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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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태철이 신문을 덮었다.

SNS도 꽤 다룰 줄 알고 실시간 떠오르는 이슈도 찾아볼 줄 알지만, 그가 화제를 실감할 때는 그 대상이 종이 신문과 뉴스에 나왔을 때뿐이었다.

“신제품 출시 2주 만에 2분기 매출 목표 150% 달성, 이라.”

그는 늘봄의 인터뷰가 실린 한 일간지의 면만 30분 넘게 들여다봤다.

광고란 걸 알면서도 짜증이 났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처럼, 그는 동생의 회사가 그렇게 탐났다.

“접니다. 예. 그동안 잘 지내셨죠? 요새 통 필드에 안 나오시네요.”

태철이 신문을 덮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오늘이나 내일 식사 한번 어떻습니까? 예. 좋은 정보도 있고요.”

‘뭐, 노이즈 마케팅도 마케팅이니까 좀 도와줄까.’

그는 제 탐욕도, 내면에 깔린 지독한 열등감도 인정하지 않았다.

* * *

벌써 2분기 목표 매출을 달성했다. 고군분투한 여러 사람의 노력이 기대보다 더 큰 성과를 만들어 냈다.

“밥을 한번 사야겠네.”

보고서를 받아 든 주혁은 지한에게 직접 연락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나가서 먹자.”

“전 밑에서 샌드위치 먹을게요.”

주혁이 직접 다봄의 사무실로 찾아왔지만, 그녀는 아직 보지 못한 보고서들을 가리키며 거절했다.

그러나 주혁은 아예 그녀 사무실로 들어왔다. 다봄이 저렇게 답해 놓고 식사 시간이 한참이 지나서야 뭐라도 겨우 먹는 모습을 종종 봤던 터다.

“어차피 먹을 거면 시간 내 따라와. 점심시간이잖아.”

“뭐 좋은 거라도 먹어요?”

“그래.”

다봄은 수많은 일거리를 훑어보곤 겉옷을 챙겼다. 주혁이 몇 번 권할 때면 대부분 이렇게 되고 말았다.

“얼마나 맛있는 걸 드시려고요?”

“오리 먹을 거야.”

“좋아요. 따라 오길 잘했네.”

나란히 로비를 걸어 건물 밖으로 나온 부녀는 잊을 만하면 들르는 식당으로 걸어갔다. 회사에서 식당까지는 걸어서 5분도 되지 않았다.

“연주혁으로 예약했습니다.”

“예약도 했어요?”

빈자리로 향하려던 다봄은 어리둥절해하며 주혁을 따라갔다. 예약된 방엔 4인분의 식기가 놓여 있었다.

다봄은 대번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미팅이에요?”

이전에도 밥을 먹자고 해 놓고 거래처 사람들과 미팅이었던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다봄보다 한참 어른들과 만나는 자리라 식사를 한다고 해도 불편하기만 했다.

“이런 건 미리 말씀해 달라니까요.”

이미 자리를 잡은 주혁 옆에 다봄도 의자를 꺼내 앉으며 입을 비쭉였다.

주혁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꾸했다.

“이번엔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아니에요?”

“그래.”

마침 문이 열리고 식당 직원이 훈제 오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직원의 뒤엔 승훈이 서 있었다.

다봄은 승훈이 이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오빠였어? 근데 왜 혼자 와? 진서 언니는?”

“진서는 지방 갔잖아.”

“맞다. 그럼 이 자리는 누구야?”

승훈이 주혁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을 보니 승훈은 혀를 차고 싶었다.

그때, 다시 한번 문이 열리며 지한이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일 늦었네요.”

“늦긴요. 아직 5분 남았는데요.”

머쓱하게 들어와 외투를 벗는 지한에게 주혁이 점잖게 말했다.

“갑자기 연락했는데 흔쾌히 나와 주어 고맙네요.”

“저야말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 오셨어요?”

지한이 남은 자리에 앉으며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그와 마주 앉은 다봄은 눈동자를 굴리다 일단 어색하게 눈인사를 했다. 지한도 그녀를 따라 눈인사를 했다.

“예상보다 성과가 너무 좋아서 회식 말고 밥이라도 한 끼 사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그날 고생도 많이 했고.”

“고생이라뇨. 이벤트는 저도 무척 재밌었습니다.”

다봄만 당황스러운 이 식사 자리의 이유가 이제야 나왔다.

말 좀 해 달라니까.

다봄이 주혁을 원망하고 있을 때, 승훈이 오리고기를 판 위에 올렸다.

“제가 하겠습니다, 선배.”

“됐어. 전에 네가 했잖아.”

“그래도요.”

지한이 안절부절못해도 승훈은 제 할 일을 했다.

그는 제가 구워야 이 자리에서 다봄이 더 잘 먹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요. 오늘은 쉬어. 승훈이도 이런 거 잘해요.”

“여러모로 민망하네요.”

지한이 집게를 가져가기 위해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머쓱해 보이는 그에게 주혁이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다들 마셔 보더니 너무 맛있다고, 시즌 음료인 게 아쉽다고 하더라고요.”

지한은 듣기 좋은 말을 살갑게 말했고, 그럴수록 다봄은 불편해졌다.

그저 광고주와 광고모델이었다면 다봄 역시 흐뭇해하며 들었을 얘기였다.

“드세요, 아버지. 너도 먹어.”

“응.”

승훈이 다봄의 접시 위에 그녀 몫을 덜어 주었다.

주혁은 흡족한 얼굴로 은근히 자식 자랑을 했다.

“나이 차이가 나서 그런지 승훈이가 다봄일 잘 챙겨요.”

“네, 맞아요. 가끔 선배가 동생분들 얘기도 하셨거든요.”

“애들이 안 그런 척해도 우애가 좋아요.”

지한이 곰살맞은 대꾸까지 곁들이자, 주혁은 한마디 더 보태며 다봄을 흘긋 살폈다.

모델을 두고 낯가리는 그녀의 모습이 평소 다른 거래처나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잘생기고 착한 청년이 앞에 있으니 사정을 모르는 주혁으로선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어쨌든 많이 먹어요. 고생 많았어요.”

“고생이라뇨. 일 년에 두 번은 할 수 있겠던데요.”

지한의 너스레가 마음에 드는 듯 주혁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승훈은 넌덜머리를 냈다.

“그 요란한 짓을 또 하겠다고?”

“선배도 계약으로 묶이셨어요. 낙장불입입니다.”

“시끄러.”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다봄만 가만히 식사를 계속했다.

지한은 그런 그녀를 계속 곁눈질했고, 그의 시선은 주혁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저, 잠시만요.”

밥만 먹다 보니 다른 이들보다 배가 빨리 찬 다봄은 눈치를 살피다 자리를 벗어났다.

특별한 목적지를 둔 것은 아닌지라 화장실도 갔다가, 식당 주변을 둘러봤다.

안에 들어가는 것보단 혼자 배회하는 게 나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어도 10여 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다봄이 아스팔트를 앞꿈치로 톡톡 건드리며 멀거니 주위를 둘러보던 때였다.

“다봄아.”

“오빠.”

지한이 우두커니 서 있는 다봄 옆으로 다가왔다.

“밥은 다 먹었어?”

“응, 뭐.”

아무래도 지한은 먹다 나온 모양이었다.

“들어가서 좀 더 먹어. 아빠가 쏘는 거야.”

“영광이야. 연애 때도 뵙지 못했던 분을 두 번이나 만나 밥도 먹고.”

자연스레 말문을 연 그는 다봄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표정일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역시나 다봄은 그의 예상대로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지한은 한 번 더 말을 건넸다.

“너 취한 거 오랜만이었어.”

이번엔 다봄에게서 반응이 왔다.

그녀는 회식 날 이야기에 콧등을 찡그리며 창피해했다.

“그래도 멀쩡했지? 직원들은 별말 없더라고.”

“글쎄. 우리 눈엔 다 보이던데.”

지한은 장난스럽게 어깰 으쓱였다.

그가 말하는 ‘우리’라면 같은 방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일 터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날 잘 들어갔어? 내가 데려다주고 싶었는데 선배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

“응. 비밀번호를 몰라서 선배도 못 데려다준다면서.”

그래서 건오 방에서 눈떴구나.

기억이 나지 않는 다봄은 그날의 전말을 깨닫고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런데 너희 집 비밀번호, 백건오는 알고 있다더라고.”

다봄은 ‘그랬나?’ 싶다가, 건오에게는 언젠가 제 학번이라며 알려 줬던 일이 기억났다.

다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지한은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는 그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뒤늦게 알 것 같았다. 그는 못 데려다줘 아쉽단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 친구랑 너, 무슨 사이야?”

지한이 묻고 싶은 건 건오와 다봄의 관계였다.

그는 건오의 마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 다봄의 마음만 확인하면 됐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입을 열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오빠가 보는 그대로.”

“보는 그대로라…….”

그녀의 모호한 대답은 건오와 자신을 누나와 동생 사이로 보든, 연인 관계로 보든, 어느 쪽도 상관없다는 얘기였다.

그 두루뭉술한 말이 건오와 다봄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해 주진 못했지만, 지한은 자신에 대한 다봄의 마음은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가 그를 신경 쓰고 있다면 건오와의 관계를 누나 동생 사이라 못 박았을 텐데, 다봄은 그러지 않았다.

“들어가자. 찾겠다.”

그녀가 지한의 시선을 피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지한의 뺨 언저리를 스친 다봄의 머리카락이 바늘이라도 된 것처럼 그를 콕콕 찔렀다.

* * *

오전 여섯 시.

사실관계를 몇 번이고 확인한 기사가 송출 예약 시간에 맞춰 한 언론사 홈페이지에 게시되었다.

그즈음 기상한 건오는 문 앞에 놓인 세 개의 신문을 가지고 들어왔고, 하람은 빵 두 쪽을 토스터에 넣고 커피를 내렸다.

신문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식탁에 놓였다.

“너무 피곤한데.”

하람이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누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확실히 서른 되니까 몸이 다른 것 같긴 하다.”

대꾸 없는 건오가 익숙한 하람은 홀로 투덜거리며 목덜미도 주먹으로 툭툭 쳤다.

때맞춰 띵-하는 소리와 함께 노릇노릇 구워진 식빵 두 쪽이 토스터에서 튀어 올랐다.

그들은 식빵을 하나씩 입에 물고 신문도 하나씩 가져갔다. 이때만큼은 하람의 한탄도 들리지 않아 조용했다.

그렇게 그들이 지난날 일어난 일을 아침 신문으로 정리하던 중이었다.

하람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네, 아버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인터넷에 늘봄 검색해 봐라.

주혁이 대뜸 말했다.

그가 이른 시간에 이러는 경우가 없었기에 하람은 통화를 스피커로 돌려놓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늘봄 광고 모델 서지한, 부대표와 연인이었다>

“잠시만요. 제대로 읽어 볼게요.”

하람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자, 건오도 신문에서 눈을 떼고 그를 보았다.

[며칠 전, 커피 전문점 늘봄이 게릴라 이벤트를 펼쳤다. 광고 모델인 전 국가대표 수영선수이자 스포츠 스타 연승훈과 서지한을 내세워 사인한 컵 홀더를 끼워 메뉴를 건네주는 신제품 홍보 행사였다.]

“그런데 늘봄 부대표 A씨와 광고 모델이 된 서지한이 연인 관계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전 연인과 모델 계약을 맺은 A씨는 얼마 전 연광 호텔에서 개최된 파티에서 S그룹 외손주 B씨와 등장하기도 했다.]

-다 읽었어?

“네. 여기, 그러니까 한강일보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연락도 안 왔다. 아침에 일어나 습관처럼 검색했는데, 이게 뜨지 뭐야. 허위 사실 유포로 고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주혁은 회사 법무팀과 상의하기 전에 아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듣기 위해 전화를 했다.

하지만 딸을 걱정하는 아빠에게는 미안하게도, 여기서 거짓은 없었다. 그러니 회사 차원에서 대처하기도 애매했다.

일단 조용히 기사가 묻히거나 사람들의 반응이 없는 게 늘봄에 가장 최적의 흐름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끝낸 하람은 침착하게 말했다.

“아버지, 이 기사 허위 아니에요.”

-……뭐?

“서지한이랑 연다봄이랑 예전에 만났던 거 맞아요.”

하람이 통화를 이어가며 맞은편 건오를 살폈다. 건오는 너무나 냉철한 모습으로 기사를 반복해 읽는 중이었다.

하람은 백건오가 저렇게 고요할 때 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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