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늘봄 대만 1호점이 오픈했다.
다봄이 그녀의 팀원들과 대만에 도착했을 땐 오픈을 위한 준비가 거의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서 다봄은 주어진 사흘간 무척 바쁘게 돌아다녔다.
다행히 현지 관리자들과 늘봄에서 파견한 해외사업부원들의 팀워크가 좋은 데다, 일정이 한 번 미뤄진 만큼 다들 심기일전한 덕에 큰 사고 없이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한시름 놓은 다봄이 간단한 회식을 마치고 호텔로 들어선 때였다.
[내일 대만으로 갈게요.]
우뚝 선 다봄이 도착한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진담이라기엔 믿기 힘들었고, 마냥 농담이라고 여기자니 가볍게 넘기기 힘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렇게 혼잣말하면서도 다봄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전화를 걸까, 말까.
답장을 할까, 말까.
한자리에서 오래도 망설였다.
그녀의 고민을 아는 것처럼 연이어 메시지가 도착했다.
[타오위안 공항, 오후 1시 반 도착 비행기예요.]
「탈 겁니까?」
누군가 엘리베이터 앞에 오래도록 서 있는 다봄에게 질문했다. 그 덕에 그녀는 몇 번이고 그냥 보낸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중국어로 말을 건 사람 덕에 생각이 환기되었다.
여긴 대만이다. 저만큼이나 바쁜 건오가 설마하니 여기 올 리 없었다.
다봄은 핸드폰을 가방에 도로 넣었다.
그러나 잠들기 전까지 그 설마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일어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늘봄 카페에 와 마무리를 짓고 팀원들과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서도 다봄은 혼자 건오 생각에 빠져 있었다.
“우리 택시는 앞에서 잡을까요? 아니면 따로 부를까요?”
“오가는 택시가 많아서 요 앞에서 잡아도 될 것 같아요.”
지금 와 전화를 걸자니 그가 무슨 말을 할 줄 몰라 무서웠다.
그래서 그녀는 뒤늦게나마 메시지를 꾹꾹 눌러 썼다.
[정말 오늘 오는 거야?]
“부대표님, 저희 먼저 한국 가 볼게요.”
그제야 다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각각 큰 캐리어 하나씩 옆에 둔 팀원들은 어느새 그녀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벌써요?”
“네. 공항에 미리 가 있으려고요.”
똑 부러지는 막내가 아쉬워하는 선배를 위로하며 다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팀원들을 먼저 보내고 대만에서 3일 더 머물다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고, 다음 주 회사에서 봬요.
다봄은 해야 하는 인사말을 멈추고 그들을 보았다.
길지 않은 망설임 끝에, 결국 그녀는 핸드폰을 챙겼다.
“저도 같이 가요, 공항.”
* * *
“저도 부대표님처럼 연차 낼 걸 그랬어요.”
“맞아요. 질리게 오면서도 막상 돌아가려면 아쉽다니까요.”
“어제 그 야시장을 갔어야 했는데.”
건오는 답장이 없는데, 다봄은 공항에 왔다.
다봄은 시끄러운 속을 감추고 씩 미소 지었다.
“여러분들을 대신해 제가 3일만 더 쉬다 갈게요.”
오랜만에 출장에 맞춰 휴가를 낸 다봄은 함께 온 팀원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다봄은 아직도 답장 없는 핸드폰을 매만지며 정신을 차렸다.
혹시나 하는 가능성에 여기까지 왔지만,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게 편했다.
“밥이나 먹자.”
익숙하게 공항을 누빈 그녀는 한 식당 앞을 찾아가 줄을 섰다. 그리고 곧 복잡한 인파 속에서 겨우 주문을 마쳤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다봄은 우육면을 앞에 두고 한 번 더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후 1시 10분. 건오가 말한 항공편이 도착할 때까지 20분이 남았다.
다봄은 그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계산했다.
그녀가 출장을 마친 곳에서 며칠 더 머무르는 경우는 왕왕 있었지만, 이번 휴가는 쉼 없이 일했고 앞으로도 일해야 하는 자신에게 주는 보상이었다.
그런데 이 귀한 일정에 굳이 공항에 와 끼니를 때우게 되었다.
“괜히 여기까지 왔나.”
다봄이 괜히 불퉁하니 중얼거리며 면을 집어 올렸다.
긴 젓가락이 입술에 닿기 전이었다.
「괜찮습니다. 일행이 있습니다.」
다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각국에서 모인 인파가 섞여 시끄러운 와중에도 그녀가 그의 음성을 그냥 흘려보낼 리 없었다.
「같은 걸로 주세요.」
다봄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그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나 기다리는 거 아니었어요?”
“응?”
다봄은 멍청하게 되물으며 제 앞에 앉는 녀석을 바라봤다.
문자를 받는 순간부터 설마 설마 했다. 그러면서도 정말 올까 싶어 여기까지 왔다.
타국 공항에서 다봄은 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그를 기다렸다.
“공항까지 마중 나와 놓고 왜 먼저 먹어요?”
다봄은 놀란 눈으로 조금 전 확인했던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그가 태연자약하게 설명했다.
“마침 자리가 났길래 공항에서 표 바꿨어요.”
황망한 다봄과 달리 건오는 참 정갈하고 담담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넋 놓고 바라봤다.
직접 공항까지 왔으면서도, 그가 대만까지 온 이 상황이 겁날 뿐이었다.
“건오야, 너 여기…….”
“누나 보러 왔죠.”
건오는 그녀의 말을 가로채고 덤덤하게 답했다.
“진짜 오면 어떡해.”
그녀의 찡그린 표정과 탓하는 말투에도 건오는 개의치 않았다.
“누나가 날 피하는데 내가 제정신이겠어요?”
그가 그녀를 보며 씨익 웃었다.
다봄은 그제야 건오가 제대로 보였다.
정갈하고 담담해 보이는 건 그의 겉모습뿐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 표정 하나하나 평소의 그와 달랐다.
건오와 눈을 맞추던 그녀는 정체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코앞에 맹수를 두면 이런 기분일까.
다봄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를 하염없이 뜯어보던 그의 눈길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짓이겨진 다봄의 입술을 보며 건오는 마치 지금, 4월의 하늘이 맑다는 얘길 하듯 잠잠히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고백도 제대로 못 했더라고요.”
선전포고였다.
“나 그거 하려고 왔어요.”
* * *
“남은 객실이 없다는데.”
프런트 데스크에 선 건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봄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직접 직원에게 다가갔다.
「정말 남은 객실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손님. 오늘과 내일은 만실입니다.」
다봄과 건오의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눈을 깜빡이며 다봄에게 묻는다.
“설마 동생을 다른 호텔로 보낼 건 아니죠?”
발칙한 도발에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다봄이 큰 눈으로 당황하고 있으니 두 사람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표정이 서서히 이상해졌다.
그 시선을 느낀 다봄은 곤란함을 숨기지 못했지만 일단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건오는 만족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고 그녀를 따랐다.
“내가 휴가인 건 어떻게 알았어?”
“몰랐는데.”
“그럼 내가 오늘 한국 돌아갔으면 어쩌려고?”
“그랬으면 누나에게 연락이 왔겠죠.”
다봄은 대책 없는 건오의 대답을 들으며 계속 놀랐지만, 그는 다봄의 면면을 알고 있기에 비행기를 탄 것이다.
물론 건오는 다봄이 공항에 나올 것까지도 예상했다.
“뭐, 휴가라니 잘됐네요.”
객실에 다다른 그는 널따란 다봄의 공간을 둘러보며 심상히 말했다.
침대는 두 개, 거실은 따로 갖춰져 있고, 밖을 내다보며 스파까지 즐길 수 있는 객실이었다.
그런데 건오는 무언가 마음에 안 차는 모양이었다.
“더 좋은 데는 이미 만실이었어.”
그 표정을 본 다봄이 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하는데, 건오는 그녀와 전혀 다른 소릴 했다.
“침대가 두 개라 아쉬워서요. 하나였으면 좋았을 텐데.”
다봄은 얼굴을 붉히며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키스, 상처를 주었던 대화, 그간 연락을 무시했던 모든 상황 중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다봄과 건오는 그 상황을 바탕에 깔고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그, 돌아가는 표는 언제로 했어?”
“그러고 보니 그것부터 바꿔야겠네요. 누나 가는 날이 언제라고요?”
건오는 짐을 푸는 대신 노트북부터 꺼내 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또 하나의 표를 날리고 다봄과 같은 날, 같은 시간의 비행기를 예매했다.
다봄은 말리지 못했다.
여기까지 온 녀석에게 따로 돌아가자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제 나가서 남들처럼 놀아 볼까요?”
휴가를 낸 건 다봄이지만, 딱히 무얼 하겠다거나 어딜 가겠다고 정해 놓은 것은 없었다.
일단 다봄은 관광객이 많이 가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왔다.
이곳은 늘봄 1호점 후보지에 올랐던 곳이기도 했다.
“사람 진짜 많네.”
“정말요.”
듣던 대로 현재 늘봄이 들어선 곳만큼이나 사람이 많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상권 분석을 할 뻔했다.
아차 한 다봄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쉬어야지.’
때마침 대형 쇼핑몰로 들어가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어때요?”
건오도 그들을 발견하곤 다봄에게 물었다. 그곳에서 다봄의 쇼핑이 시작되었다.
“진서 언니 차 사다 줘야겠다. 아, 언니 것만 사면 오빠가 뭐라 하려나.”
“건오야, 너희 사무소에 이거 돌릴래?”
“연하람 건 빼도 되겠지?”
선물이라고는 공항 근처에서 돌아가기 직전에 급히 사곤 했는데, 이렇게 쇼핑하니 비슷한 물건도 새로웠다.
신난 다봄은 주류 코너에서도 한참을 머물더니 고량주를 집었다.
“아빠는 고량주보단 와인이니까, 이건 네가 가져가면 되겠다. 어때?”
그녀는 병 하나를 가리키며 자연스럽게 건오의 부모님을 챙겼다.
한 발짝 뒤에서 그녀를 구경하고 있던 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다봄이 눈동자를 굴렸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내가 드려야겠다.”
그녀가 눈치를 보며 고량주 상자를 카트에 담았다. 건오는 별말 없이 다시 움직이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저녁이 되었다.
“쇼핑만 했는데 너무 피곤하다.”
호텔로 돌아온 다봄은 소파에 눕듯이 앉았다. 발이 아프도록 쇼핑만 한 건 서른이 넘어 처음이었다.
그래도 저녁을 위해선 충분히 다시 나갈 체력 정도는 되는데, 건오는 지친 다봄을 보곤 선뜻 제안했다.
“룸서비스 시킬까요?”
“그래도 돼? 너 여기까지 왔는데.”
“대만 호텔에서 룸서비스 먹는 것도 한국에선 못 하는 거예요.”
자신을 위한 설득인 것을 알기에 다봄은 미안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건오는 바로 룸서비스를 시켰다.
그는 말이 길어지면 영어를 사용했는데, 그 모습을 보며 다봄은 새삼스레 감탄했다.
“잘하네.”
건오는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다봄은 키득키득 웃었다.
“영어 말이야.”
설마하니 저녁이 다 돼서, 그것도 대만에서 영어를 칭찬받을 줄은 몰랐던 건오는 그녀를 따라 가볍게 웃었다.
“누나 덕이죠.”
“네가 영어 잘하는 게 왜 내 덕이야?”
“누나가 그렇게 잘한다, 잘한다, 해서 공부했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한 건오는 한가득 쌓인 기념품들을 보며 이마를 긁적였다.
건오는 한 살 많은 그녀보다 머리가 좋았고, 어린 다봄은 똑똑한 건오를 신기하게 보며 오늘처럼 감탄하곤 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치던 건오는 변호사가 되어 잘난 머리를 제대로 쓰고 있었다.
“잘 컸네.”
다봄이 툭 속마음을 표현했다.
건오는 부끄러움 하나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대꾸했다.
“마음에 들어요?”
다봄을 보는 그의 눈꼬리가 야살스레 접혔다.
“마음에 들면 가져도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