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28/72)

28.

건오의 차로 30분 정도 걸려 도착한 곳은 다봄에게 너무 뜻밖의 장소였다.

“밥 먹어요.”

“여기서?”

다봄은 무심코 되물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건오가 그녀를 데려온 곳은 놀이공원이었다. 대뜸 이끌기에 입장하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대부분의 매장이 불을 끄고 문을 닫은 뒤였다.

여기까지 앞장선 건오도 난감해하며 다봄을 응시했다. 심지어 그녀보다 더 곤란해 보였다.

그런 건오의 모습에 심각하던 그녀의 표정이 단숨에 풀어졌다.

“1시간 남았대.”

다봄이 곧 폐장 시간이라는 사실까지 말해 주자 기어이 건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결국 그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배고파?”

“아뇨.”

“그럼 대충 간식으로 때우고 밖에서 맛있는 거 먹자.”

다봄이 사람들이 먹고 있는 추로스를 턱짓했다.

그들은 짧은 줄을 서서 구매한 간식을 입에 넣었다.

놀이동산이란 공간이 아니었다면 시끄럽게만 들렸을 소리가 여기선 활기차게 느껴지고, 다른 곳에서도 먹을 수 있는 간식이 여기선 특별한 맛이라도 되는 것 같다.

순식간에 추로스를 다 먹은 다봄은 이제 발이 가는 대로 걸으려 했다.

“거기 아니에요.”

“응?”

잠자코 있던 건오가 다봄이 향하려던 곳과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역시나, 뭔가 목적이 있어서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그냥 말해. 뭐가 하고 싶어서 왔어?”

다봄이 보란 듯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폐장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상기시켜 주니 건오가 고갯짓을 했다.

“회전목마요.”

안 그래도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건오가 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누나 타는 게 보고 싶어서.”

의아해하는 다봄을 두고 건오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가 간격을 좁히며 그를 쫓았다.

“내가 회전목마 타는 게 왜 보고 싶어?”

다봄은 놀이동산을 와본 적이 별로 없었다. 꼬맹이 시절을 제외하면 가장 최근 기억이 수능 끝난 후니 말 다했다.

“아.”

기억을 곱씹던 다봄이 설마 하며 멈춰 섰다.

건오는 얼마 남지 않은 회전목마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기억났어요?”

다봄에게 다가간 그가 눈을 깜빡이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큰 손이 작은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그러면 줄 서요. 이러다 정말 문 닫겠다.”

다봄은 그와 연결된 손을 내려다보며 그를 따라 다시 움직였다.

건오는 수능 성적표를 들고 왔던 그때를 말하고 있었다.

19살에 수능을 본 다봄과 18살에 수능을 본 건오와 하람에겐 나란히 수능 성적표가 주어졌다.

다봄은 수험생만 누릴 수 있는 특혜를 받아 놀이동산에 가고 싶었고, 건오는 고민할 것도 없이 따라나섰다.

“기껏 와 놓고 무섭다면서 이상한 것만 탔잖아요.”

“이상한 거 아니었어.”

다봄은 순 재미없는 것만 골랐는데, 그 와중에 회전목마만 네 번을 탔다.

“이거 하난 타고 갈 수 있겠어요.”

하람이 알면 비웃겠지만, 당시 건오는 다봄이 회전목마를 네 번이나 타서 좋았다.

반짝반짝한 조명 아래, 손잡이를 꽉 잡고 새하얗게 웃던 모습이 한동안 잊히지 않았다.

“재밌겠죠?”

“응.”

다봄은 복잡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녀도 그때 건오의 모습을 기억했다.

짧은 머리, 청바지에 남색 맨투맨을 입고 제가 타자는 것만 타던 열여덟 살의 건오.

하지만 그 모습을 기억하며 다시 온 건 너무했다. 뭐가 너무한지는 모르겠지만 너무했다.

“입장하세요.”

앞서 줄을 선 사람들이 말에 올라타고 운행이 시작됐다. 다음 차례엔 그들도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웃었으면 해서 온 건데.”

너 때문이잖아.

다봄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샐쭉 흘겨봤다.

그는 그녀를 보며 옅게 웃었다.

“나 그때 엄청 재밌었어요.”

건오가 보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봄은 고개를 돌렸다.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 속도는 느리기도 참 느렸다. 그런데도 딱딱한 말 위에 앉은 사람들은 깔깔거리며 행복해했다.

어린 다봄과 건오도 저렇게 웃었다.

“다음 분 입장하세요.”

그들은 아이와 아이의 보호자와 섞여 말 앞에 섰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쭈뼛쭈뼛 올라타려고 하던 다봄은 그때서야 건오와 아직 손을 놓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건오야. 손을 놓아야 말을 타지.”

다봄이 맞닿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아쉬움을 삼키고 손을 놓은 그는 다봄이 놀이기구에 올라타자마자 그녀의 벨트를 직접 매 주었다.

제 허리에서 배회하는 손길에 다봄은 손을 뻗을 새도 없이 허리를 펴고 헛기침했다.

“내가 해도 되는데…….”

“다 됐어요.”

그녀가 안전하게 탄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건오도 다봄 옆에 자릴 잡았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출발하겠습니다.”

안내 음성과 함께 다봄은 회전목마의 봉을 힘주어 잡았다.

이내 놀이기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너무 느려 봉을 잡은 손이 민망할 정도였지만 곧 속도감이 붙었다.

그럼에도 느리긴 느린 덕택에, 놀이기구를 잘 타지 못하는 당시 다봄은 회전목마가 참 재밌었다.

뭘 해도 까르르 웃던 여고생은 아니지만 회전목마가 재미있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하던 다봄이 눈매를 접으며 활짝 웃었다.

바람결을 따라 머리카락이 함께 휘날리고, 조명에 비친 그녀의 눈망울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건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를 사랑하며 느끼는 벅찬 감정은 아직도 그를 황홀케 했다.

“건오야.”

“네.”

다봄이 행복한 얼굴로 그를 부를 때면, 건오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한없이 부유하는 듯했다.

“고마워.”

발랄한 음악 소리에 섞여 다봄의 말이 아주 작게 들렸다.

그는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저도요.”

* * *

그들은 24시간 운영하는 우동집에서 저녁을 때우고 다봄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내심 자고 가겠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다봄의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건오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들어가요.”

“너도. 조심히 가.”

이러니 정말 데이트하고 헤어지는 연인 같았다.

다봄이 지하 주차장 현관 앞에 섰다.

“누나.”

“응.”

다봄은 대답하고 살짝 후회했다. 너무 빠르게 돌아서고, 기다린 것처럼 바로 대답했다.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줄 모르는 건오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재밌었어요?”

오늘…….

그가 말한 오늘이 정말 하루를 말한 게 아닌 걸 알면서도 다봄은 종일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건오네 집에서 일어나, 단골 해장국집에서 이른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무려 11시에 출근해 7시 넘을 때까지 일했다.

신경 써야 할 게 많아 버겁고 바쁜 나날은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일하고 건오를 만났다.

언젠가부터 숨이 막힐 듯한 책임감이 나날이 그녀를 눌렀다. 그 탓에 요 몇 년 동안 다봄의 일터는 그녀에게만 회색빛이었다.

하지만 건오와 있을 땐 세상이 수채화였다. 연락도 없는 자신을 무작정 기다린 그는 다봄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새싹이 움트는 느낌이었어.”

무언가의 시작. 금방 봉우리가 만들어져 당장이라도 꽃을 피울 것만 같은 기분.

고작 회전목마 하나를 탄 것뿐인데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재밌었다는 말이야.”

다봄은 저를 우두커니 보는 건오를 향해 부연했다.

그러자 눈도 깜빡이지 않고 다봄을 보고 있던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봄은 훌쩍 가까워지는 건오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그것뿐이에요?”

그는 고요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다봄은 대답 없이 그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기대감과 두려움이 섞여 한없이 불안정한 그 안에 그녀가 보였다.

다봄이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건오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가 바라는 말을 알면서도 다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온갖 상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뛰어다니며 엉켰다. 조금 전과 달리 대부분 부정적인 상황들뿐이었다.

곧 다봄이 그를 향하던 시선을 살짝 내렸다.

동시에 건오의 기대감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그 빈자리를 두려움이 메울 무렵이었다.

“설마 그것뿐이겠어.”

다봄은 여전히 건오를 보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가 볼게.”

다봄은 돌아설 때와 다르게 천천히 움직였으나, 들어가면 엘리베이터도 코앞인지라 금세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봄은 떠났지만 건오는 움직이지 못했다. 이런 기대는 독인 줄 알면서도, 결국 또다시 기대를 심었다.

그는 차에 타고도 세차게 뛰는 심장이 진정될 때까지 핸들을 잡지 못했다.

* * *

한편 다봄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말의 무게를 잘 아는 다봄은 말이 밖으로 나오면 또 다른 형태가 된다고 믿었다.

그 형태를 방금 제가 만든 것 같다.

해선 안 될 말을 해 버린 건 아닐까? 그 말을 후회하게 되면 어쩌지?

그렇게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을 자책하다,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기도 하며 집 안에 들어섰다.

다봄은 깜깜한 집 안 조명을 모두 켠 뒤, 툭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넓은 집을 차지한 고요함이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조금 외롭게 하기도 했다.

‘외롭다니.’

제가 생각했지만 어이가 없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얼마나 쌓였는데, 이런 소리나 할 게 아니라 들어가서 씻고 자야 했다. 놀이동산 한 번 갔다 왔다고 어지간히 들떴나 보다.

그때 그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건오에게 전화가 왔다.

“응. 들어갔어?”

-아직이요.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가 어색했다.

다봄은 자세를 바꾸다 누워 버렸다.

-누나 잠들면 통화 못 할까 봐.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덤덤한데 그녀는 침착하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쿠션을 껴안은 다봄이 새침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잘 뻔했어.”

-잘래요?

“너 도착할 때까지는 통화해도 돼.”

말을 마치자마자 다봄은 입술을 꾹 물었다. 무슨 특별한 말을 했다고 이렇게 긴장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계속 운전하고 싶은데.

다봄이 쿠션에 얼굴을 묻으며 엎드렸다. 그가 불현듯 꺼낸 속마음에 다봄은 설레고 말았다.

다른 때라면 진작 진저리쳤을 그녀가 가만히 있자, 건오는 건오대로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까 너무 피곤한 것 같아.”

-도망 안 치기로 해 놓고 벌써 잊었어요?

간지러운 침묵을 견디지 못한 다봄이 핑계를 대며 피하려 했지만, 건오는 받아 주지 않았다.

다봄은 핸드폰을 바꿔 들고는 자세를 바꿨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에게 붙잡힌 그녀는 건오가 집 근처를 두 바퀴 돌고 나서야 통화를 끊었다.

그 후 적막이 전보다 더 그녀를 내리눌렀다.

문득 느껴진 이 외로움은, 놀이동산이 아니라 건오와 함께한 시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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