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다봄은 지한과 늦은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곁들였다. 특별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날씨, 옷, 음식, 차, 일, 심지어 인테리어까지,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면서도 그들은 과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영화관에 차 놓고 와서 어떡해?”
“내일 가지러 가면 돼.”
“오빠 집이랑 멀잖아.”
“우리 집도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이렇게 불현듯 침범하는 기억은 그도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잊으면 바보지.”
다봄은 혹시나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얼른 웃어 보였다.
지한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마주 웃었다.
“그럼 이만 가 볼게.”
“응. 조심히 가.”
“봄아, 아직 나랑 만나야 할 시간 남은 거 알지?”
다봄의 아파트 앞에서 그는 가려던 발을 멈추고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한은 그제야 움직였다.
그녀도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쳤다.
그곳엔 입술 끝에 담배를 문 건오가 다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의 끝을 세게 씹었다. 특유의 냄새와 떫은맛이 건오의 비강을 타고 올라갔다.
죄라도 지은 것처럼 퍼뜩 놀란 다봄은 그 자리에 멈춰 녀석을 마주 봤다.
그러길 얼마.
다봄이 건오가 선 정자로 천천히 다가갔다.
“오빠한테 배웠어?”
담배가 그의 입술에서 그녀의 손으로 넘어갔다.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끝이 짓뭉개진 담배가 버려졌다.
“나머지도 줘.”
“나머지?”
“담뱃갑. 하나만 사진 않았을 거 아냐.”
다봄은 엄한 척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작은 손을 빤히 내려다보던 건오는 방금 산 담뱃갑을 순순히 꺼내 주었다.
“압수야.”
“내 기회, 벌써 넘어갔어요?”
담뱃갑을 떨어트릴 뻔한 그녀는 가까스로 손에 힘을 줬다.
그 짧은 질문에 다봄은 평정심을 잃고 겨우 말을 돌렸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전화했을 때부터.”
전화했을 때라면, 영화가 시작하기 전이었다.
“아…… 핸드폰이 꺼졌어.”
하필 그 순간 배터리가 아슬아슬하던 핸드폰은 영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꺼졌다.
“알아요. 곧 연락 준다며. 그래서 기다렸어요.”
여기서 다봄이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안해.”
“내가 보고 싶어서 기다린 거예요.”
건오는 이유를 지어내지 않았다. 그녀가 당황할 걸 알면서도 곧이곧대로 말했다.
그의 예상대로 당황한 다봄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건오는 그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피해요?”
“안 피했어.”
“왜 이렇게 주눅 들어 있고.”
“아니야.”
“정말 기회 넘어갔어요?”
그가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짙은 시선이 다봄에게만 박히니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깨를 바짝 올린 채 긴장한 다봄은 어디에라도 의지하기 위해 건오의 셔츠를 잡았다.
“건오야.”
“진짜 그래요?”
그의 눈빛이 점차 사나워지자 다봄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건오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기회를 줄 거면 공평해야지. 영화 보고 밥 먹고. 응?”
“그런 거 아니야.”
“나 봐요.”
다봄이 전화를 부재중으로 돌리고 영화를 본다 메시지를 남겼을 때, 건오는 바로 서지한이라는 걸 직감했다.
메시지 자체만으로도 속 시끄러운데, 하필 그녀는 정말 제가 상상한 놈과 함께였다.
“나 보라고.”
건오가 제 옷깃을 붙잡은 다봄의 손을 잡아끌었다.
한 발짝 당겨진 그녀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코앞에 건오가 보였다.
“나한테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결코 유하지 않은 눈매로 그녀만 바라보는데, 그 속에 담긴 간절함이 다봄은 아팠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지한 오빠는 아니야.”
“진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긴 하네. 그 호칭 하나로도 나는 별생각을 다 하거든.”
당황해서 변명하던 다봄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의 기저엔 유사한 감정이 깔려 있다. 서로를 응시하는 눈길의 온도는 사뭇 다르지 않았다.
기실 다봄은 그 감정을 인정하기 두려워 모른 척했다.
“누나.”
건오가 그녀를 앓듯이 불렀다. 그저 부른 것뿐인데 다봄은 그의 목소리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숨을 크게 들이켜고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버린 그녀는 그 손으로 건오의 손목을 잡았다.
“잠시만.”
‘따라와’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뜻대로 발을 움직였다. 덕분에 다봄은 순조롭게 건오를 이끌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녀의 차 옆엔 이미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가라는 거예요?”
건오는 주차장에 내려올 때부터 설마 하던 질문을 던졌다.
제집이 아니니 가는 게 당연했지만, 다봄이 밀어내듯 가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졌다.
“그게 아니라.”
다봄은 건오의 손목을 놓고 차에서 무언가를 찾아와 그에게 내밀었다.
이 맥락 없는 행동에 그가 의아해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머쓱하게 그 무언가를 더 내밀었다.
“네 생일선물이야. 원래 생일 전에 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 주게 되네. 담배도 뺏었으니까 대신 그거 가져.”
그녀가 하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다봄은 그걸 알면서도 횡설수설하며 시선을 내렸다.
지금 술렁이는 마음을 표현하자니 그 뒤가 무섭고, 그렇다고 초조해하는 건오를 이대로 두고 싶지도 않았다.
“들었다 놨다, 환장하게 정말.”
건오가 마른세수를 하면서 받아 들지 않자 다봄은 슬금슬금 직접 상자를 열었다.
언젠가 기대하라며 자신 있게 말했던 선물을 꺼낸 그녀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다봄의 가족이 챙기는 건오의 생일은 그가 주혁의 피후견인이 된 날이었다.
“이러면 반칙이에요.”
“매년 말해 왔지만.”
“그 말까진 하지 마요.”
우리 집에 와 줘서 고마워.
다봄은 그의 요청에 중요한 말을 아꼈다.
어느 때보다 복잡한 한숨을 내쉰 건오는 제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무거운 눈으로 응시했다.
기쁨과 동시에 서러움이 치받았다.
그녀가 선물을 고민했을 모습이 눈에 보여 기쁘지만, 정작 원하는 건 이런 값비싼 물건이 아니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네가 말한 그, 기회 말인데.”
그때 다봄이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운을 뗐다.
건오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다봄을 봤다.
“너밖에 없어.”
“나밖에 없다고요?”
“응.”
“나뿐이라고?”
“그래.”
건오는 듣고 싶은 말을 유도하며 그렇게라도 술렁이는 마음을 잠재웠다. 적어도 지금 다봄은 진심이었다.
이런 제 꼴이 웃겨 건오는 자조했다.
“이제 갈 거야?”
그런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다봄이 물었다. 말간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움찔한 건오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녀는 순수하게 질문했고, 건오는 불순하게 되물었다.
“가지 말까요?”
이번엔 다봄이 어깨를 흠칫했다. 그녀가 이마를 긁적이며 애먼 바닥을 보았다.
“네가 편한 대로 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네가 편한 대로…….”
“내가 같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는 얼버무리려는 다봄의 의도를 무시했다.
“말해 봐요. 응?”
거기다 아닌 듯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의 태도가 조금은 집요하게 느껴졌다.
“나는 상관없어.”
다봄은 당황하여 눈동자를 굴렸다.
“그렇겠죠. 근데 누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잖아. 나도 누나가 원하는 게 듣고 싶어요.”
원하는 것.
소란스럽던 다봄의 눈길이 건오에게 천천히 고정되었다.
“가길 원하면 갈게요.”
“아냐.”
다봄은 반사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가지 마.”
건오는 잡다한 생각을 멈췄다. 그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위험하게 상승한 곡선을 본 다봄의 고개가 푹 내려갔다.
“누나가 바란다면.”
그는 다봄을 스쳐 지나가며 제가 돌아가지 않는 게 그녀의 바람이라는 걸 콕 짚어 주었다.
다봄이 민망한 얼굴로 건오를 뒤따랐다.
* * *
“머리 털어 줘요.”
다봄은 건오와 그가 제게 내민 수건을 번갈아 봤다. 그녀만 황당한지 건오는 아주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방울이 그의 짧은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다봄은 결국 수건을 건네받고 그를 소파에 앉혔다.
“이리 와.”
젖은 탓에 더욱 까맣게 보이는 머리카락을 살살 털어 주면서도 그녀는 시선을 함부로 돌리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것쯤이야 눈을 마주치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다봄이 무시 아닌 무시를 하고 있는데, 건오가 물었다.
“오늘도 같이 잘래요?”
나름대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다봄의 손이 멈췄다.
잠시 입술을 말아 물고 정신을 차린 그녀가 계속해 녀석의 머리를 털어 주었다.
“이번엔 편하게 누나 침대에서요.”
“…….”
다봄이 무시해도 그는 발칙한 말을 이었다.
“그때 진짜 잘 잤는데.”
결국 그녀는 수건을 놓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수건에 그의 얼굴 반이 가려졌다.
다봄이 높이 솟은 녀석의 콧대와 붉은 입술을 괜히 흘겨보고 있으니 그가 웃으며 수건을 치웠다.
잘난 얼굴이 그녀를 향해 나른하게 웃는다.
“나는 누나가 이렇게 잘 빨개지는 줄 몰랐어요.”
“자꾸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닌데.”
건오는 그녀의 귀를 대놓고 살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봄은 실눈을 뜨고 건오를 흘겨보았다.
“다 진심인 거 알잖아요.”
하지만 그대로 목까지 발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열이 오르는 걸 느낀 그녀는 억울해졌다.
“그렇게 말하니까 놀리는 것 같잖아.”
“그럼 진지하게 해 줄까요.”
건오가 그녀를 따라 소파에서 일어섰다. 다봄의 고개가 그를 따라 절로 올라갔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도망갈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선 움직이지 않았다.
건오는 잘하고 있다는 듯 눈웃음을 그렸다. 다봄이 좋아하는 외양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누나랑 같이 자고 싶은데.”
“…….”
“그래도 돼요?”
나직한 저음과 함께 위험한 미소가 다봄의 심장을 덜컹 내려앉게 했다.
답은 정해져 있다. 여기서 그녀가 농담처럼 받아치면 분위기가 이상해지지도 않을 터다.
그게 되겠어?
이때까지만 해도 다봄은 더듬거리더라도 미리 계산한 대로 대꾸하려 했다.
“누나가 꿨던 꿈이 오늘 일어나진 않을 거예요.”
꿈.
그녀가 잊지 못할 몇 안 되는 꿈 중 건오가 이렇게 말할 꿈이라면 그것뿐이다.
다봄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걸 어떻게…….”
“광고 촬영 전날, 누나가 직접 말해 줬어요.”
건오는 필름이 끊긴 다봄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되살렸다.
그는 아연한 그녀를 앞에 두고 덧붙였다.
“이제 누나는 능력껏, 최선을 다해 대답만 해 주면 돼요.”
‘뭐든 갖게 해 줄 거예요?’
‘능력껏, 최선을 다해 볼게.’
다봄의 머릿속에 지난날 그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고, 건오는 영악하게 물었다.
“어때요. 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