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33/72)

33.

다봄의 사무실에 지한이 들어섰다.

커피 대신 카모마일 차를 내놓은 승희는 심상치 않은 다봄의 기세에 어느 때보다 빠르게 사무실을 나왔다.

승희에게 9층 직원들의 메신저가 쉴 틈 없이 날아왔지만, 그녀도 아는 바는 없으니 모두 씹었다.

“무슨 말을 할지 무서운데.”

지한은 한가롭게 다봄의 공간을 구경하다가 가볍게 운을 띄웠다.

전혀 무서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다봄의 눈꼬리가 바짝 올라갔다.

그와 연인이었던 그녀는 어떻게 하면 지한의 태연한 얼굴이 무너질지 잘 알았다.

다봄은 테이블 구석에 놓인 메모장과 펜을 집어 그에게 들이밀었다.

“계좌 알려줘. 돈 보내 줄게.”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다봄은 무섭게 굳은 지한의 표정을 보고서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아니면 현금으로 줄까?”

“너, 뭐 하는 거야?”

“시세도 반영해 줄 수 있어.”

“뭐 하는 거냐고.”

“오빠는 뭐 하는 거야?”

지한은 화가 난 다봄을 응시하다 한발 물러섰다.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널 보호해야 했으니까.”

“보호라고?”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나와 함께했으면 했어. 이런 일만 아니었으면 평생 말할 생각도 없었어.”

“그래. 평생 바보 될 뻔했지. 남자친구가 1억이나 보낸 것도 모르고. 오빠는 날 보호한 게 아니라 바보로 만든 거야.”

“다봄아.”

그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게 미움 살 짓이었나.

지한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가 말을 잇지 않고 다봄을 바라보기만 하자,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말 안 한 이유가 보호라고 말하지만, 오빠는 오빠를 보호하고 싶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지 마.”

지한은 그것만큼은 더 듣고 있을 수 없는지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다봄은 멈추지 않았다.

“오빠는 상의하지 않고도 내 대답을 알았어. 스물넷의 나는 돈 같은 거 주지 말라고, 무시하라고 했을 게 뻔하니까.”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지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봄은 그 모습을 보며 이 이상 날을 세우지 않았다.

“오빠는 나도, 자존심도 잃기 싫었잖아.”

그녀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는 넋이 나간 낯으로 다봄을 보다 얼굴을 마구 쓸어내렸다.

다봄은 알고 있었다. 지한이 가장 인정하기 싫었던 속내를.

그가 다봄에게 내세울 거라고는 국가대표, 그 하나였다.

부족할 것 하나 없이 자란 다봄에게 느껴지는 이질감, 그리고 자격지심.

지한은 그 감정을 모른 척하며 다봄을 사랑했다.

그는 성적도 돈도 필요했다. 그게 있어야지 다봄을 만날 수 있었다.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다봄이 조금은 부담스럽고, 어쩌면 방해가 된다 생각했던 적도 분명 있었다.

‘이해해 줄 수 있잖아, 봄아.’

‘아니, 그런 거 안 할래.’

‘네가 이러면 내가 너무 힘들어.’

‘……나도 지쳐, 오빠.’

지한은 막막해졌다.

과거의 자신은 제 생각보다 욕심이 많았고, 과거의 다봄은 제 생각보다 많은 면면을 알고 있었다. 그런 치졸한 마음까지 말이다.

“아빠랑 무슨 얘기 했어?”

그의 얼빠진 얼굴이 마음에 걸린 다봄은 머뭇거리다 주제를 돌렸다.

지한은 끝까지 모질게 굴지는 못하는 그녀의 성정에 쓴웃음이 났다.

“지난날 돈을 받았던 사람이 찾아왔어. 난 고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누가 찔렀는지 알려 달라고 했고.”

“……정말 큰아버지야?”

“응. 연광그룹 연태철.”

주혁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확인한 다봄은 기가 막혀 이마를 짚었다.

“미안해.”

“뭐?”

이 시점에서 다봄의 사과를 들을 줄은 몰랐던지라, 지한은 기막힌 목소리로 되물었다.

민망한 다봄은 지한을 보지 않고 얘기했다.

“어쨌든 큰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아니야.”

다봄이 지한을 향해 도로 시선을 들었다.

이렇게 단정 짓는 게 지한이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다봄에게 사과했다.

“나도 미안해.”

다봄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이렇게 괜찮다 해 주는 다봄이라, 그때 자신은 당연하게 그녀의 사랑을 바랐다는 것을.

“봄아, 나한테 네 시간 있는 거 알지?”

“응.”

지한은 늘봄 이벤트 때 조건으로 걸었던 다봄의 시간을 꺼내 들었다.

“내일 영화 보고 밥 먹자. 내가 예약해 놓을게.”

“예약이라면…… 영화관에서?”

평범한 코스지만 다봄은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와 그녀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서로 시간을 내 만날 땐 영화를 보는 시간이 아까웠고, 그들이 데이트하는 날엔 이미 약속했던 영화가 내려가 상영관이 없기도 했다.

물론 지한이 영화관을 불편해하는 것도 한몫 했다.

“그래도 돼?”

“응.”

그때와 달리 지금의 지한은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웃었다.

그는 다봄과 연애하던 시절에 해 보지 못한 아주 평범한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이런 미련이 남지 않게 말이다.

“나 내일 언제 끝날지 몰라.”

“밑에서 기다릴게. 천천히 내려와.”

“1층에서?”

“응. 나 늘봄 모델이잖아.”

지한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곤 일어섰다.

다봄이 그를 따라 일어서자 지한은 다시금 확인했다.

“시간 내 줄 거지?”

“약속이니까.”

“그럴 줄 알았어.”

다봄이 굳이 약속이란 단어를 들먹인 걸 알면서도 그는 싱긋 웃었다.

지한의 미소가 불편한 그녀가 손만 꼼지락대고 있으니, 그가 사무실 문고리를 잡았다.

“이만 가볼게. 내일 보자.”

“끝나고 연락할게.”

“그래.”

다봄은 무심코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승희와 직원들은 둘 사이를 실감하며 침착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 * *

다봄은 일을 마치고 회사 근처 샐러드 가게에서 저녁을 포장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니, 그녀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소파 위에 떡하니 개켜진 이불이었다.

건오의 흔적이자 자신의 흔적인 이불 옆에 털썩 앉아 괜히 그것을 흩트렸다.

둘이 눕기엔 너무도 좁은 이곳에서 건오와 함께 잤다.

맨몸이 부대끼는 건 아니었지만, 다봄에겐 똑같이 자극적이었다.

넓은 품에 안기니 단단한 몸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조용히 내쉬는 숨이 뜨거웠고, 큰 손이 닿은 곳이 긴장됐다.

게다가 이마에 닿았던 것은 분명 건오의 입술이었다. 그때 다봄은 눈을 뜨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평소의 건오였다면 그녀가 깨어 있단 걸 눈치챘겠지만, 그러지 못한 걸 보면 그도 여러모로 무척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래놓고 그렇게 태연해?”

다봄은 출근 직전 너무도 멀쩡했던 건오를 떠올렸다.

그는 그녀를 안고 잔 것도, 이마에 키스한 것도 모두 없던 일인 것처럼 굴었다. 다른 때보다 더 담담하고 여유로웠던 것도 같다.

그래서 다봄도 그에 맞춰 연기하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이 억울한 감정은 뭘까.

“백건오.”

건오가 들었다면, 왜 또 성을 붙여 부르냐며 물었겠지.

다봄은 이만 이불에서 손을 떼고 식탁에 앉았다.

포장해 온 샐러드를 열어 막 한 입 먹으려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밥 먹었어요? 누나 집에 놓고 간 게 있는데.]

다봄은 바로 포크를 내려놓고 문자에 답장했다.

[어떤 거? 챙겨 놓을게.]

일부러 밥 먹었냐는 말엔 대답하지 않고, 녀석의 속뜻을 모른 척했다.

다봄은 제가 보낸 대답이 우스웠다.

[집이면 지금 가지러 갈게요.]

[그래.]

다봄은 짧은 답문을 보내고 오갔던 문자를 올려 읽어봤다. 이제 보니 다봄이 한 발짝 물러나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의도를 외면했다.

다봄이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는 모습을 보여도 건오는 꿋꿋했다.

‘아니면, 익숙한 건가.’

다봄은 그의 그런 점이 곤란하기도, 곤란하지 않기도 했다.

그의 마음을 알고 나니 보이지 않던 게 보이는 건, 확실히 곤란하긴 했다.

다봄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포크를 들자마자 벨 소리가 울렸다.

방문자를 확인한 그녀는 공동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머지않아 건오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너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도착해서 문자했으니까요. 밥은?”

“샐러드 먹으려고 사 왔어.”

“아직 먹진 않았죠?”

“응.”

“그럼 나가요. 맛있는 거 먹게.”

그는 현관에서 서서 구두도 벗지 않고 밖을 향해 턱짓했다.

“너 뭐 놓고 갔다며.”

“그런 거 없어요. 옷 걸치고 나와요.”

“건오야.”

“나 배고파요.”

머리가 좋은 녀석은 다봄이 약한 부분을 대놓고 건드렸다.

그래서 다봄은 못 이긴 척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 *

“어제 윤 사장님이랑 아빠랑 만났다며.”

“네.”

건오는 다봄을 보지 않고 다봄 몫의 생선 살을 발라 주며 대답했다.

그녀의 잡곡밥 위에 하얀 생선 살이 올라왔다.

“원치 않게 이런 일이 알려져서 곤란하셨겠다. 너도 불편했지?”

“두 분이 꽤 잘 통하더라고요. 어서 먹어요.”

“그래도.”

“누난 걱정할 거 없어요.”

밥 위를 생선 살로 덮을 기세로 젓가락을 움직인 건오가 드디어 다봄을 마주 봤다.

그는 불쾌한 표정을 애써 덮으려 했지만 전부 감추진 못했다.

“다시는 못 건드리게 할 테니까.”

대기업이 언론사에 광고를 빼며 척지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는 관계다. 그 불문율을 믿고 안일하게 굴던 다른 언론사들도 한강일보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돈 앞에서 태도를 바꿨다.

이제 연태철 차례다.

“식겠다. 얼른 먹어요.”

건오가 다시 생선에 집중하자, 다봄이 뭉그적거리며 수저를 움직였다.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가 먹는 모습을 확인한 건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걸쳤다.

본인이 주는 대로 말없이 받아먹는 다봄은 그에게 묘한 고양감을 안겨 줬다.

“너도 먹어.”

“먹고 있어요.”

조용히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둘은 나란히 다봄의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언제부터 걷는 속도가 느려진 건지 모르겠다.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걷는데 둘 중 누구도 발을 빨리하지 않았다.

“잠깐 커피 마실래요?”

“커피…….”

‘오늘 많이 마셔서 괜찮아.’

다봄은 생각 없이 나오려던 말을 멈췄다.

다봄이 건오를 살며시 올려다보니, 그는 대답을 기다리며 그녀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 뒤에 내가 좋아하는 데 있어.”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골목을 가리켰다.

“이러다 늘봄 가는 거 아니죠?”

그의 농담에 다봄이 살짝 웃었다. 덕분에 긴장한 줄도 모르고 있던 그녀는 어깨를 늘어트릴 수 있었다.

건오는 다봄의 보폭에 맞춰 걸으며 연신 그녀를 흘깃흘깃 내려다봤다. 정확히는 다봄의 이마를 보았다.

어쩔 수 없이 자꾸 눈길이 갔다.

“커피 말고 차 마실래?”

“좋아요.”

카페에 앉아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이 계속 이어지자 다봄이 제 머리를 손으로 훑었다.

“나 뭐 묻었어?”

“아뇨.”

“자꾸 보길래 뭐 묻은 줄 알았어.”

다봄이 따뜻한 차를 마시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 그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저 작은 몸이 밤새 제 품에 안겨 있었다. 한 이불을 덮고 같은 곳에서 눈을 떴다. 그 생각이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건오는 건조한 입가를 문질렀다.

다봄에게도 초조해하는 그의 기색이 느껴졌다. 그녀가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건오야?”

“이마.”

“응?”

건오가 다봄이 매만지던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린 그가 엄지로 동그란 이마를 어루만졌다.

“이마가 되게 예뻐요,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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