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다봄은 집으로 찾아온 건오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퇴근 후, 건오를 만나려 했던 다봄은 그를 만나지 못하고 집에 온 참이었다.
일하는 중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의 시간이 지나니 그에게서 집 앞이라며 연락이 왔다.
“기다렸어요?”
입꼬리를 올린 건오를 보고 다봄은 실눈을 떴다.
“뭐가 좋다고 웃어?”
“글쎄요.”
그는 약속도 없는데 다봄이 자신을 찾으며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따지는 게 좋았다.
건오에게 걱정은 애정의 형태였다. 그래서 다봄의 걱정은 예나 지금이나 그를 기쁘게 했다.
“바빴어요.”
“기사 봤어?”
“네.”
“네 개인사까지 실렸어.”
“그러게요.”
“미안해.”
답답한 넥타이를 끄르던 그가 다봄을 돌아봤다.
그녀는 어디 앉지도 못하고 곧게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사과할 줄 알았어요.”
그는 시선을 돌려 주방을 확인했다.
음식 냄새도 나지 않고, 물방울 하나 안 보이는 걸로 보아 집에서 저녁을 먹은 것 같진 않았다.
“누나가 퍼트린 것도 아닌데 왜 미안해해요?”
도로 다봄을 마주 본 그가 그녀보다 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저녁 먹은 거죠?”
“나랑 엮여서 너랑 제양에 피해가 갔어.”
“밥 먹었냐구요.”
“네가 그런 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애가 아닌데.”
아까부터 ‘얹혀살았다’라는 단어가 다봄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는 제가 다 상처받은 얼굴로 괴로워했다.
“누나. 나 봐봐요.”
“……너 술 마셨어?”
“조금.”
“속상해서?”
건오의 술 냄새를 맡은 다봄이 시무룩해지자 건오는 곧장 웃음을 터트렸다.
저보다 한참 작은 다봄이 더 작아진 것 같아서, 건오는 웃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웃었다.
“바빴다니까. 일하고 온 거고, 해결될 거니까 걱정 마요.”
술, 일, 해결.
묘하게 연결된 단어가 알 듯 말 듯해 다봄은 고개를 갸웃했다.
건오는 그녀가 파고들길 원치 않았기에 노련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밥이요. 아까부터 물었어요.”
“나 저녁 먹었어.”
“안 먹었네.”
시간은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마뜩잖은 눈길로 시계를 확인한 건오는 문득 한숨을 쉬었다.
“내가 식사 거를 때마다 누나가 이런 느낌이었나.”
“저녁 먹었다니까.”
“그래도 난 거짓말은 안 했는데.”
거짓말도 못 하면서 우기던 그녀는 입술을 물고 눈동자만 굴렸다.
같잖은 기사 때문에 그녀가 혼자 안절부절못하며 식사를 걸렀다고 생각하니, 건오는 채 삭이지 못한 화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짧게 심호흡한 그가 벗어 두었던 정장 재킷을 집어 들었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밥 먹어요.”
“안 먹어도 돼. 귀찮아.”
다봄은 손사래를 쳤고, 건오는 이마를 찌푸렸다.
다시는 다봄 앞에서 저런 말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도로 재킷을 내려두고 주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냉장고와 냉동고는 선하가 준 반찬들로 가득했다.
“그럼 간단히 준비할게요.”
“괜찮아. 너 술도 마셨다며.”
“조금 마셨어요.”
“그러고 보니 차 끌고 온 거 아니지?”
“택시 탔어요.”
건오가 달걀 세 개를 꺼내 그릇에 풀었다.
여기서 더 말려 봤자 말을 듣지 않을 게 뻔해, 다봄은 주방으로 들어가 반찬을 꺼냈다.
“그럼 차는 어디 뒀어?”
그가 냄비를 꺼내고 인덕션을 켰다. 달걀국이 완성될 때까지 건오가 대답이 없자, 다봄은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간단하게 차린 식사는 빠르게 끝났다.
다봄은 이대로 눕고 싶었지만, 건오가 설거지까지 하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
“내가 할게.”
“반이나 남겼네요.”
“입맛이 없어서.”
“치킨이나 시킬 걸 그랬나.”
“설거지 진짜 하지 마. 넌 이제 집에 가야지.”
다봄이 그를 만류하며 밀어냈다.
이미 셔츠를 걷어붙인 건오가 다봄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그도 그녀를 몸으로 살짝 밀어냈다.
그들은 몸이 맞닿은 채 서로를 주시했다.
“제가 설거지까지 하고 여기서 자고 갈게요.”
“자고 간다고?”
“술도 마시고 밥도 차려 줬으니까 재워 줘요.”
건오는 뻔뻔하고 당당하게 전혀 상관없는 이유를 들이댔다.
다봄은 쉬이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녀의 머릿속이 매우 바빠졌다.
“좋네요.”
“응?”
건오는 눈썹을 으쓱이며 그런 다봄을 지켜봤다.
“이전이라면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부터 끄덕였을 텐데. 그것보단 이 모습이 좋다는 말이에요.”
그는 참 담백한 어조로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하도 뚫어지게 보는 통에 다봄은 실랑이를 관두고 거실로 도망쳤고, 혼자 남은 건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머지않아 달그락거리던 식기 소리와 개수대에 흐르던 물소리가 멎더니 설거지를 끝낸 건오가 거실로 왔다.
“생각해 봤어요?”
소파에 앉은 다봄은 큰 결심이라도 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집에 가기 싫어?”
“네.”
“그래. 그럼 가지 마.”
“의외네요.”
대답과 다르게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봄의 옆에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다봄의 뒷모습이 보였다.
“미안해서 그래요?”
다봄은 돌아보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서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곧 다시 나타난 그녀의 손엔 그가 전에 입었던 옷이 들려 있었다.
건오는 흰색 반소매 티를 받아 들며 말했다.
“미안해하지 마요. 그렇다고 집에 갈 생각은 없지만.”
“말하는 게 점점 능청스러워지는 것 같아.”
“계속 말 잘 듣는 척했으면 여기서 자지도 못했죠.”
다봄은 그를 밉지 않게 흘겨봤다.
건오의 말처럼 미안해서 자고 가라고 한 것도 있지만, 사실 그가 걱정되어 보내기 싫었다.
가정사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 다봄도 그 사실이 적응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건오는 오죽할까.
“또 혼자 자책해요?”
“아니야. 얼른 씻고 와. 이불 줄 테니까.”
그에게 표정이 읽혔다는 걸 알아차린 다봄은 눈짓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곤 겨우 몸을 일으켰다.
다봄 앞에서 태연하게 굴긴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피곤함이 한계치를 넘어선 터였다.
건오가 느릿하게 셔츠 단추를 풀며 욕실로 향했다.
다봄은 아예 제집에 그의 셔츠 몇 개를 둘까 고민하다가 지레 놀랐다.
그의 지친 얼굴 탓에 앞뒤 없이 너무나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고 말았다.
“미쳤어, 진짜.”
앓는 소리를 흘린 다봄도 후다닥 제 방의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마쳤다.
긴 머리를 감고 말리느라 다봄이 씻는 시간이 건오보다 조금 더 길었다.
“건…….”
그래서 그녀가 건오의 베개와 이불을 챙겨 나왔을 땐, 그는 이미 소파에서 잠이 든 상태였다.
다봄은 건오를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발소리를 죽여 그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레 이불을 덮어 준 후엔 본인 방을 제외한 모든 조명을 껐다.
방에서 새어 나오는 미약한 불빛이 건오를 비췄다. 다봄은 그 빛에 의존해 그의 곁으로 다시 다가갔다.
여기서 이러고 자는 것도 속상해 베개라도 넣어 주고 싶은데, 머리를 들면 아무래도 깰 것 같아 망설여졌다.
베개를 안은 채 건오 옆에 주저앉은 다봄은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고요한 집 안엔 그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녀석은 깊게 잠들었다.
다봄은 결심했다.
“잠시만.”
건오는 듣지도 못할 소리를 나직하게 속삭인 다봄이 무릎을 꿇었다.
몸을 기울인 그녀는 오른팔로 그를 안듯이 뒤통수를 감싸 들고는 남은 손으로 베개를 넣어 주었다.
이제 건오의 머리를 든 오른팔만 빼면 됐다.
“헉.”
돌연 다봄의 몸이 건오 위로 무너졌다. 팔에 힘이 빠진 게 아니었다.
“거, 건오야.”
눈 깜짝할 사이 시야가 몇 번이나 바뀐 다봄은 건오의 가슴팍을 코앞에 두고 입을 벌렸다.
그가 다봄이 마치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품에 안아 올려 몸을 뒤튼 탓이다.
“저기.”
소파 등받이와 건오 사이에 낀 다봄이 그를 벗어나려 했지만 그의 힘이 너무 셌다.
“너 깬 거지? 깼으면…….”
잠에 취한 그의 큰 손이 다봄의 머리를 당겨 안더니 곧바로 허리를 감쌌다.
“잠깐만 잘게.”
다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의 몸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들 사이엔 얇은 천 두 겹뿐이었다.
다봄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마지막으로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건오는 그녀를 어르며 토닥이기까지 했다.
“쉬잇.”
그는 무의식 속에서 다봄의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고는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곧 집 안엔 다시 색색 소리가 퍼졌다.
그는 그렇게 깊게 잠들었다. 그러나 꼼짝할 수 없게 된 다봄은 도저히 침착할 수 없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소파보다 건오의 몸이 더 딱딱했다.
혹시 몰라 슬쩍 밀어 보기도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는 꿈쩍하지도 않았다.
“너 지금 연기하는 거 아니지?”
다봄은 조금 전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공연히 의심했다.
건오는 여전히 숨을 고르게 쉬었다.
“일어나서 봐, 진짜.”
현재 다봄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이 와중에도 건오를 아예 깨우는 방법은 그녀에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두 팔을 최대한 앞으로 모으고 눈을 감았다.
* * *
보통 다섯 시, 늦어도 여섯 시면 기상하는 건오가 오늘은 조금 늦게 눈을 떴다.
어둑한 기운이 가신 시간, 제집도, 소파도 아닌 곳에서 품 안에 다봄을 안고 있었다.
당연히 건오는 아직도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누나.”
그는 제게 안긴 다봄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러곤 본능대로 그녀를 더욱 끌어당기려 했다.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하지만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일순 모든 동작을 멈춘 건오는 천천히 양손을 들었다.
그는 벼락처럼 깨달았다. 눈앞에 벌어진 이 상황은 꿈이 아니었다.
잠이 확 달아난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왜 다봄과 소파에서 자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일단 차치했다.
다봄은 자고 있으니 키스한 건 모를 테고, 우선 소파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건오는 그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이대로 붙어 있다가 다봄이 깨기라도 하면 아주 민망한 상황만 벌어질 것이다.
지금은, 아침이었다.
건오는 잔뜩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소파에서 일어섰다.
‘일곱 시.’
시간을 확인한 그가 이마를 짚었다. 서둘러 욕실로 향하면서도 건오는 새근새근 잠든 다봄을 마지막까지 살폈다.
살며시 문이 닫히고 샤워기에서 물소리가 났다.
눈을 감은 다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그녀는 동이 틀 때부터 깨어 있었다.
* * *
건오가 나오는 소리에 맞춰 눈을 뜬 다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출근을 준비했다.
일찍 깬 그녀에겐 출근 준비가 급하지 않은 몇 없는 날이었고, 그에겐 어제 입은 셔츠를 구겨진 채로 입어야 하는 날이었다.
“옷 구겨졌잖아. 다릴 줄 알아?”
“아뇨.”
그의 구겨진 셔츠를 발견하고 다리미를 꺼내 온 다봄은 태연한 척 건오의 셔츠를 가져갔다.
“…….”
건오는 자신의 옷을 다리는 다봄을 가만히 보았다.
그는 그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상념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말을 아꼈다.
셔츠를 다 다린 다봄은 변명처럼 말했다.
“집에 들를 시간 없으니까 해 주는 거야.”
“영광이에요. 그리고 어젠…….”
“어제는, 나도 네 침대에서 잔 적 있으니까 그걸로 대신하자.”
다봄이 그의 말을 자르고 아무 말이나 했다. 그러다 그의 침대에서 잤던 그때, 제가 외출복을 입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맞다, 네 이불 세탁해야 하는데.”
건오도 이미 아주머니가 세탁을 마친 그 이불을 떠올렸다.
그는 눈앞의 상황과 대화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우리 꼭 결혼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