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38/72)

38.

건오의 눈빛이 서서히 굳었다.

그의 생각에 제 재판 일정을 듣고 그녀가 안절부절못할 이유는 하나였다.

“밥만 먹으러 나온 거 아니잖아요.”

“밥만 먹으러 나온 거야.”

“아닐 텐데.”

건오가 더없이 비딱하게 받아쳤다.

“나한테 할 말 있잖아요. 말해 봐요.”

“아니야. 그런 거 없어.”

그녀가 몸을 사리는 모양을 보면 듣지 않아도 그 내용이 대충 예상되었다.

건오는 입술을 달싹이는 다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다봄은 자신을 주시하는 건오의 시선만으로 압도당했다.

“못 하겠어요? 누나가 밀어내면 내가 재판이라도 망칠 것 같아서?”

그는 그녀가 삼킨 말을 기어코 꺼내 들었다.

다봄은 불안하게 건오를 보았다. 그녀로서는 그의 다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설마. 누난 모르겠지만, 짝사랑이 오래되면 이런 것도 면역이 생기거든.”

그녀의 생각이 가소롭기라도 한 듯 건오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바로 사라졌다.

“그러니까 하려던 말, 지금 해요.”

그는 싸늘한 어조로 다봄이 입을 열길 종용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입술이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굳은 다봄을 감상하듯 지켜보던 건오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없던 일로 하자. 아니면 찾아오지 마라? 둘 중에 있어요?”

그는 다봄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을 대신 읊어 보았다.

그런 말쯤은 각오가 되었단 걸 알려 주려는 듯했지만, 다봄에겐 보였다.

건오는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상처받았다.

“누나.”

“미안해.”

마침내 다봄이 입을 열었다.

고작 세 글자에 건오는 말을 멈췄다. 이어 끔찍한 장면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그는 더 무너질 게 남은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날은 내 실수였어.”

그리고 그녀는 그의 상상보다 잔인했다.

* * *

다봄은 회사로 돌아와 사무실 불을 켰다.

건오의 재판을 걱정한 건 자신의 오만이었다.

정작 그 말을 뱉었을 때, 본인이 받을 충격에 대해서 쉽게 생각했다.

다봄은 좀처럼 진정을 못 하는 심장을 다독여 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지한과 헤어진 후 이런 감정은 너무 오랜만이라 적응도 되지 않았다.

“이제 진짜 어쩌지.”

그녀에게 그날의 키스는 실수가 맞았다.

분위기에 이끌린 것도 실수였지만, 건오를 더는 동생으로 보고 있지 않은 게 가장 큰 실수였다.

그 실수는 계속되고 있고, 여전히 그녀는 그녀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미쳐 있었다.

‘설마 그 한마디로 예전처럼 돌아가길 바란 건 아니죠?’

그는 실수라 말하는 다봄을 비웃었고,

‘선은 같이 밟아 놓고 혼자 내빼면 안 되지.’

다시금 그들의 관계를 확인시켰다.

‘키스한 이상 난 절대 못 돌아가요.’

건오는 마치 사냥이라도 앞둔 눈빛으로 다봄을 응시했다. 그때만큼은 그가 받은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다봄은 겨우 책상에 앉아 다 보지 못한 보고서를 집어 들었지만 일을 하지는 못했다.

한 문장을 반복해서 읽고, 그리 복잡한 내용도 아닌데 처음부터 다시 보길 반복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엄살을 부리기엔 다봄은 책임이 막중했다.

“정신 차리자, 제발.”

스스로 다그치며 꾸역꾸역 보고서를 넘기길 한참이 지났다.

마지막 장을 덮음과 동시에 정각을 알리는 작은 시계 소리가 울렸다.

다봄은 시간을 확인하고 책상에 엎드렸다.

가장 깊은 새벽이었다.

* * *

“부대표님, 여기서 주무셨어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다봄은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비볐다.

멀끔한 모습으로 출근한 승희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아아…… 출근하신 거죠? 지금 몇 시예요?”

“8시 반이에요.”

몇 시간 전 제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다봄은 뻐근한 목을 문질렀다. 팔은 저리고 허리도 아파 삭신이 쑤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어쩌다 여기서 주무신 거예요?”

“그러니까요. 잠깐 눈만 붙이려고 했는데.”

하품하며 기지개를 켠 다봄은 뒤에서 느껴진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사무실 밖에는 주혁이 서 있었다.

주혁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딸을 향해 손짓했다.

그녀는 영락없이 잘못한 딸의 모습으로 주혁 앞에 섰다.

주혁은 다봄이 비실거리는 꼴을 보며 인상을 썼다.

“너 뭐 하는 거야?”

주혁이 다그치자 다봄은 목덜미를 매만졌다.

“음. 야근이라고나 할까.”

“야근했으면 퇴근도 해야지. 너만 퇴근이 안 찍혔단다.”

“의도한 건 아니고, 그냥 깜빡 졸았어요.”

“네 엄마가 이 꼴을 보면 참 좋아하겠다. 빨리 집에 가서 회의 전까지 씻고 와.”

“네에.”

다봄은 공연히 말끝을 늘이며 대답하곤 주혁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주혁은 피곤이 쌓인 딸의 모습에 혀를 차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나오셨어요, 대표님.”

“예. 좋은 아침입니다.”

그의 성격을 닮아 잘 정돈된 책상에 앉은 주혁은 가장 먼저 일정을 조정했다.

“오늘 임원 회의 끝나면 오후 스케줄은 새로 잡아 주세요.”

“다른 스케줄이 생기신 겁니까?”

비서가 먼저 잡혀 있던 일정을 확인하며 물었고, 그는 부드럽게 답했다.

“연광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익숙하게 새로운 일정을 타이핑하려던 비서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주혁은 회사 프로그램에 로그인하며 덧붙였다.

“혹시 제가 없는 동안 급한 일이 생기면 부대표에게 전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주혁의 권한이 다봄에게 차츰차츰 넘어오고 있을 때, 그녀는 회사와 가까운 집에 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10시 회의까지 가려면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 서둘러야 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다봄에게 바쁜 하루의 시작은 상당히 다행인 일이었다.

이렇게 정신없고 일이 많아야지 건오와의 일을 잊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회의 10분 전, 다봄이 사무실에 도착하자 승희는 눈에 띄게 안심했다.

그녀가 다봄에게 준비된 자료를 넘겨 주었다.

“딱 맞춰 오셨네요. 어서 내려가 보세요.”

“다녀올게요.”

다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깔끔한 모습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오후엔 쌓여 있는 일과 더불어 대표실에서 넘어온 일까지 합쳐져 숨 돌릴 틈도 없었다.

그 핑계로 다봄은 건오의 연락을 몇 번이고 모른 척했다.

* * *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조만간 사무소로 찾아뵙겠습니다.”

선고유예를 받은 의뢰인이 건오를 향해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네자, 그도 짧게 인사했다.

“예. 그럼 몸 잘 추스르십시오.”

“변호사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오늘따라 표정이 좋지 않으셔서…….”

1년 넘게 마음고생을 한 그녀가 도리어 그를 걱정했다.

건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널린 종이를 대충 모아 서류철에 넣었다.

평소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는데, 타인의 눈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재판이 끝나길 누구보다 기다린 건오는 재판장을 빠져나가며 다봄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되며…….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실수라 말하던 다봄의 얼굴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그는 그 와중에도 순조롭게 재판을 주도했다.

오랜 짝사랑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가 보다, 실없이 자위하며 엘리베이터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그 생각은 금세 우스워졌다.

“참.”

초라하네.

건오는 무언가에 쫓기듯 다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녀에게 전화하는 횟수가 많아졌지만, 그가 듣는 거라곤 안내음이 전부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재판장에 섰을 때의 정신력과 인내심은 마구 긁혀 나갔다.

실수라는 말을 증명하듯 다봄은 그를 필사적으로 피했다.

받아 주는 거라곤 메시지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찾아가겠다고 해야 답장이 왔다.

[바빠, 미안해.]

[오늘도 바쁘네. 밥 챙겨 먹어.]

[아니야,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그 상태로 피가 마르고 정신이 나갈 것 같은 2주가 흘렀다.

“단경에서 합의 요청…… 야.”

건오의 사무실을 찾아온 하람은 곧장 한숨을 쉬었다.

날이 다르게 까칠해지는 친구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하람은 건오가 연다봄과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명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의 모습만으로 충분한 답을 들었다.

“계속해. 단경이면 그 후배들이 선임한 로펌이잖아.”

“됐어. 이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상태나 좀 어떻게 해 봐. 내가 연다봄 불러? 아니면, 뭐, 같이 찾아갈래?”

하람은 드물게 진심으로 건오를 걱정했다.

끼니는 어떻게 챙겨 먹고 있는 줄도 모르겠고, 저 상태로 머리는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됐어.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쓸데없는 짓 아닌 것 같으니까 문제지. 이러다 실적 안 좋아져서 수임 안 들어오면 네 책임이야.”

하람이 핸드폰을 들자 건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하람.”

하람이 친구를 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그 역시 건오와 같은 안내음을 들었다.

하람이 핸드폰을 보며 인상을 썼다. 다봄은 동생의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지금 내 전화 거절한 거야? 나는 무슨 죄라고?”

게다가 통화 연결음이 끝까지 이어지지도 않았다. 하람의 전화를 수신 거절했단 뜻이었다.

“연다봄, 뭐야?”

하람은 오기로 또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동생은 바짝 약이 올랐다.

하람의 돌발 행동에 신경이 곤두섰던 건오는 다시 자리에 앉아 시끄러운 친구를 노려봤다.

그때 하람에게 전화가 왔다. 다봄이었다. 다시 건오의 감각이 뾰족해졌다.

“전화 좀 바로 받을 수 없어?”

-방금까지 회의 중이었어. 무슨 일 있어?

다봄의 사무적인 목소리 뒤로 웅성거리는 중국어가 섞여 들렸다.

“회의를 중국어로?”

-아, 들려? 중국어로 회의를 하진 않았는데, 지금 대만이긴 해.

“출장이야?”

-응. 나 다시 가 봐야 해. 용건 없으면 끊는다.

“어. 용건 없어.”

하람은 언제 연달아 전화했냐는 듯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친구를 보았다.

뜻밖의 소식에 마뜩잖았던 건오의 표정도 바뀌어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마우스를 움직였다.

“연하람.”

하람은 무심코 인상을 썼다. 건오의 목소리가 조금 전과 미묘하게 달랐다.

하람이 이상하게 불안해질 무렵, 건오가 통보했다.

“휴가 낼게.”

“휴가?”

아니나 다를까, 건오는 기막힌 소릴 아무렇지 않게 했다.

건오의 책상으로 훌쩍 다가간 하람은 친구가 검색 중인 대만 비행기 표를 보곤 이마를 짚었다.

“진짜 미쳤냐, 너?”

하람이 애써 소리를 낮춰 윽박질렀지만 건오는 하람을 보지도 않았다.

백건오는 이미 조용히 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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