건오와 다봄의 눈이 마주쳤다.

동생 이름에 속이 울렁거린 다봄이 격하게 손사래 쳤다. 그 모습을 보며 건오가 핸드폰을 들었다.

“어.”

-야, 너 독립할 생각 없냐.

“뭔 소리야.”

비행기는 탔냐, 어디냐부터 물을 줄 알았던 동거인은 정말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아니다. 내가 나갈까 봐. 너랑 너무 오래 산 것 같아.

“오래 살긴 했지. 근데 왜?”

건오는 궁금하지 않지만 이유나 물어봤다.

그 영혼 없는 질문을 기다린 하람은 냅다 토로했다.

-같이 사는 바람에 너 집 오나 안 오나 살피는 내 꼴이 너무 징그러워. 내가 네 밥을 왜 신경 써야 하지? 넌 사무소에서 보는 걸로 충분한데 말야.

“오.”

어느새 팔짱을 낀 건오는 귀찮은 얼굴로 동조했다.

친구의 작은 호응에 하람은 더 흥분했다.

-네 생각도 그럴 줄 알았어. 그럼 너 들어오면 본격적으로 재산 분할에 들어가자.

“그래.”

그 후 마치 합의이혼이라도 하는 것 같은 대화가 몇 번 오갔다.

건오가 핸드폰을 내려놓기 전까지 하람은 친구의 행방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는 제 친구가 일부러 물어보지 않는 것일 거라 확신했다.

“너희 뭐 해?”

금세 안정을 되찾은 다봄은 재밌는 걸 발견한 사람처럼 웃었다.

건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홀로서기랄까요.”

“싸운 건 아니지?”

“싸우면 내 편 해 줄 거예요?”

“응. 난 원래 네 편이었어.”

다봄은 뭘 묻냐는 듯 즉답했고, 건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뭐든 특별 취급은 기분 좋네요.”

“내가 이렇게 대답할 걸 알고 있었지?”

“당연하죠.”

그는 다봄의 넓은 집을 눈으로 훑어보고는 그녀와 다시 시선을 맞췄다.

“연하람은 여기서 못 살게 해도 나는 살게 해 줄 것 같은데.”

집을 나올 예정인 그가 뻔뻔하게 운을 띄웠다. 다봄의 눈이 게슴츠레 변했다.

“이왕 특별 취급해 주는 거 인심도 쓰는 게 어때요?”

다봄이 눈을 깜빡이며 그의 말을 되새겼다. 건오의 속도가 그녀의 상상 이상이었다.

다봄이 그의 말을 이해하자마자, 건오는 선심 쓰듯 본인이 바라는 다른 선택지도 쥐여 주었다.

“여기 말고 나랑 새로운 집에서 살아도 좋고요.”

당황한 다봄과 원하는 바가 명확한 건오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깔렸다.

갑작스럽기도 했거니와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봄은 고심했다.

“내가 널 받아들이면?”

“그 사실만으로도 어머니 아버지께 설명해 드릴 수 있겠죠.”

“그래. 그렇게 큰 문제니까.”

다봄은 말을 하다 말고 건오 너머 거실을 다시 보았다.

혼자 살기에 무척이나 큰 것도 알고 있었고, 남아도는 공간만큼 느껴지는 공허함도 익숙했다.

그러나 건오와 함께할 때와 혼자 있을 때, 그 외로움의 차이는 아직 익숙해지지 못했다.

타인이 제 공간에 있는데 불편함보단 안정감이 컸다.

“시간을 줘.”

그럼에도 다봄은 결정을 미뤘다.

그녀가 건오와 함께 사는 건, 가족들을 상대로 한 공표나 다름없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어.”

다봄은 승낙인 듯 거절했고, 거절인 듯 승낙했다.

건오는 눈썹을 으쓱이며 모니터로 시선을 고정했다.

태연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의 갈증은 점점 커졌다.

“맞다. 우리 저녁 고르려고 했는데.”

그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봄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끊겼던 얘길 다시 꺼냈다.

“건오 네가 좋아하는 거 먹자.”

고개를 끄덕인 그는 오늘도 다봄이 좋아하는 메뉴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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