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다봄도 건오의 눈동자 속에 담긴 자신을 보며, 그가 숨긴 주어가 자신을 뜻하는 걸 알아차렸다.
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느릿느릿 허리를 폈다. 떨리는 입술을 열기까지는 그보다 더 오래 걸렸다.
“……고마워.”
다봄은 손 둘 곳을 찾지 못해 급하게 커피 잔을 감싸 쥐었다.
찬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술렁이는 마음에 입술을 꼭 말아 무니, 다행히 요란한 심장 소리가 잦아들었다.
다봄은 어색하게 말머리를 돌려보았다.
“여기서 너랑 커피 마시고 있는 게 신기하다.”
“그러게요. 우리 생각보다 같이 못 해 본 일이 많네요.”
그녀의 착각일까, 평범하게 들어도 될 대답이 다봄의 귀엔 낯간지럽게 들렸다.
다봄은 그녀를 곤란하게 하는 그의 시선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고자 했다.
“건오야, 나 잠깐…….”
“어? 부대표님. 안녕하세요!”
“석현 씨.”
다봄이 마시지도 않은 커피를 다시 내려놓자마자 한 남자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현지 매장 관리를 위해 본사에서 파견된 직원이었다.
다봄은 건오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했다.
“왜 아직 여기 계세요? 오늘 한국 돌아가시는 날이잖아요.”
“전 휴가예요. 석현 씨는 점심 먹고 온 거예요?”
“아뇨. 사무실에 다녀왔어요. 부대표님은 점심 드셨어요?”
“아직요.”
“그럼 저희랑 같이 드세요.”
석현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다봄에게 제안했다. 그녀는 건오 앞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보시다시피 일행이 있어서요.”
“아하, 그렇죠. 일행분이 계셨죠.”
이미 건오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남자는 그제야 건오를 발견한 척 눈인사를 했다. 그래서 건오도 눈인사로만 답했다.
남자의 눈길은 친절하나 사무적인 상사를 향해 빠르게 돌아왔다.
“부대표님, 오신 김에 매출 추이 확인하고 가세요. 보고서로 올릴 거지만, 휴가면 나중에 받아 보실 테니까.”
“그럴까요? 건오야, 나 잠시만 다녀올게.”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은 건오는 느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좇던 그의 눈길은 다봄이 모습을 감추자 창문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달리 건오는 창밖 어느 것에도 감흥이 일지 않았다.
내리깐 시야에 수많은 사람이 보여도, 소란스러운 카페 대화 소리가 귀를 때려도, 그는 다봄이 눈앞에 있기라도 하듯 그녀만 그렸다.
조금 전, 그 석현이라는 남자는 다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건오에겐 그런 남자들의 모습은 익숙했다. 그리고 이 졸렬한 자신의 감정도 익숙했다.
건오는 형편없는 기분을 다스리기 위해 초조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대신 커피를 마셨고, 이를 악무는 대신 답답한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둔 다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지한 오빠]
액정 위에 지한의 이름이 떴다. 진동은 길게 이어졌다.
그의 시선은 창밖 따위가 아니라 울리는 그녀의 핸드폰에 박혔다.
“하.”
이내 진동이 멎었다. 건오는 언제 뒤틀리는 감정을 추슬렀냐는 듯 이를 악물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웃기게도 조금 전 석현을 대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동요가 일었다. 그가 눈썹을 매만지며 애꿎은 그녀의 핸드폰만 응시했다.
“건오야?”
머지않아 다봄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왔다. 건오의 눈길이 자신을 부르며 다가오는 그녀에게 옮겨 갔다.
카페에 온 김에 중요한 것만 빠르게 확인하고 온 다봄은 애먼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의 시야에서 도망치고자 한 그 잠깐 사이, 그의 눈빛이 잔뜩 가라앉았다.
“여기 시끄럽지? 우리 나가서 밥 먹을까?”
다봄은 목덜미를 만지던 손을 내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말없이 그녀를 따라 일어선 건오가 그녀의 옆에 섰다.
다봄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길을 정확히 읽을 순 없었지만 이거 하난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건오는 예리하게 벼려진 칼처럼 바짝 날이 선 채였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일단 나갈까요?”
건오는 채 마시지 않은 커피를 뒤로하고 발을 내디뎠다.
공연히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던 다봄은 금세 한 발 멀어진 그와의 거리를 좁히려 발을 떼었다.
“잡아요.”
그 순간, 그가 다시 몸을 돌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
“내 손, 잡고 가요.”
그는 이유를 지어내 갖다 붙이지 않았다. 꼭 그녀가 제 손을 잡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굴었다.
그럼에도 다봄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자, 그가 그녀와의 간격을 성큼 좁히더니 머뭇거리는 작은 손을 잡았다.
“빼지 마요.”
다봄이 대답 대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그녀만 바라보고 있던 건오는 고요히 다봄의 눈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의 얼굴에 어떤 불쾌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어쩔 줄 모르며 부끄러워하는 모습만 비쳤다.
다시 먼저 발을 내디딘 쪽은 다봄이었다.
힘이 들어가 어색한 그녀의 발걸음 옆으로 보폭이 큰 그의 발걸음이 따라붙었다.
“그, 먹고 싶은 거 없으면 훠궈 어때?”
“좋아요.”
건오는 그의 눈에만 보이는 다봄의 어수선함을 관찰하며 걷다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봄의 고개가 그들이 맞잡은 손을 향해 떨어지더니 서서히 움직임이 멈췄다.
다봄은 수 초간 그에게 잡힌 손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타국에서 가지는 둘만의 시간에 들뜬 자신이 보였고, 맞잡은 체온에 뛰는 가슴을 자각했다.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그녀도 신경이 쓰였다. 이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감정은 하나였다.
“건오야, 미안한데.”
일단 운은 띄웠으나, 곧장 입을 다물었다.
당장 제게 벌어진 상황과 자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감당하기 벅찬 그녀 입에서 나올 말이라고는 그를 밀어낼 말뿐이었다.
“미안한데 우리…….”
다봄은 사과를 반복하며 차마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거슬리는 사과 두 번에, 조금 전과 확연히 달라진 다봄의 낯까지 확인한 건오의 눈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기다리면서까지 괴로운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휴가는 왜 냈어요?”
건오는 난데없는 질문을 던지며 다봄의 말허리를 잘랐다.
흠칫한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부터 했다.
“어? 어…… 쉬려고 냈지.”
“그럼 호텔로 돌아가요. 가서 쉬어요.”
“호텔? 아, 응, 그래.”
여러모로 당황스러웠던 그녀는 점심 생각도 뒤로 미뤘다.
다봄은 방향을 바꾸는 건오를 따라 걸으며 그와 연결된 손을 곁눈질했다.
그러다 앞서 오는 행인과 부딪칠 뻔했다.
“조심해요.”
건오가 가볍게 당기며 주의를 주자, 다봄은 창피함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무심코 붙잡힌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건오는 아예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꼈다.
다봄은 손가락이 아니라 심장이 잡힌 줄 알았다.
두근거림과 죄책감, 그 사이에서 다봄은 번민했다.
“제 말 들었어요?”
“어? 뭐라고 했어?”
다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스스러운 그녀의 눈빛을 마주한 건오의 시선이 짙어졌다.
그걸 알아챈 건지, 그를 보며 숨을 들이켜는 그녀의 어깨가 올라갔다.
건오가 이상했다. 자신도 이상했다.
“이 길로 가는 거죠?”
“으응.”
다봄이 길을 살피듯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저런 얼굴을 한 다봄을 보니 너무 불안했다.
그날처럼 상처받게 될까 봐.
건오의 눈에 보이는 다봄은 당장이라도 이 손을 놓고 어딘가로 도망이라도 갈 듯했다.
“누나.”
도로 호텔로 걸어가며 건오가 그녀를 불렀다.
나직한 목소리가 긴장한 다봄을 두드렸다.
“많이 좋아해요.”
애가 탄 건오는 외국 한복판 골목길에서 고백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언어가 이곳이 한국이 아님을 다시금 알려 주었다.
이런 곳에서 할 말도 아니었고, 이렇게 전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음성도, 걸음걸이도, 행동 하나하나 다봄보다 여유롭게 보이던 그는 기실 막다른 길에 몰리기라도 한 것처럼 두려움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마음이었어요.”
다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심장이 목구멍에서 뛰는 것 같았다.
다봄은 발을 멈추려 했지만, 건오는 계속 그녀를 끌었다.
그 후로는 누구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걸었다.
“평생 짝사랑만 했어요.”
고저 없던 그의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
다봄은 건오를 올려다볼 수 없었다.
‘평생’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크고 무거웠다. 감히 그 깊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목이 메었다.
“그래서 난, 누나 한마디에 휘청거리고 세상이 뒤바뀌어요.”
그의 사무친 고백이 이어졌다.
다봄은 어느 순간부터 주변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는 오로지 서로만 존재하는 듯했다.
건오의 손이 뜨거운 건지, 제 마음이 달아오르고 있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누나 눈빛 한번이 밤새 눈에 밟히고, 누나 냄새가 종일 곁을 떠돌 때도 있어요.”
어떻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문이 닫히고, 다봄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가 깊게 잠긴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자 건오는 다봄과 연결되지 않은 손을 느리게 움직였다.
그가 다봄의 고개를 부드럽게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누나는 그런 나한테 희망을 줬다가 빼앗았어요.”
살가운 손길과 달리 눈앞의 그의 시선은 무섭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그 바람에, 당장이라도 미칠 거 같아요.”
다봄은 그에게 휩쓸려 침몰할 듯했다.
“내가 지금 돌겠다고,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