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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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건오의 혼잣말 아닌 혼잣말은 다봄에게 가히 충격적이면서 동시에 몹시 부끄러운 말이었다.

그녀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굳어 있다가 건오의 셔츠를 그에게 던지듯 내밀었다.

다봄은 건오가 괘씸하기도 했지만, 우선 당황을 감추고 싶었다.

“빨리 입고 출근해.”

얼굴이 빨개진 채 씩씩거린 그녀가 잽싸게 자리를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혼자 남은 건오는 잘 다려진 셔츠를 걸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불은 세탁했어요.”

그가 어제 맸던 넥타이의 매듭을 조이며 다 듣고 있을 다봄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또 와서 자도 돼요.”

* * *

일월 법률사무소에서 건오와 하람을 제외한 직원들은 총 10명이다.

그러니 건오가 어제와 같은 옷차림으로 출근했다는 사실이 전 직원에게 알려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거기다 그가 연애한다는 소문까지 반나절 사이에 퍼지는 일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너 어디서 잤어?”

“누나.”

“……너 연다봄이랑 진짜 뭐 해?”

“뭐가 뭔데?”

“그러니까, 너도 알잖아!”

하람이 고래고래 고함 치며 직원들의 추측을 뒤받쳐 준 순간, 오늘 그들의 점심 수다 주제가 정해졌다.

하람은 외박한 동거인의 차림새를 몇 번이고 훑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말하기도 전에 표정부터 잔뜩 구긴 게, 얼마나 얘기하기 싫은 말인지 짐작케 했다.

“나 바쁘다.”

“나도 바빠.”

“잘됐네. 그만 시끄럽게 하고 나가.”

스스로 목소리가 큰 걸 몰랐는지, 그제야 하람이 소리를 죽여 물었다.

“걔가 왜 널 재우는데?”

“누나가 날 재우는 데 언제부터 이유가 필요했다고 이래?”

“연다봄이 네 마음을 안 순간부턴 필요하지.”

몹시 귀찮게 대꾸하던 건오가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의 표정이 정말 귀찮게 됐다고 말하는 것 같아 하람은 조금 울컥했다.

“둘이 진짜 뭐라도 할 거야?”

“그 뭔가가 연애라면 시작도 못 했으니까 속 뒤집지 마.”

“그렇지? 그런 거지, 역시?”

하람이 대놓고 안도하자 이번엔 건오가 울컥했다. 기대한 것도 없는 놈인데 이상하게 배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살벌한 건오의 눈초리를 보고서도 하람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둘이 만났다 쳐. 혹시 헤어지면, 부모님한테는 뭐라고 할 건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우리 부모님 너 애지중지하면서, 친자식처럼 키웠어.”

만나는 건 연다봄과 백건오지만, 그 연애는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람은 두 사람이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부모님을 꺼내 들며 경고 같은 걱정을 했다.

저 머저리 같은 짝사랑을 얼마나 지켜보았건, 하람도 일러 둘 건 일러 두어야 했다.

건오가 심각한 표정인 하람을 빤히 보았다.

“네 걱정은 뭔지 알겠는데, 연하람.”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그는 어느 때보다 진중한 시선으로 친구에게 전했다.

“놓칠 생각이면 진작 물러섰어.”

그의 눈빛에 집착과 소유욕이 덧대어졌다.

“누나가 내 마음을 알면서도 날 집에 들여 재웠어. 여기서 뒷걸음질 치면 내가 너무 등신 같지 않겠냐.”

하람에게는 미안하지만 건오는 더 인내할 여력도, 여유도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다봄이 품에 안겨 있었다. 그는 잠든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고, 그녀와 함께 출근했다.

다봄이 이런 일상을 딴 놈이랑 할 상상을 하면…….

그가 다봄의 집에서 조였던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 내렸다. 상상만으로도 벌써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답도 없는 새끼.”

하람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다봄이 죽으라면 죽을 놈에게 제가 한 소리는 망발밖에 되지 않을 터다. 하람은 그 사실을 망각한 스스로를 탓했다.

“너 진짜 징글징글하다.”

“나도 동의해.”

선뜻 대꾸한 건오는 문을 가리켰다.

이젠 정말 꺼지라는 뜻에 하람은 연다봄 손이 갔을 것 같은 옷차림을 괜히 노려본 후, 몸을 돌렸다.

그때 사무장이 노크하고는 두 사람을 찾았다.

“연 변호사님, 기사 좀 확인해 보십쇼.”

기사라는 단어에 진절머리가 난 하람이 얼굴을 팍 찡그리며, 사무장이 뽑아 온 종이를 받아 들었다.

건오도 비슷한 낯으로 물었다.

“서지한이야?”

“응.”

올 것이 왔다는 듯 하람이 굳은 눈으로 헤드라인을 훑었다.

어제 오후, 지한이 승훈을 통해 하람을 찾아왔다. 그때 하람은 건오와 함께 있었다.

<서지한, 지난날 한강일보에 총 1억 건네…… 연인 보호 위해>

하람은 지한의 기사를 속독했다.

다봄과 만나기 시작할 때부터 지한은 협박 같은 연락을 받았다. 그는 5,000만 원을 한강일보에 보냈고, 그 이듬해 5,000만 원을 추가로 보냈다.

그렇게 돈을 받은 언론사가 쑥쑥 크더니 서지한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물론 협박도, 1억도 다봄은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하람의 시선이 종이 끝에 다다르기 무섭게 사무장이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이것도…….”

“현재 반응입니까?”

“네.”

“거기 두고 나가 보세요. 수고했어요.”

사무장이 나가고 건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한은 에이전시를 통해 기사를 냈지만, 자문은 하람에게 얻었다.

에이전시의 법무팀은 지한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절대 다봄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자칫 많은 것을 밝혔다가 다봄의 소문이 이 이상 나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지한이 하람과 상담하고 있을 때, 주혁이 찾아온 건 우연이었다.

그는 딸의 사생활을 늘봄 법무팀에 맡기기보다 하람과 건오에게 부탁하고자 일월 법률사무소를 방문했다.

거기서 지한의 얘기를 들은 주혁은 말이 없어졌다.

신문사가 그 돈을 받아놓고 이제 와 지난 열애를 밝힌 이유에는 분명 태철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걸 한강일보에게 직접 듣기로 했고, 지한에게 협조를 구하며 하람과 건오의 조언을 받아 움직였다.

* * *

“늘봄과 제양에서 내년부터 광고를 전부 빼기로 했습니다. 저희가 작년에 이 계약을 어떻게 연장했는데…….”

한강일보 광고국 간부들이 뒤집혔다. 광고국장이 편집국장을 찾아가 하소연하는 소리가 사무실을 타고 넘어와 순식간에 사내에 퍼졌다.

후배에게 아이템을 준 경제팀장, 호령은 설마하니 서지한이 직접 돈을 보냈다 알릴 줄 몰랐거니와, 늘봄은 그렇다치고 제양까지 나설 줄도 몰랐다.

거칠게 이마를 문지른 호령은 바로 이 일을 시킨 태철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한데 걸기도 전에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는 편집국장이 떴고,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김호령! 이 새끼야!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그새 회장에게 불려갔다 온 편집국장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는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그러나 국장이 이러는 것도 웃긴 게, 그가 지난날 돈을 받은 실질적 주체였다.

물론 이번엔 혼자 받았지만 어차피 그건 회사에선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회사 손실이 얼만 줄 알아? 그 아이템을 보고도 안 올리고 내?

호령은 전화를 받으며 소스를 받아 쓴 후배 기자 이름을 검색해 봤다.

윤희 이름으로 나갔던 지한 관련 기사는 벌써 포털사이트에 뜨지도 않았다.

호령이 ‘말이라도 하고 자르지’라고 생각할 때였다.

-서지한 에이전시에서 너랑 나, 고소 들어갔다.

호령은 순간적으로 놀란 심장을 붙잡았다.

고소를 당하는 게 한두 해 일도 아니니 침착하게 대꾸하려 했다.

“어차피 고소는 언중위에서…….”

그러나 편집국장이 호령의 말을 끊었다.

-참나. 언중위? 돈 받은 거 알려졌는데 회사는 그냥 넘어갈 줄 알았냐? 책임지고 사표 갖고 올라와.

“……네?”

-지금 당장!

“국장님! 선배!”

호령이 애타게 부르짖었지만, 통화는 그대로 끊겼다.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회사로선 대기업 광고가 끊겼고, 호령은 고소를 당했다. 겨우 5,000만 원 때문에.

간이 작아 그 이상은 받지 못했기에 호령은 돈을 받고 기사를 쓰더라도 항상 5,000만 원이 전부였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그냥 더 받을걸.

“아이씨.”

정말 사표 내야 해?

그는 죽을상을 하고 핸드폰 액정만 내려다보았다.

태철은 끝까지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 * *

하루 만에 서지한과 연다봄은 피해자가 되었고, 알음알음 퍼지던 제양의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제양그룹이 언론사 지분은 없지만 여러 곳에 막대한 광고비를 내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거기다 지한은 사랑꾼 이미지가 씌어, 당시 그의 모습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오늘 벌어질 일을 알고 있던 주혁은 아직 혼란스러워 보이는 딸에게 넌지시 말했다.

“건오는 이제 걱정 안 해도 된다.”

“……어제 만나셨어요?”

“그렇게 됐어.”

어젯밤, 건오를 사이에 두고 주혁과 호섭은 중식당에서 회동을 가졌다.

주혁은 평소 잘 마시지 않는 고량주까지 마시며 세 시간 넘게 호섭과 얘기를 나눴다.

“윤 사장이 네 얘기도 하더라. 아주 좋게 보던데.”

“그렇게 됐어요.”

다봄은 아빠와 똑같이 대답하며 한시름 놓았다.

그래서 건오가 어제 그런 말을 했던 모양이다.

유난히 피곤해 보이던 그는 그 와중에도 그녀를 안심시켰었다.

‘건오도 기사를 봤겠지.’

다봄이 그를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어제 지한 군도 일월에서 만났다.”

“정말요?”

주혁이 지한의 얘기를 꺼냈다. 건오 생각으로 가득 찼던 그녀의 머릿속이 환기되었다.

“그래. 지한 군 말로는 너는 모르는 일이었다는데.”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

기사로 본 협박, 1억에 관한 거라면 다봄은 할 얘기가 없었다. 다봄이 눈을 피하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팔짱을 낀 주혁은 딸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봄과 건오의 일은 그렇게 대충 수습되었다. 그는 한시름 놨지만, 여기서 안도하긴 일렀다.

연태철이 제 자식들을 건드렸다.

이제껏 가만히 있어 준 대가가 이따위 상황이라면, 주혁은 더는 방관할 생각이 없었다.

“참, 지한 군이랑 혹시 다시 만나면 미리 말해 줘라. 엄마가 내심 기대하는 모양이니까.”

“기대 접으시라고 전해 주세요. 나가 보겠습니다.”

사과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급격히 뻣뻣해졌다.

내심 아쉬워하는 듯한 주혁을 두고 다봄은 대표실을 나섰다.

다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제 자리로 돌아왔다.

1억.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

그녀는 두통을 이고 근무를 이어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다가도 갑자기 1억이 생각났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식후 커피를 마시고 다시 모니터 앞에 앉고서도 문득 그 돈이 떠올랐다.

1억.

“커피 좀 사 갖고 올게요.”

다봄은 두 시간 전 마신 커피를 또 마시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만 몇 잔째더라. 그녀의 비서, 승희는 잠깐 숫자를 가늠해 보다 혀를 찼다.

1억.

“따뜻한 아메리카노 샷 추가해서 한 잔이요.”

빠르게 커피를 받은 다봄이 그 망할 1억을 생각하며 텀블러 뚜껑을 닫고 있었다.

커피를 내려 준 직원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조금 전에 서지한 씨가 로비로 나가셨어요.”

다봄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로비로 나갔다는 건 건물을 방문했단 소리였다.

“혹시 엇갈리신 걸까 봐 말씀드렸어요.”

“……감사합니다.”

직원이 무언가 오해를 한 듯했지만 다봄은 굳이 긴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텀블러를 들고 로비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9층에 멈추어 있던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왔다.

지한이 주혁을 찾아온 것이거나, 주혁이 그를 찾았거나 둘 중 하나일 터다.

웬만하면 다봄은 지한이 주혁을 대면하기 전에 대화하고 싶었다. 그 1억에 대해.

“먼저 방문하신 손님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봄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나 보네요.”

“그렇습니다.”

“그 ‘아무도’에 저까지 포함된 거예요?”

다봄은 알면서 재차 확인했고, 주혁의 비서는 눈으로 대답을 해 주었다.

다봄은 사무실이 보이는 인조 정원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셨다.

장장 40분이 지나고서야 지한은 주혁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다봄은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일어섰다.

“이제 저랑 얘기 좀 하죠, 서지한 씨.”

지한은 불쑥 다가온 다봄에게 평소와 다름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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