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36/72)

36.

다봄은 완연히 긴장한 채 건오를 보았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그에게서 물러섰다. 조금 떨어져서 본 건오는 그녀보다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같이 자자.”

숨을 고른 다봄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시에 건오는 그녀만큼이나 불안정해졌다.

“뭐라고요?”

그는 거의 달려들 듯 물었고, 다봄은 최대한 침착하게 받아쳤다.

“같이 자자고. 내 침대에서.”

건오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일부러 감정을 배제한 듯한 다봄의 반응은 바라던 대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혼돈에 빠트렸다.

“들어가자.”

“무슨 생각이에요?”

그래서 건오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여유로움을 잃은 그를 보며 다봄은 태연한 척 대꾸했다.

“별생각 없어. 나는 너 믿으니까 쉽게 대답한 것뿐이야.”

믿는다는 흔해 빠진 말이 다봄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눈빛과 어조에서는 언제나 그랬듯 진심이 묻어났다.

건오는 얼이 빠졌다.

믿는다는 말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허탈하게 웃었다.

“그게 누나 무기였다면 잘 휘둘렀어요.”

자신을 믿는다는 다봄에게 건오는 어떤 짓도 할 수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그는 연신 입술 사이로 웃음을 흘리며 최고의 방어막을 친 다봄을 바라봤다.

그녀는 지레 찔려 고개를 숙였다. 어찌 됐든 건오가 말했던 것처럼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좋아요. 자러 가요.”

물론 그가 이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보낼 리도 없다.

건오는 머뭇거리는 다봄을 아무렇지 않게 이끌어 그녀의 방으로 데려갔다.

“불 끌게요.”

“어? 어어.”

다봄은 대답하고서도 침대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사위가 어두워졌다. 깜깜해진 방 안에 그림처럼 야경이 들어찼다.

화려하면서도 희미한 빛을 등지고 건오가 다가왔다.

그의 이목구비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던 다봄은 불현듯 손이 잡혔다.

“거기 서서 뭐 해요. 누워요.”

건오는 정말 그때처럼 안고 잘 생각인지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손을 당겼다.

힘없이 이끌린 다봄은 건오 위로 엎어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버텼다.

묵직한 건오의 체취와 향긋한 샴푸 향이 섞여 다봄의 코를 찔렀다. 이젠 그 냄새까지 부끄럽게 느껴진 다봄이 얼른 허리를 세우려 했다.

돌연 그녀의 시야가 바뀌었다.

“어차피 누울 거였잖아요.”

건오가 다봄을 눕히고 곁에 바짝 다가왔다.

“잠깐…….”

당황한 다봄은 다시 일어나고자 했지만, 그는 모른 척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넓은 품에 다봄의 손바닥이 닿고, 그의 어깨에 그녀의 이마가 닿았다.

“건오야 이런 거, 역시 이상한 것 같아.”

“싫어요?”

“싫은 건 아닌데.”

“그럼 불편해요?”

건오의 목소리가 다봄의 귓가에 울리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불편하지 않아. 자자.”

“잘 자요.”

다봄은 마주 인사할 여력도 없이 숨을 골랐다. 건오에게 들리기라도 할까 걱정될 정도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설렘과 그에 따른 죄책감이 다봄을 휘감았다.

그녀는 잠들지 못했다. 불가항력이었다.

눈을 감고 숨만 쉬며 건오의 품에 쥐 죽은 듯 가만히 안겨 있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야경도 지워진 깊은 새벽, 인형이라도 되는 듯 굳어 있던 다봄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하필 녀석의 쇄골이 바로 보였다.

앓는 소릴 삼킨 그녀가 잠결에 뒤척이는 척 몸을 돌렸다.

“왜 안 자요.”

그때 건오가 조금 멀어진 그녀의 허리를 도로 당겼다. 등 뒤에서 그의 단단한 가슴이 느껴졌다.

“잠깐 깼어.”

“계속 깨어 있는 것 같던데.”

“안 자고 있었어?”

다봄이 순진하게 묻자 건오가 작게 웃었다.

그는 내가 어떻게 잠들 수 있겠냐는 대답 대신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올렸다.

“잠이 안 와요?”

“아냐. 막 잠들려고 했어.”

“알겠어요. 그럼 방해 안 할게.”

건오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고쳐 안았다.

건오가 취해서 잠들었던 때와 지금은 많은 점이 달랐다.

그의 정신이 멀쩡한 걸 알고 있으니, 그녀는 건오의 손짓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다봄의 모든 오감은 건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은 건오의 손이 다봄의 허리를 감쌌다. 긴장한 다봄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건오는 그걸 알고서도 손을 떼지 않았다.

다봄이 다시 그를 마주 보도록 자세를 바꿨다.

“너.”

“내가 생각해도 좀 등신 같은데.”

그는 그녀가 부르길 기다린 것처럼 마저 속삭였다.

“이렇게 붙어 있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가 살며시 그녀와 이마를 맞댔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서로의 모습이 담겼다.

얼굴만 봐도 기분을 알 수 있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도 그녀도 도저히 서로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다봄은 그가 처음 보는 묘한 눈빛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은 건오의 욕망을 부추겼다.

그의 목울대가 선명하게 움직였다.

“나는 누나에게 어떤 짓도 하지 않겠다 했지만.”

목소리 끝이 탁하게 갈라졌다.

“누나도 날 등신처럼 생각하고 먼저 다가오면, 말이 달라질 거야.”

명령 같기도 한 그의 속삭임이 다봄의 어딘가를 내려쳤다.

기묘하던 그녀의 눈빛이 한순간 몽롱해지더니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건오에게 믿는다 하며 이 방에 들였는데, 그런 그를 두고 어떤 상상을 했나.

지그시 입술을 깨문 다봄은 조금은 조급하게 물었다.

“내가 네 믿음을 부수면?”

건오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다봄에겐 느리게만 보이던 그 찰나가 지나가자, 그가 그녀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믿음?”

건오는 비웃기라도 하듯 그 단어를 곱씹었다.

“누나가 내 믿음인데 그게 어떻게 부서져.”

그는 그녀의 시선에서 저와 다르지 않은 정염을 발견했다.

다봄은 그를 마주하길 포기하고 눈을 힘주어 감았다. 이어 그녀가 그의 목을 휘어 감았다.

그 이후는 본능이었다.

딱딱하고 부드러운 신체가 맞부딪치며 그들의 뜨거운 혀가 얽매였다.

건오의 혀가 그녀의 혀를 쓸어 올렸다.

그녀는 제 입 안을 헤집는 혀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다.

뒤섞인 타액 중 반이 그녀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반은 입가를 따라 흘렀다.

짐승처럼 몰아붙이는 건오의 키스가 벅차 다봄이 그의 가슴을 쳤다.

건오는 작은 주먹이 제 어딘가를 두드리자 그제야 입술을 뗐지만 그마저도 잠시였다.

다봄이 비명을 지르듯 숨을 고르는데, 그녀가 호흡한 걸 확인한 건오는 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평생 바라보기만 하던 붉은 입술을 깨물어 보기도 하고, 매끄러운 입술 선을 따라 혀를 움직여보기도 했다.

치열을 훑고, 점막을 핥기도 했다.

어디까지 허락한 건지 알 수 없는 만큼 그는 그녀의 입술과 입 안을 집요하게 탐했다.

가빠지는 다봄의 숨이 느껴질 땐 어느 정도 틈을 주기도 했지만, 그는 갈급한 갈증을 해결하려는 것처럼 바로 다시 그녀를 찾았다.

다봄은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봄이 겨우 팔을 들어 재차 건오의 가슴을 치자, 그는 마침내 허리를 세웠다.

그가 다봄의 눈앞에서 그녀의 타액을 삼켰다.

다봄은 정신이 아득한 와중에도 건오의 모습이 너무 야해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다급한 그녀의 호흡에 안달 난 숨이 섞였다.

“흐읏.”

건오의 시야가 흐려졌다.

짧게 다봄의 입술에 키스한 그는 연이어 그녀의 귓불을 삼켰다.

다봄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새는 소리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가 목선을 따라 혀를 내리자, 결국 잘게 끊어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이성만큼 본능이 커진 건오가 다리마저 얽었다. 그즈음 건오의 손이 다봄의 맨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눈앞이 흐려져 그의 모든 것에 잠겨 허우적거리던 다봄이 눈을 번쩍 떴다.

“잠, 시만.”

“…….”

“잠시만, 건오야…….”

다봄이 더운 숨을 몰아쉬며 그를 불렀다.

그녀의 명치 부근에서 멈춘 뜨거운 손 위엔 다봄의 손이 올라가 있었다.

욕정이 채 덜 가신 남녀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닥쳤다.

건오는 그녀만큼이나 뜨거운 호흡을 뱉으며 어깨를 오르내렸다.

“……여기까지 하자.”

결국 다봄은 그를 밀어냈다.

그녀는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하고선 건오의 품에서 멀어졌다.

그는 가만히 다봄을 내려보다,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다봄은 눈앞에 보이는 선연한 그의 신체에 얼굴을 붉혔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요.”

건오는 그 어느 때보다 야릇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우린 선을 넘었고, 난 후진할 생각 없으니까.”

건오가 눅진한 음성으로 통보했다. 그의 말이 이렇게 강요하듯 들린 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그를 올려보았다.

한껏 풀어진 그녀의 시선에 건오는 한숨처럼 욕설을 뱉을 뻔했지만, 꾹 참았다.

“집으로 갈게요.”

“지금?”

“여기 있다간 내가 누나 믿음을 깨부술 것 같아서.”

눈썹을 으쓱인 그는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입술 위에 그의 입술이 짧게 머물다 떨어졌다.

다봄이 그가 떠난 제 입술을 매만지는 사이 건오는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여기서 붙잡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거란 걸 다봄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매우 복잡한 길을 온 것 같지만.

* * *

“뭐냐, 너?”

신문을 가지러 나온 하람은 친구를 보며 미간을 모았다. 거실에는 건오가 어제 입었던 차림 그대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이제 다섯 시냐.”

눈을 감고 있던 건오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앉았다.

벌써 다섯 시냐도 아니고 ‘이제 다섯 시냐’라니.

“안 잤어?”

“어.”

잠이 들 수 없던 건오는 대충 대답하곤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가 물을 마시는 동안 하람은 새벽에 도착한 신문을 들여왔다.

건오 옆에 선 하람은 익숙하게 커피를 내리며 식빵을 토스터에 넣었다. 그리고 커피와 토스트가 완성되는 동안 건오를 빤히도 보았다.

건오가 컵을 내려놓으며 하람을 돌아봤다.

“왜?”

“궁금한 게 생겨서.”

“뭔데?”

“그 머리카락이 누구 걸까, 하는 그런 거?”

하람이 건오의 어깨를 가리켰다.

건오도 제 어깨 위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끝이 살짝 곱슬곱슬한 다갈색 머리카락이었다.

“알잖아.”

“알지. 아는데, 네 입으로 듣고 싶어서.”

“오늘은 뭐가 듣고 싶은데?”

빈 잔이 커피로 가득 차고, 토스터에서 잘 구워진 식빵이 튀어 올랐다.

하람이 빈 접시에 식빵 두 조각을 놓고 두 번째 캡슐을 커피 머신에 넣었다. 두 번째 잔이 천천히 채워졌다.

식탁에 먼저 자리를 잡은 하람은 식빵을 찢으며 물었다.

“연다봄이랑 너, 대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