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뺨이 확 달아오른 다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긴 싫은데 머릿속이 새하얘져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나.”
건오가 그녀를 불렀다.
다봄은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데, 마치 그가 자신을 빤히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장난치지 마.”
부끄러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다봄을 보며 건오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목소리에도 표정이 있는 것처럼 건오는 다봄이 어떤 눈을 하고 있을지 훤히 보였다. 그래서 더 갈증이 일었다.
“오늘은 내가 갈 곳이 없어요.”
한국엔 그의 집이 따로 있지만, 이곳은 그녀도 그도 여행자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미리 말해요. 나 소파에서 잘까요?”
침대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고 아쉬워했던 건오는 이제 와 경고하듯 그녀의 의사를 묻고는 그녀의 정수리만 주시했다.
다봄 역시 그의 목소리만 듣고 있을 뿐인데, 건오의 표정이 그려졌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다봄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침대가 멀쩡히 있는데, 내가 어떻게 널 소파에서 재우겠어.”
그녀는 조금쯤 결연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유는 그것뿐이야.”
“알아요.”
다봄과 달리 그는 담백한 대꾸가 다였다.
건오를 마주하던 그녀는 다시 눈동자를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다른 사람 눈은 잘만 마주 보는 다봄이 건오의 눈만큼은 언젠가부터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면서도 그녀의 시선을 잡아 두고 싶었다.
“짐은 내일 정리하는 게 낫겠어요. 누나가 뭘 또 사들일지 모르니까.”
건오가 말을 돌렸다.
내가 또 뭘 그렇게 샀다고.
살짝 억울해진 다봄이 샐쭉 눈을 흘기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하려던 말을 잊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밥 왔나 보다.”
이 애매한 분위기를 깨 줄 것이라면 무엇이든 환영이었다.
“먹고 씻고 자자.”
다봄은 눈앞에 세팅되고 있는 식사를 보며 건오에게 다짐처럼 말했다.
그녀와 같은 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 그가 다봄을 보며 살짝 웃었다.
“누나가 원하는 대로.”
* * *
다봄은 본인의 예고처럼 식사를 끝내자마자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빨리 씻고 건오가 씻는 동안 잠드는 게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그의 앞에서 긴장을 드러낼 일이 없었다.
“흠흠. 얼른 들어가서 씻어.”
다봄이 오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지만, 노트북을 하던 건오는 다봄이 욕실에서 나온 순간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래야 일찍 자고 내일 또 움직이지.”
그가 대답이 없자 다봄은 아무 말이나 하며 긴 머리를 털었다.
그녀는 긴장을 티 내고 싶지 않았지만, 말투며 목소리며 무엇 하나 어색하지 않은 게 없었다.
“머리 말려야죠.”
그러나 지금 건오에겐 그 모든 것들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씻고 나온 모습을 수십, 수백 번은 봤으면서 그 역시 오늘따라 긴장했다.
“내가 해 줄까요?”
다행히 건오는 그녀처럼 티가 나지는 않았다.
씻고 나온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뽀얗고 예뻤지만, 그 위에 당황이 덧대진 모습에서 그는 기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으, 아냐, 괜찮아.”
“왜요. 누나는 내 머리 잘만 말려 줬잖아.”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봄은 열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말려도 돼.”
“그래요?”
“으응.”
입술을 깨문 다봄이 발아래를 흘끗 보았다.
그녀는 그가 어느 정도 이상 가까워지자 뒷걸음질을 치더니 소파를 돌아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 나 먼저 잘 거야!”
앙칼진 어조가 문을 타고 넘어왔다.
그녀가 저를 피해 도망친 곳이 고작 눈앞의 방이라니.
순식간에 혼자 남겨진 건오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호텔은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공간이었다.
침대가 하나였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지만, 그는 일단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잘 자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 건오가 욕실로 들어갔다.
그 안엔 다봄의 집에서 맡던 샴푸 향기로 가득했다.
이만하면 되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목마름을 겪은 건오는 오늘만큼은 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자신 때문에 놀라고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피곤한 다봄을 푹 재우고 싶은 것도 그의 진심이었다.
이런 여유도 그녀를 눈앞에 둔 이곳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 * *
“건오야?”
아침 햇살에 눈을 뜬 다봄은 옆 침대가 비어 있자 무심코 그를 불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그냥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침대를 아예 사용하지 않은 것 같았다.
“건오야.”
어젯밤, 스스로의 다짐처럼 허무하게 곯아떨어진 다봄은 그가 여기서 잤는지, 밖에서 잤는지 몰랐다.
“여기 없어?”
침실에서 나와 나머지 공간을 둘러보았지만 건오가 보이지 않았다.
다봄은 카드 키 두 개가 꽂혀 있어야 하는 곳에 한 개만 꽂혀 있는 걸 보고서야 그가 객실에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필요 이상으로 놀란 그녀는 녀석이 잠깐 어디 나갔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객실 문을 한번 열어 보았다.
“어? 건오야.”
상체만 빼꼼 내밀고 두리번거리던 다봄의 시야에 막 돌아오던 그가 잡힌 건 우연이었다.
그도 그녀를 보았다.
“어디 다녀온 거야?”
다봄은 일어나자마자 몇 번이고 부른 건오를 또 한 번 부르며 물었다.
그 사이 건오는 다봄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객실로 밀어 넣었다.
“운동 갔다 왔어요.”
그의 대답과 문이 닫히는 소리가 겹쳤다.
그녀의 차림에 놀란 건오의 음성이 딱딱했지만, 문 소리와 섞여 들린 덕에 다봄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나부터 씻을게요. 나 왔으니까 어디 나가지 마요.”
“안 나가. 그냥 객실 앞만 확인한 거야.”
멋쩍게 대꾸한 다봄은 정리되지 않은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소파로 향했다가 소파 위에 놓여 있는 베개를 발견했다.
그녀의 눈이 대번 커졌다.
단서는 소파 위 베개뿐이지만, 다봄은 그것만으로 확신했다.
“너!”
다봄이 그를 찾아 뒤돌았을 때, 욕실에선 벌써 샤워기 물소리가 나고 있었다.
다봄은 헛바람을 내쉬며 베개를 내려다보았다.
키스한 날 집으로 돌아간 건오는 어제도 한방에서 잘 것처럼 굴고는 또 문 너머에서 잔 것이다.
그를 나무라려던 다봄은 복잡한 기분으로 소파에 앉았다.
건오가 여기서 잔 이유는 자신 때문이었다.
그게 미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또 두근거렸다.
이까짓 게 뭐라고.
“누나, 씻어요.”
건오가 욕실에서 나왔다.
다봄은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길에 건오가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곧바로 욕실 문이 닫혔다.
* * *
“오늘은 관광지 가 볼래?”
“아뇨. 저는 관광지 말고 늘봄 가 보고 싶어요.”
“늘봄?”
나름대로 몇몇 관광 후보지를 생각해 놓았던 다봄에게 건오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나 때문이면 괜찮아. 일은 다 봤어.”
“정말인데.”
“거기가 왜 가고 싶어? 한국이랑 똑같아.”
“누나가 엄청 신경 쓴 곳이니까.”
거기다 건오의 이유는 그보다 훨씬 뜻밖이었다.
다봄은 잠시 입을 달싹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이랑 가까워.”
“그럼 걸어갈까요?”
“그래.”
“길 제대로 알죠?”
건오는 뒤늦게 미심쩍은 눈으로 다봄을 보았다.
다봄이 운전은 잘해도 길을 잘 기억하는 스타일은 아니라 물어본 것뿐인데, 그녀가 그를 흘겨보았다.
“걸어서 5분인데, 못 믿겠으면 택시 타고 가든가.”
“믿어요.”
건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카드 키를 뽑고 다봄의 뒤를 따라나섰다.
다행히 다봄은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지름길로 갔다.
“여기야.”
그녀가 3층 건물을 가리켰다.
생각보다 큰 규모를 보고 놀란 건오를 두고 다봄은 먼저 카페로 들어섰다.
관리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건지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건오가 카페 내부와 손님들을 둘러보는 사이, 다봄은 편한 마음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받고 2층으로 올라갔다.
마침 3층에서 내려오고 있는 건오를 발견한 그녀가 창가 자리를 향해 턱짓하고는 먼저 의자에 앉았다.
“좋다.”
손님으로 방문한 다봄은 새삼스럽게 거리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한국 늘봄과 똑 닮은 공간이었지만,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이나 들리는 언어는 그곳과 사뭇 달랐다.
대만 1호점 오픈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보냈던 지난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나날을 보상받은 듯해 다봄의 눈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었다.
“어때?”
그녀가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질문하며 건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건오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며 상체를 숙였다.
“예뻐요.”
반짝반짝한 다봄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는 여상하게 마저 말했다.
“그리고 멋있어요.”
그는 늘봄이 아니라, 그녀를 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