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다봄은 얼굴을 화르르 붉혔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건오의 뻔뻔함에 제가 대신 부끄러워졌다.
계속 이마를 배회하는 그의 손길에 수줍어져 다봄이 몸을 뺐다.
“왜 그래요?”
왜 그러냐고?
다봄은 황당해져 입술을 벌렸다. 그는 정말 모르겠단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놀리는 거 아닌데.”
“알아. 어쨌든 그만 봐.”
다봄이 곤란한 듯 이마를 가렸지만, 발갛게 변한 뺨의 색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건오는 그만 보라는 말을 어디로 들었는지 그녀가 손바닥으로 덮은 이마와 그녀의 뺨을 번갈아 살폈다.
몇 번 거듭해서 다봄의 기색을 살피던 그는 돌연 눈썹을 으쓱였다.
“오늘 아침에 언제 일어났어요?”
“나?”
다봄은 이마를 가린 손을 내리고 시선을 피했다.
“너 일어나고 깼지.”
이어진 대답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건오는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다봄은 제가 잠에 취해 키스할 때 깨어 있었다.
그는 낯짝 두꺼웠던 제 행위들을 되짚어 봤다. 답지 않게 민망함이 차올랐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알면서 모른 척했어요?”
“뭘 모른 척했다고 그래.”
다봄은 시치미를 떼며 차를 들이켰다.
커피도 차도 여유롭게 마시는 그녀의 잔이 벌써 반 이상 비었다.
“꿈인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나는 모른다니까?”
“싫었으면 사과할게요.”
“하지 마.”
반사적으로 대답한 다봄은 제 대답에 눈을 깜빡였다. 건오가 그 눈을 보며 생긋 웃었다.
그녀는 서둘러 찻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안녕히 가세요.”
직원의 인사를 뒤로하며 카페를 벗어나 빠르게 걷는 그녀를 건오가 거리를 두고 뒤쫓아 걸었다.
그도 시간이 필요했다. 또 한 번 저 이마에 입술을 누르고 싶어서.
“그만 가 봐.”
그녀는 그의 차 앞에서 건오를 올려다봤다. 이제 그의 차는 입주민 차량과 다름없이 주차 중이었다.
건오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다봄의 모습을 보았다.
“이마에 키스했는데도 날 피하지 않는 건 그저 약속 때문이에요?”
“모르겠어.”
회피가 아니었다.
다봄은 혼란스러웠다.
제가 이래도 되는 건지, 이게 맞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뭐가 됐든 고마워요. 도망치지 않아서.”
그 말에 왜 덜컥 두려워지는지.
“……난 가서 쉴게.”
건오는 도망치지 않아서 고맙다 했지만, 그 인사가 무색하게 다봄은 도망치듯 집으로 올라왔다.
* * *
지어진 지 오래된 주택들 사이를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면, 역시나 지어진 지 오래된 주택 하나가 나온다.
주혁은 낯선 듯 낯설지 않은 대문 옆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연주혁입니다.”
-연주혁이요?
인터폰 너머 누군가 그의 이름을 되물었다. 그리고 대문이 열렸다.
주혁을 알지 못하는 가정부 아주머니 대신 아들의 이름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문을 열어 준 것이다.
“얘는 왜 연락도 없이 왔어?”
금옥은 마음에도 없는 타박을 하며 버선발로 마중을 나왔다.
찾아뵌 지 오래된 어머니는 백발에 우아하신 모습 그대로였다. 그게 내심 다행이면서도 죄송해 주혁은 살갑게 웃어 보였다.
“얼마 만에 보는 거야, 이게? 저녁은 먹었어?”
“아직이요.”
금옥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선 주혁은 고개를 돌려 내부를 훑어보았다.
금옥만큼이나 이 집도 여전했다. 가구며, 액자며 그 위치 하나 변하지 않았다.
넓게만 느껴졌던 집을 뛰놀던 아이는 학생이 되고 청년을 지나 중년이 되었다.
“우리 막 들려던 참이야. 수저만 놓으면 돼. 아, 얘는 우리 막내아들이에요.”
주혁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선 금옥은 가정부에게 아들을 소개한 뒤 일찍 퇴근을 권했다.
가정부와 짧은 묵례로 인사를 나눈 주혁은 금옥을 따라 주방에 들어갔다.
식탁 의자에 앉아 있던 일석과 주혁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야?”
금옥이 일석의 등을 찌르며 눈치를 주었지만, 왕래라고는 없던 막내아들이 예까지 찾아왔으면 틀림없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도 오랜만인데, 식사는 하고 얘기할게요, 아버지.”
“어서 앉아, 주혁아.”
금옥은 밥을 잔뜩 퍼 주혁 앞에 놓았다.
“많이 먹어.”
“잘 먹겠습니다.”
커다란 식탁에 한 자리가 더 채워졌다.
금옥은 막내아들더러 많이 먹으라 해 놓고, 그 아들을 보느라 정작 본인은 잘 먹지 못했다.
일석과 주혁이 서재로 올라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금옥이 과일을 잘라 서재를 두드렸다.
“너 배 좋아하잖아.”
“……맞아요. 감사해요.”
“얘는, 남처럼.”
마지막으로 뵌 게 5년 전이다. 그만큼 못 봤으면 서운할 만도 한데 금옥은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본인이 선하에게 얼마나 지독하게 굴었는지 잊지 않았기에 그랬다.
“그래. 왜 찾아왔어?”
피치 못하게 종종 얼굴을 봐 왔던 일석은 역시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혁도 더는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다봄이 기사 보셨습니까?”
“그래.”
“누가 그랬는지도 아십니까?”
손녀 이야기에 금옥의 귀가 쫑긋 섰다.
서재를 나가려던 그녀는 슬그머니 발을 멈췄고, 일석은 잠잠히 대답했다.
“네 새끼 건드린 것치고는 반응이 느리구나.”
안다는 얘기였다.
주혁은 일석 앞에서 평정을 다잡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새끼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둘을 건드렸습니다.”
“그 애까지 싸고도는 거냐? 넌 다봄이 하나 감싸기에도 벅차 보이는데.”
“둘 다 제 자식입니다. 그래서 연태철을 그냥 둘 생각이 없습니다.”
“네가?”
비웃음이 아니었다. 일석은 주혁이 어떻게 할 생각인지 정말 궁금했다.
원체 정석적이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막내아들이었다.
부부는 그런 녀석이 화가 나면 상당히 극단적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연태철…….”
주혁은 말을 이으려다 말고 금옥 쪽을 보았다. 금옥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계속하라며 손짓했다.
“연태철이 로비와 뇌물로 선거법을 위반한 증거와 연지웅의 마약 정황입니다.”
주혁이 그에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일석이 시선을 내렸다. 언뜻 봐도 두꺼워 보이는 봉투에 일석은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일석은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이걸로 연광을 치겠다는 거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금옥이 다급히 주혁을 잡았다.
“잠깐만, 주혁아. 네 형이랑 조카야! 다시 생각해 봐라.”
“어머니.”
“어떻게 이래. 어떻게!”
“전 거래를 제안하겠습니다.”
금옥의 숨이 넘어가기 전에 주혁은 서둘러 운을 띄웠다.
일석은 천천히 안경을 추켜올렸다. 침착함을 되찾은 일석의 모습에 주혁은 아이 때처럼 긴장했다.
날카로운 그의 시선이 매섭게 주혁을 찔렀다.
“이미 이 사실을 아버지께서 아셨을 수도 있고 모르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셨든 모르셨든, 전 아버지의 선택지를 압니다.”
일석에게 연광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감히 값어치를 따질 만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런 회사를 연태철, 연지웅 부자에게 물려줬다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안 봐도 훤했다.
일석은 주혁의 성향을 아는 것처럼 다른 자식들의 성향도 알고 있다.
이 일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태철과 지웅은 회사를 경영할 그릇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주혁은 일석의 선택을 짐작했다.
“아버진 지금, 다봄일 욕심 내고 계시잖아요.”
누군가에겐 충격일 수도 있는 말을 주혁은 과감하게 던졌다.
그리고 일석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제가 먼저 연광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주혁의 제안에 일석은 처음으로 놀랐다.
“네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고 다봄이가 하루아침에 기업을 이끌어 갈 수는 없습니다.”
“안다. 아니까 내가 이리 구는 게 아니냐.”
일석이 그제야 답답한 감정을 내비쳤다.
송열 그룹을 소개한 것도, 내키지 않지만 태철의 제안을 따라 늘봄부터 계열사로 만들어 보려던 것도 전부 다봄을 연광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발판이었다.
“이대로 두면 연태철은 더한 짓을 하겠죠. 이미 저지른 죄에 죄를 더하는 꼴을 아버진 두고 볼 수 없겠고. 그러니 저부터 들이시죠.”
“그 후엔?”
“그 안에서 제가 세력을 만들 겁니다. 훗날 다봄이를 제 편도 없는 곳에 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형의 비리를 무기로 형의 자리를 빼앗아 아무 짓도 못 하게 하려는 동생.
그 대화를 들으며 금옥은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일석은 시간이 갈수록 눈앞이 명확해졌다.
“다봄이 세력을 만들면, 넌 다시 늘봄으로 가는 거냐?”
“그렇습니다.”
“다봄이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땐.”
주혁이 처음으로 머뭇거리다, 힘없이 웃었다.
“글쎄요. 꿩 대신 닭이 계속 있어 볼까요.”
그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자식들의 싸움을 눈앞에 두고서도 일석은 모처럼 편안한 표정이었다.
일석에겐 누가 꿩이고 누가 닭인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으니 만족할 만도 했다.
곁에 선 금옥만 이를 어쩌냐며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주혁은 저런 극단적인 면모가 제 아버지를 똑 닮아 있었다.
* * *
지한과의 관계가 알려진 건 생각보다 다봄에게 나쁘지 않았다.
굳이 떨어져 걷거나 괜히 고개를 숙이는 등의 불필요한 일이 없다는 점이 그러했다.
그렇다고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뭐 예매했어?”
“경성연가. 드라마가 영화로도 나왔대.”
“나 그거 보고 싶었는데 잘됐다.”
그녀는 영화관에 들어와서야 영화 제목을 알았다.
복작복작한 사람들 틈 속을 헤치고 자리를 잡은 다봄은 주변 시선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지만, 태연한 척했다.
“배 안 고파?”
“괜찮아. 오빠는?”
“나도.”
상영관 조명이 꺼지고 광고가 흘러나왔다.
그때 무음으로 돌려 둔 다봄의 핸드폰이 반짝였다.
건오의 이름이 뜨자 그녀는 저도 모르는 새 초조해졌다. 지한도 그녀의 액정을 보고 있었다.
“…….”
울리던 전화가 끊겼다. 다봄은 빠르게 문자를 써 내려갔다.
[영화관이야. 나중에 연락할게.]
문자를 보내자마자 광고가 끝났다.
지한의 고개가 한 박자 빠르게 정면을 향했다.
다봄이 느리게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 * *
영화가 끝난 뒤, 영화관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로 엘리베이터가 혼잡했다.
그들은 나중에 내려갈 생각으로 엘리베이터 근처 의자에 앉았다.
“어땠어?”
“너무 재밌었어.”
다봄은 상기된 표정으로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 지한은 내심 안도했다.
그녀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게 처음이라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취향에 맞은 모양이었다.
“나도 재밌었어. 밥은 뭐 먹을래? 내가 이쪽은 잘 몰라서.”
“근데 오빠.”
어느새 핸드폰을 꺼내 쥔 다봄이 그를 올려다봤다.
“말해 둘 게 있어.”
“응.”
지한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표정을 담담하게 꾸며 냈다.
다봄이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동안 사람들은 전부 사라지고, 다음 타임 영화가 시작됐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다시 붙잡지 않고 서로를 보았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다고 해서 내가 흔들리지는 않아.”
지한은 제 표정이 잘 유지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꼬리를 올렸다.
지한과 눈을 마주한 그녀는 안타깝게 그를 바라보다, 비장한 모습으로 이어 말했다.
“오빠랑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 봤자 난 오빠랑 다시 시작하지 않아.”
“괜찮아.”
지한이 그린 듯한 눈웃음을 덧댔다. 다봄은 그와 정반대의 얼굴이 되었다.
“네 마음 다 알고 있으니까.”
그의 얼굴은 울 듯 웃었고,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다봄은 모른 척했다.
“이만 가자.”
지한이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섰다. 그녀도 떨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