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37/72)

37.

연광그룹 본사.

임원들 사이를 돌던 소문이 고작 며칠 만에 회사 곳곳에 퍼졌다.

두루뭉술하던 내용은 점차 구체적으로 변했고, 밖으로 새어 나가기도 했다.

그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늘봄의 전화가 울렸다. 금세 늘봄에는 그보다 조금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대표님, 연광 식품부 책임자로 가신다던데?”

“아니야. 식품이 아니라 다른 데였는데.”

“무슨 소리야? 가는 건 확실해?”

“몰라. 그래도 부대표님까지 가시진 않을 테니까…….”

“이러다 연광이 늘봄 다 삼키고 우리 잘리는 거 아냐?”

“설마. 난 잘리지만 않으면 돼.”

그러나 그곳의 부대표라는 다봄도 아는 게 직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저 늘봄의 전화가 울리기 전. 딱 그 정도 먼저 들은 것뿐이었다.

“우리는요?”

다봄도 직원들과 똑같이 주혁에게 질문했다.

다만 막연하게 믿을 주체가 있는 직원들과 달리, 그 주체인 그녀는 벌써 눈앞이 까마득했다.

“대표님.”

주혁을 부르는 다봄의 목소리에 미약한 두려움이 깔렸다.

건오와의 키스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엄청난 현실과 마주 섰다.

“아빠.”

“아직 결정된 거 없어.”

“날짜만 정하면 되는 거 아니고요?”

불신 어린 다봄의 말이 날카로웠다.

주혁은 보고 있던 서류를 덮고 비서에게 눈짓하자, 비서가 사무실을 나섰다.

“앉아서 얘기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 소파에 앉았다.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주셔야 해요. 혼자 뒤늦게 아는 건 정말 진절머리 나니까.”

다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주혁은 퍽 곤란한 낯으로 타일렀다.

“지한 군이 그런 걸 아빠한테까지 연결하면 곤란해.”

“정말 투잡이라도 하시려는 거예요?”

현재 시점에서 결정된 것이 없다는 주혁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연광의 사외이사로 선임되기 위해 주주총회를 기다리고 있었고, 막연하게 떠도는 소문의 식품부 총괄자엔 주혁의 사람이 내정된 상황이었다.

“그쪽은 지금 큰아버지가 맡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이 점이 다봄이 가장 혼란스러운 부분이었다. 주혁의 모든 행보가 태철과 척지고 있었다.

이러다 그가 연광의 후계자가 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난 연광에 관심 없어.”

“하지만 지금 아빠가 하려고 하시는 건 누가 봐도 후계자 싸움이에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

“복수와 약간의 정의 차원이랄까.”

눈썹 주위를 긁적인 그는 다봄에게 USB를 하나 건넸다.

그 작은 것 안에는 일석에게 건넸던 파일들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이 안에 들어가 있는 건 정의인가요, 복수인가요?”

“정의.”

“그러면 복수는…….”

“내 새끼들 건드린 복수. 그게 메인이지.”

주혁은 민망해 보이면서도 얼마쯤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다봄은 USB를 꽉 쥐고 주혁이 하려는 일을 상상해 보았다.

태철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것까지 이해했다.

그러면 그 후 연광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할아버지, 연지웅한테 회사를 맡기실 생각이세요?”

다봄은 경악한 얼굴로 사촌 형제 이름을 입에 올렸다.

지웅을 아는 누구라도 그녀처럼 경악할 만한 문제였다. 그가 연광을 이끌어 간다면, 연광은 이제까지 쌓아 놓은 것이 무엇이든 빠른 속도로 주저앉을 게 분명했다.

“아니죠? 전문 경영인이나, 뭐 다른 분이라도 염두하고 계시겠죠?”

“염두에 둔 사람이 있긴 있지.”

“다행이네요.”

“네 회사도 아니면서 뭘 다행이야.”

“그래도.”

다봄은 찡그린 얼굴로 안심했다.

주혁과 달리 그녀는 일석을 싫어하지 않았다.

일석과 주혁의 사이가 좋지 않아 조심스럽고, 일석의 중매나 간혹 들어오는 제의가 곤란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어린 다봄은 명절마다 부모의 인사를 대신해 일석네 맡겨졌다.

하람은 뭘 안다고 승훈을 따라가기 싫어했지만, 다봄은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가는 걸 기다렸다.

저만 다녀간다는 사실이 묘하게 특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특권 아닌 특권은 다봄이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계속되었다.

“할아버지가 일구신 걸 연지웅이 망하게 하는 꼴을 볼 순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녀의 대학 입학 날, 그리고 그녀의 대학 입학 날, 일석은 정말 특권이라 여길 만한 연광그룹의 지분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잘됐구나.”

그 지분이 많지는 않은 탓에 태철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외면했지만, 기실 주혁은 그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뭐가요?”

“아빠가 당장은 연광 선임부터 내부 인사까지 신경 써야 해서 정신없을 테니, 늘봄은 네가 맡고 있어.”

주혁은 대답을 피하며 다봄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누가 들으면 늘봄 대표가 아니라 연광 대표인 줄 알 법한 소리였다.

다봄이 눈을 새초롬히 뜨며 고개를 저었다.

“벌써 떠맡기려고 큰 그림 그리고 계신 것 같은데, 너무 일러요.”

다봄은 다 안다는 어투로 막중한 책임에서 도망치고자 했다.

그녀의 나이는 고작 서른하나였다. 큰일을 맡은 지 오래였지만, 총괄 책임을 지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그러나 주혁은 딸의 말에 코웃음 쳤다.

“내 캔버스가 얼마나 큰데, 그림이 다 채워지기엔 멀었어.”

다봄은 일찍이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할아버지는 연광그룹 창업주고, 다봄만 한 인재도 없다. 그녀가 결심만 한다면, 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다.

다봄은 그만한 자질과 환경을 타고났고, 나머지 환경은 아버지인 그가 만들어 줄 것이다.

지금은 앞으로 맡을 일만으로도 벅찰 테니 잠시 말을 미뤄 두었을 뿐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도 다봄이 하기 싫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왜 그래요? 무섭게.”

“그런 게 있다. 선임될 때까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소문은요? 직원들이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요.”

“불안한 게 아니라 흥미에 가까울 테니까 그것도 그냥 둬. 전체 공지는 연광 주총 이후에 할 테니까.”

주혁의 뜻이 그렇다면 다봄이 뭘 어쩔 도리는 없었다.

다봄은 들으란 듯 한숨을 쉬고 USB를 주머니에 넣은 뒤 일어섰다.

그는 이만 나가려는 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건오하고는 괜찮지?”

“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유난 떨 질문도 아닌데 반응이 유난이었다.

“안 괜찮을 게 뭐 있겠어요. 싸운 적도 없는데.”

“너랑 엮여서 기사 났잖아. 건오 녀석이 네가 미안해할까 봐 신경 쓰더라고.”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제양 사장이랑 술 한잔한 날.”

다봄은 콧등을 찡그렸다.

“네가 전에도 가족 찾은 거 말 안 했다고 서운해해서 그렇지 뭐. 너한테 예민한 애니까, 건오 생각해서라도 웬만한 건 덤덤하게 넘어가.”

“걱정 마세요. 우리가 애들인가.”

다봄은 주혁의 눈을 피하고선 공연히 퉁명스럽게 굴었다.

간밤에 둘 사이에 벌어진 웬만하지 않은 일이 생각났다.

“가 볼게요.”

다봄이 서둘러 주혁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사라지는 딸을 보며 짧게 혀를 찬 주혁은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 * *

다봄은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주혁이 준 USB 속 파일을 확인했다.

파일을 하나하나 살피는 내내 다봄의 표정은 더없이 굳어갔다.

이런 내용이 들어 있을 줄 예상은 했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마주한 현실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횡령, 뇌물, 선거법 위반, 그리고 마약. 뭐 하나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들이었다.

다봄의 손이 느려지고 시선이 느려졌다.

이 와중에도 누가 볼까 주변을 경계하느라 모든 근육이 경직되었다.

“어쩌지.”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걸 본 이상 주혁이 연광그룹에 발을 걸친다 해도 말릴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러다 진짜 눈 깜짝하면 자신이 늘봄을 책임지게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단 제 걱정도 했다.

“부대표님, 이것들 오늘 내로 결재해 주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내일 회의에 앞서 확인하실 내용도 아래 넣어 두었습니다.”

멤버십 앱 오류 현상 처리, 2주간 신규 회원 증감 그래프, 예비 가맹점주들과의 만남 등.

다봄이 승희가 정리해 준 보고서를 확인하는 도중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서류를 넘기다 말고 환해진 액정을 곁눈질했다.

-언제 끝나요? 저녁 같이 먹어요.

건오였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레 제 핸드폰을 끌어와 그의 메시지를 다시 보았다.

바쁘게 굴러가던 머리 회전이 느려지고, 다봄에겐 두 선택지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어제 일을 인정하느냐, 외면하느냐.

인정하자니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고, 외면하자니 건오의 모습이 그려져 눈물이 날 것 같다.

“아…….”

“부대표님.”

“네?”

승희가 머리를 붙잡고 끙끙대는 다봄을 불렀다.

그녀는 머리를 헝클어트린 다봄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시계를 가리켰다.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어서 들어가 보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주혁이 건넨 파일을 확인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건오는 때맞춰 저녁을 제안했으니, 무슨 내용이든 서둘러 답장해야 했다.

도망과 인정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녀의 눈에 마침 USB와 남은 결재 서류, 확인해야 할 자료들이 들어왔다.

다봄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 * *

보통 재판 하루 전날 퇴근하는 건오의 모양새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정갈하게 매고 있어야 할 넥타이가 아래까지 쭉 늘어져 있는가 하면, 잘 넘기고 온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건오는 여느 날과 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곳 하나 없이 막 출근한 상태처럼 준수함을 유지했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냐. 나도 방금 왔어.”

오늘은 다봄이 차를 가져오지 않아 그녀 회사 근처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정말 조금 전에 도착했던 다봄은 막 받은 메뉴판을 건오에게 내밀었다.

“뭐 먹을래?”

“디너 코스 있네요. 그걸로 하죠.”

“그래.”

그들 옆에 서 있던 웨이터가 주문을 받고 자리를 비켰다.

다봄이 어색해할 틈도 없이 곧장 식전주가 나왔다.

잔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마시자마자 건오는 대화를 시작했다.

“잘 잤어요?”

그녀는 당황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에 몹시 힘썼다.

“아니. 너는?”

“저도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꾸며 낸 낯과 달리 솔직한 대답이 오갔다.

이어 관자 구이와 감자수프가 나왔다.

다봄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렸고, 건오도 그녀를 따라 식기를 들었다.

둘 사이의 묘한 침묵은 샐러드와 스테이크가 놓이고 그 접시가 빌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봄은 생각이 많았고, 건오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다봄이 여기까지 나와 자신과 저녁을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건오는 이 정적이 나쁘지 않았다.

그들 대화는 디저트와 커피가 나오고서야 다시 이어졌다.

“오늘도 커피 많이 마셨을 텐데 차로 주문하지 그랬어요.”

“다시 회사로 돌아가 봐야 해.”

“일이 아직 안 끝났어요?”

“응. 너도 야근이야?”

다봄도 그 앞에 놓인 커피를 눈짓했다.

건오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일 재판이라서요.”

“아.”

당혹스러워할 만한 대답이 아닌데 다봄은 당혹스러워했다.

그 찰나를 본 건오가 의아하게 그녀를 보자, 다봄은 짧게 고민하고는 커피를 비웠다.

“그럼 둘 다 바쁘니까 들어가 보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