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다봄이 아연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급변하는 공기의 흐름이 무서웠던 다봄은 조급한 손놀림으로 뒷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나 받지는 못했다. 받을 수가 없었다.
“받아요.”
건오가 짓눌린 목소리로 그녀에게 요구했다.
다봄은 고개를 저으며 핸드폰을 다시 넣으려 했다.
그가 핸드폰을 쥔 다봄의 손목을 잡았다.
“건오야.”
액정 위, 서지한이란 이름이 그의 시야에 다시금 보였다.
“이 새낀 타이밍도 좋아요. 그죠?”
“백건오, 너 진짜.”
비아냥거리는 건오의 어투에 다봄이 미간을 좁혔다.
동시에 건오의 표정도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나 누나 동생이잖아. 원래 동생들은 누나 말 안 듣고 멋대로 굴고 그래요.”
건오가 그녀를 눈앞에서 비꼬았다.
다봄은 애꿎은 핸드폰만 움켜쥐었다. 그의 감정을 여실히 느끼고 있는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왜 날 그렇게 버려 뒀어요.”
그래. 지금 건오는 화가 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다봄은 손이 떨렸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부탁했잖아.”
“그게 아니야.”
다봄은 바짝 마른 입술로 항변해 보았다.
버렸다는 말에 그녀는 큰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겁이 났다.
“아니야.”
다봄이 떨리는 목소리로 반복해 말했지만, 사실 그녀 자신도 뭐가 아니라는 건지 몰랐다.
그저 변명하고 부정하고 싶었다.
“건오야, 나는 그냥…….”
“그냥? 누나, 날 그냥 외면했다고 말하면 안 돼요.”
이제 다봄은 숨이 막히듯 말문이 막혔다.
건오가 조용해진 그녀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내가 없었으면 받았겠지?”
거짓말을 할 여유도 없었던 다봄의 속눈썹이 떨렸다.
그 순간 건오는 스르륵 눈을 접으며 웃었다.
“키스는 동생인 나랑 하고, 연락은 전 애인과 하고.”
그가 예쁘고 무서운 모습으로 다봄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건오는 그녀의 핸드폰을 다봄의 재킷 주머니에 손수 넣어 주었다.
“한 번의 실수가 참 무섭죠? 자격도 없는 새끼가 이렇게 버릇없이 굴고.”
“자격…….”
다봄이 새삼 낯선 단어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말을 따라 했다.
때마침 그녀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건오가 그녀의 핸드폰이 있는 다봄의 재킷을 턱짓했다.
“내가 누나를 좋아하는 것만으로 서지한을 질투할 자격이 생기진 않잖아.”
다봄은 진동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건오만 바라봤다.
세 번째 울리던 진동이 끊겼다.
건오는 주머니 속 다봄의 핸드폰이 보이는 것처럼 그쪽을 노려보다 다봄을 응시했다.
그와 그녀의 시선이 다시 마주했다. 그 순간, 건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봄이 그를 올려다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건오야.”
다봄이 아득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화를 내면서도 좋아한다 말하던 건오는 그녀의 부름에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건오를 밀어내면 그는 필연적으로 상처받는다.
그걸 인지하고 있으면서, 막상 자신의 말과 행동에 상처받은 그를 보자니 그녀는 못 견디게 괴로웠다.
건오가 울부짖는 짐승처럼 보여 다봄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재차 입술을 열었다.
건오는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널 못 보게 될까 봐. 헤어지면 어떤 사이도 되지 못하니까.”
다봄이 주춤거리며 처음으로 속내를 꺼냈다. 건오는 그녀의 말을 되새기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다봄을 보았다.
그녀가 살며시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전으로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어. 아니, 돌아갈 수나 있는지, 내가 이래도 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너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건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마른세수했다.
그녀의 시선을 다시 제게 끌어오고 싶은 걸 꾸역꾸역 참고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가슴이 뻐근해진 그는 말을 고르고 골랐다.
“누나, 상상해 봤네요. 우리 미래.”
아주 조심스럽게, 놀라지 않게 다가가야 했다. 그녀가 또다시 도망가지 못하게.
“내 상상과 상당히 다른 상상인가 봐.”
그는 별것 아니라는 말투로 현관을 벗어나 거실로 들어갔다.
건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다봄이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생각한 우리 미래에 헤어지는 건 없는데.”
그는 상냥한 다짐과 전혀 다른 오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영원한 건 없어.”
하지만 다봄은 회의적이었다.
그녀는 겪어 보았다. 매일같이 그녀를 아프게 했던 그 대단한 사랑도 끝났고, 잊었다.
“너랑 나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아.”
“그런 생각으론 다른 놈은 더 못 만날 텐데.”
맞다. 그러한 이유로 다봄은 지한 이후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그만큼 힘들었고, 상실감을 느꼈다.
당시 생각에 다봄의 이마가 절로 찡그려지는 찰나였다.
“그래도 20년 동안 누나만 본 나한텐 인생 걸어 볼 만하지 않아요?”
다봄을 향해 건오는 회유하는 것처럼 웃었다.
시계를 풀며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은 여유로워 보였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점점 날것으로 변해 갔다.
“인생을 걸어?”
“그래요, 인생.”
“너 지금, 혹시.”
“네, 결혼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연인이 되면 당연히 결혼해야죠. 우리 사이에 연애하다 헤어질 수 없잖아.”
놀라지 않게 다가가려던 건오는 결심과 달리 본심을 꺼내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거기까지 말하지 않았다면, 다봄은 다시 한번 외면하며 모르는 척했을 것이다.
다봄이 지레 겁을 먹고 또 숨어 버릴까 봐 그는 그녀를 유심히 주시했다.
“너는 대체…….”
다봄은 무어라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집요한 눈빛으로 결혼을 말하는 남자는, 다봄을 예상치 못하게 떨리게 하는 동시에 예상치 못하게 안심시켰다.
건오와 헤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다봄에게 결혼이란 단어는 안전장치처럼 들렸다.
그래. 너와 내가 헤어질 수는 없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다봄은 그야말로 제가 미친 것 같았다.
그녀는 모순된 제 마음을 부정하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시 생각해, 건오야.”
“그 말은 내가 누나한테 해야죠. 나 좀 재고해 줘요.”
다봄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틀었다.
“갑자기 이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녀는 갑작스러울지 모르겠지만, 그에겐 갑작스러운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갑자기 같은 건 없어요. 내 인생은 누나한테 베팅한 지 오래야.”
건오의 눈빛은 이 순간에도 당신에게 내 전부를 걸고 있다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 시선을 마주한 다봄은 조급하게 그의 허리를 잡았다.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격변하는 다봄의 감정을 지켜보듯, 건오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다봄이 초조하게, 얼마쯤은 떨리는 기색으로 물었다.
“너랑 잘못될 일 없지?”
“없어요.”
“너 믿어도 되지?”
“응, 믿어요.”
그녀는 답이 정해진 질문을 했고, 건오는 망설이지 않고 확신했다.
다봄은 그의 허리께를 붙잡은 채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어깨가 올라가고, 손이 올라왔다.
곧 다봄의 새하얀 손이 건오의 뺨을 감싸자 그는 홀린 듯 허리를 굽혔다.
그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또 실수라고 하기만 해 봐.”
“응. 안 그럴게.”
다봄이 작게 답하는 순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단숨에 밀려난 그녀의 허리가 휘청거리자 건오가 단단한 팔로 감싸 안았다.
이어 그녀의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더욱 가까워진 얼굴에 서로의 콧대가 스쳤다.
입술을 떼지 않고 그녀를 안아 든 건오는 가까운 작은 소파에 다봄을 앉혔다.
한 손으론 팔걸이를 짚은 그는 다른 손으론 그녀의 뺨을 쓸었다.
다봄의 고개가 틀어지려 할 때마다 그는 그녀의 턱을 치켜들었다.
그 상태로 위에서 내리누르는 듯 혀를 섞으니, 그녀는 이 순간만큼은 욕심껏 건오를 받아들였다.
그럴수록 팔걸이를 짚은 건오의 손등과 팔뚝에 푸른 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제 안의 욕심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흣.”
입술과 입술이 떼지는 그 찰나, 다봄의 입술 사이로 참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어 건오의 목에서 떨어진 그녀의 손이 그의 손등에 닿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 손을 매만지며 건오를 올려다봤다.
건오는 튀어나올 뻔한 욕설을 겨우 참아 냈다.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닿고 싶어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으읏.”
건오는 애꿎은 그녀의 입술을 이로 살짝 깨물고는 다시 입 안으로 깊게 침범했다.
다봄의 고개가 꺾이자, 그녀의 목선을 따라 그의 손이 내려갔다.
그녀는 제가 붙잡고 있는 건오의 다른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뿐이었다. 다봄은 그의 움직임을 제지하지 않았다.
건오의 손이 점차 내려가 그녀의 허리에 다다랐다.
그 부근을 배회하며 망설이던 손이 처음 키스할 때처럼 그녀의 옷자락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입술을 맞대고 있는 두 남녀의 눈길이 부딪쳤다.
달뜬 다봄의 눈동자 안엔 열기뿐 아니라 분명 두려움도 보였다.
그걸 알아차린 건오가 입술을 천천히 뗐다.
“건오야.”
다봄은 색정적인 그의 얼굴을 피해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많은 것을 참아 내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 괴로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창밖을 보며 입술을 달싹이다 살며시 속삭였다.
“여긴 너무 밝으니까, 안으로…….”
다봄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의 뜻을 알아들은 건오의 미간이 바짝 좁아졌다.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놀라지 않게,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다시금 입술을 겹친 그는 다봄을 안아 침실로 향했다.
다봄을 눕힌 그가 암막 커튼을 치고 침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웃옷을 벗을 때까진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하지만 다봄이 자신의 몸을 빤히 보는 게 느껴진 그때부터, 다짐 따위는 날아가고 본능이 그 자리를 채웠다.
“만져요.”
“으응?”
그는 다봄의 몸 위에 올라타 그녀의 손을 끌어와 그녀가 빤히 보던 곳 위에 올려놓았다.
당황한 목소리와 다르게 그녀는 탄탄한 복근을 매만지더니 이어 다른 손으로는 그의 각 잡힌 어깨를 살짝 쓸었다.
그녀가 제 살갗을 만지는 것만으로 흥분한 그가 다봄의 입술을 머금은 채 자신의 다리 사이에 그녀의 허벅지를 두었다.
다봄의 눈이 크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