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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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일찍 일어나 매일 늘봄을 검색하는 주혁과 다르게 다봄은 매일 출근과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 8시 45분에 9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부대표님!”

“좋은 아침이에요, 해수 씨.”

8층에서 만난 해수는 해맑은 다봄의 인사에 눈을 크게 떴다.

9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엔 그들뿐이었다.

“대표님께서 연락 안 하셨어요?”

“무슨 연락이요?”

그제야 해수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 다봄은 고개를 뒤로 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요, 무섭게.”

“대표님 콜이에요.”

9시가 되자마자 해수를 호출했다는 건…….

9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사내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다봄은 대표실로 가는 해수를 뒤로하고 거의 뛰듯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네, 따로 공지 내려올 때까지 거래처 전화를 제외하고 외부에서 오는 모든 전화는 돌리라는 지시입니다.”

다봄을 발견한 그녀의 비서, 승희가 수화기를 잡지 않은 남은 손으로 무언가를 건넸다.

주혁이 보았던 기사를 프린트해 쥐여 준 승희는 그대로 대표실을 가리켰다.

“하.”

제목만 보고도 어떤 내용일지 뻔한 기사를 보며 다봄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승희가 전화를 끊자마자 또 벨 소리가 울렸다.

“다녀올게요.”

“다녀오세요.”

다봄이 나가기도 전에 비서는 연달아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종이 한 장을 들고 대표실 앞에 섰다.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 했다.

“저 왔습니다.”

대표실에 들어서자마자 주혁이 한숨처럼 말했다.

“앉아.”

“네.”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해수 맞은편에 앉은 다봄은 미안함을 가득 담아 그녈 향해 웃어 보였다.

상석에 앉은 주혁은 한참이나 눈을 깜빡거리며 딸을 보았다.

기묘하던 다봄과 지한의 기류는 그의 생각보다 더욱 복잡한 종류였나 보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다른 건 차치하고, 처음에 왜 말 안 한 건지, 그것만 말해 봐라.”

주혁은 다봄이 늘봄이 아니라 A로 지칭되며 이런 일로 언론을 탄 게 제일 속상했다.

“둘 다 무슨 생각으로 숨긴 거야?”

“밝힐 이유도 없었습니다.”

“뭐?”

“헤어진 지 5년이나 지났습니다. 우리가 연인이었단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고요. 늘봄은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대체 모델이 필요했고, 마침 내부 추천으로 거론된 서지한 씨의 이미지가 저희 브랜드와 잘 어울렸습니다. 그뿐입니다.”

이제 숨길 것도 없는 다봄은 브랜드 모델로 지한을 결정할 때 했던 생각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주혁은 다봄의 말을 곱씹으며 한참을 그녀만 주시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제 발 저린 다봄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의도치 않게 회사에 피해를 줘 죄송합니다.”

“받아 적었습니까?”

주혁이 해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바쁘게 끄적이고 있던 해수가 다봄의 마지막 말까지 받아 적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후에 그대로 내보내고, 마지막 사과엔 서지한 선수도 언급해 주세요.”

“그럼 의도치 않게 회사와 서지한 선수에게 피해를 주게 된 점은 죄송합니다, 이렇게 가겠습니다.”

“좋아요.”

제가 말한 대로 언론에 내보낸단 소리에 다봄은 기겁했다.

그녀는 기사를 볼 때 나지도 않았던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제가 뭐라고 그런 말을 해요? 아무도 안 궁금해해요.”

“아무도 안 궁금해한다고요?”

“어차피 조금 있으면 금방 묻힐 소식이에요. 제발 조용히 넘어가게 해 주세요.”

다봄이 정말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다봄의 모습은 처음인지라 해수가 주혁을 살피며 그의 의사를 재차 확인했다.

주혁은 가운데 끼어 난감한 해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서 일 보셔도 됩니다. 일단 전화는 계속 돌리시고요.”

“네. 내려가 보겠습니다.”

해수는 기다렸다는 듯 대표실을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다봄은 바로 진저리치듯 주혁을 불렀다.

“아빠.”

“이러다 말겠지. 사람들 입엔 오르내리겠지만 늘봄 매출에 영향을 주지도 않을 거다.”

“그러니까요!”

“근데 네가 능력이 아니라 남자들과 엮여서 알려졌잖아. 이젠 네가 뭘 하든 그 두 사람이 따라붙을 거야. 가십거리에 대기업 손녀만큼 좋은 먹이가 어딨어?”

실제로 지금 다봄의 모든 것들이 퍼지고 있었다.

출신 학교, 전공, 승훈을 응원하러 갔던 모습, 심지어 하람의 직업과 사무소도 알려졌다.

일석과 주혁과의 부자 관계가 다시금 입방아에 오르고, 지한의 과거 인터뷰까지 떠돌고 있다.

주혁은 이 비슷한 걸 지긋지긋하게 겪었다.

“이게 어떻게 와전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리고 너뿐만 아니라 지한 군 이미지를 생각해도 그 편이 낫고.”

가만히 듣기만 하던 다봄은 주혁이 지한을 언급하자 어깨를 올렸다.

제 입장을 기사화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창피했지만, 지한뿐만 아니라 그와 계약된 기간을 생각하면 확실히 주혁의 대응이 나았다.

“그럼 서지한 선수와 얘기해 보고 알려 드릴게요.”

“결정됐네.”

주혁에겐 그 말 자체가 수긍과 다름없었다. 지한의 입장에서도 그게 나을 테니까.

다봄은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들어 사람이 없는 탕비실로 향했다.

통화 중이라는 안내를 듣고 몇 분이 지나서야 그와 연결이 되었다.

-다봄아.

“괜찮아?”

-내가 물어야 할 말이야. 네 얼굴 다 알려졌네.

“그러게. 내가 요즘 오빠 유명세를 피부로 체감하고 있어.”

다봄이 가볍게 말한 덕에 긴장하고 있던 지한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짧은 침묵 후,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하라는 대로? 부정이라도 하게?”

-네가 싫다면.

“괜찮아. 오빠야말로 괜찮아?”

-나야 영광이지.

그도 우스갯소리로 받아쳤다.

다봄은 힘없이 웃음을 흘리곤 해수에게 말했던 내용을 조곤조곤 알려 주었다.

그 말을 다 들은 지한은 조금 허탈해졌다.

-나는 사심뿐이었는데, 너는 오로지 일이었네.

“…….”

-멋있다는 말이야.

지한이 덧붙였지만, 다봄은 고장 난 것처럼 가만히 섰다.

다봄이 곤란해할수록 지한은 더 씁쓸해졌다. 제가 진심을 내비치면 그녀는 이렇게 입을 꾹 다물었다.

지한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사실만 말할게.

“응.”

-아침부터 시끄러웠겠다. 빨리 듣고 싶어 하는 말 말해 주고 일하자.

“응. 고생해, 오빠.”

-너도.

통화를 끊은 다봄은 무거운 마음으로 탕비실을 나왔다.

다시 대표실로 들어간 그녀는 주혁의 예상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대표실 전화로 해수 자리에 직접 전화를 걸어 알려 주었다.

“엄마는요? 기사 보셨어요?”

“봤지.”

“근데 전화가 없네요.”

“바쁜 거 알 테니까. 보니까 우리만 몰랐더구나? 네 동생들도 다 알고 있던데.”

주혁이 섭섭해했지만, 다봄은 모르는 척했다.

‘부모님께 헤어진 연인까지 말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라고 입 밖으로 꺼냈다간 더 서운해하실 게 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만이야.”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지한 군이랑 밥을 두 번이나 같이 먹었는데, 내 딸이지만 되바라졌어.”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주혁은 그녀와 지한의 모습이 못내 괘씸했다.

감쪽같이 모른 척을 하던 모습이 생생해서 더욱 그러했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나가 볼게요.”

다봄은 괜히 목을 가다듬다 후다닥 대표실에서 도망쳤다.

직원들 보기가 민망하기 이를 데 없지만 출근하자마자 심신이 지친 다봄은 그 마음을 잠시 접어 두고 자신의 자리에 뻗었다.

그리고 다봄의 입장문이 발표되었다. 얼마 전 신제품 이벤트 때 지한과 우연히 한 프레임에 잡힌 사진과 함께.

“이게 무슨 해프닝이야.”

다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제 모습이 실린 기사를 떨떠름하게 훑었다.

뭐, 잘 찍힌 걸로 실어 주긴 했네.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쌓여 있는 서류들로 신경을 돌렸다.

* * *

“나 때문에 놀랐죠. 고생하셨어요.”

다봄은 해수와 점심을 먹으며 따로 미안함을 전했다.

다봄의 입장문을 끝으로 그녀나 해수나 주혁이나, 이대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새로운 기사가 터졌다.

다봄은 오전처럼 냉철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재벌 3세, 미혼의 아름다운 여성에게 끌리는 건 불가항력이다. 금메달리스트 서지한 선수의 전 연인이었던 연광그룹의 손녀 A양은 서 선수 이후에도 그럴듯한(?) 남자들을 만났다.

A양은 연광이 주최한 파티에 S그룹 외손자 B군과 등장했지만 함께 사라진 이는 B군이 아니었다. J그룹 사장의 아들 C군이 결국 그녀와 함께한 최후의 남자였다.]

“어머! 괜찮으세요?”

“아…… 네.”

머그잔을 놓친 다봄이 발치에 흩어진 사금파리 조각들을 내려다보다 쭈그려 앉았다.

기겁한 비서가 빗자루를 가지러 간 사이, 벌써 다봄의 중지 끝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다봄은 새빨갛게 맺히는 피를 보면서도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지금 누굴 건드린 거지?

아침과 다르게 연예 소식을 주로 다루는 매체에서 내보낸 기사엔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부분만 골라 쓰여 있었다.

다봄을 중심으로 쓰인 이야기지만, 그녀에겐 C군만 보였다.

“다치셨어요?”

“제가 할게요.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반창고가 있었는데.”

다봄은 깨진 잔을 마저 치우고, 비서는 다시 허둥지둥하며 상처에 바를 약을 찾았다.

이내 깨끗해진 바닥을 보며 우두커니 서 있던 그녀는 약을 바르지도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J그룹의 사장에겐 슬하에 자식이 없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 C군은…….]

“넋이 나가선 어디 가?”

“아빠.”

주혁이 다친 딸의 손을 확인하며 인상을 썼다.

회사 복도에서 그를 아빠라 부르는 걸 보니 역시 얼이 빠진 모양이었다.

“들어가서 약 발라.”

“건오가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연태철이랑 형제로 태어난 아빠 탓이야.”

자책하던 다봄은 되묻듯 그를 보았다.

주혁의 말은 태철이 이 모든 소스를 뿌렸다는 것처럼 들렸다.

“어디 가세요?”

“일하러 가지. 부대표도 들어가서 연고 바르고 일해.”

“큰아버지한테 가세요?”

“아냐. 퇴근은 밖에서 할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주혁은 다봄의 손끝을 다시 한번 보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혼자 남겨진 다봄은 주혁의 말대로 연고도 바르고 일도 했지만, 이미 정신은 다른 데 팔려 있었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오늘 신세 많았습니다.”

퇴근 시간이 되자 그녀가 재빠르게 일어섰다.

예상치 못한 순간 흐트러졌던 다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 보였지만, 사실은 그런 척한 것뿐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그녀는 입술을 꾹 물었다.

건오를 만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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