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건오는 당연하게 다봄을 업었던 것처럼, 당연하게 제 방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이어서 다봄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외투와 양말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하람이 친구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신기한 듯 관찰하다 물었다.
“얘 여기서 재우면 넌 어디서 잘 건데? 나랑 같이 자겠단 말은 마라. 징그러우…….”
“누나 옆.”
다봄의 머리까지 한데 모아 넘겨 준 건오가 드디어 허리를 폈다.
건오는 콧잔등을 찡그린 친구를 보곤 모처럼 픽 웃었다.
“농담이야.”
“아오, 진짜. 너라면 그게 농담처럼 들리겠냐?”
“하긴. 근데 오늘은 나도 좀 피곤해서.”
하람이 먼저 건오의 방을 나가고, 건오도 불을 끄고 거실로 나오며 문을 닫았다.
“누나 옆에 누우면 내가 제대로 자겠냐.”
“……그딴 말까지 내 앞에서 하지 마.”
“소파에서 잔다는 말이야.”
건오는 침대를 두고 소파에서 자게 생겼는데도 은근히 기분 좋아 보였다.
하람은 둘이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건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녀석이 말해 주기 전까진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물론 하람의 입장에선 혈육의 연애사가 그렇게 듣기 좋은 얘기도 아니었다.
“잘 자라.”
“어. 너도.”
사실 하람은 다봄이 무슨 생각으로 건오를 대하고 있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 * *
다봄은 눈을 뜨자마자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봤다.
9시.
아무리 봐도 9시였다. 큰일이었다.
쏜살같이 침대에서 빠져나온 다봄은 문을 열고 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나 지금 일어났어요.”
-근데?
지각이라는데 주혁의 반응은 심심하기만 했다.
다봄은 제대로 걸은 게 맞나 액정을 확인했다.
[우리 대표님]
제대로 걸었다는 걸 확인한 그녀가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때마침 어제 회식에서 11시까지 출근하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기억 났냐?
“네…….”
-그래. 어디야? 승훈이네야?
핸드폰에서 눈을 뗀 다봄은 이곳이 제집이 아니라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연하람네.”
-동생들 잘도 부려 먹네.
“이따 뵐게요…….”
-11시까지 아침 겸 점심 먹고 와. 넌 점심시간 없어.
“네.”
힘없이 대답한 다봄은 공간을 둘러보곤 이마를 짚었다.
지난번 잤던 하람의 방이 아니었다. 어젯밤 건오의 공간에서 신세를 진 모양이다.
“연하람.”
다봄은 괜히 하람을 불러 보았다. 이미 집 안에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확인했다.
“건오야?”
아무도 없다. 이 순간만큼 고요함이 반가울 수 없었다.
다봄은 정수기에서 찬물을 내려 마셨다. 덕분에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일단 물컵을 들고 식탁에 앉아 어제 상황을 되짚어봤다.
정말 다행히도 카드를 내민 것까지 기억났다.
“영수증.”
다봄이 영수증을 찾으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가방과 외투를 뒤져 보려 다시 건오 방으로 들어갔다.
외투는 정갈하게 걸려 있었다. 누가 정리해 줬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으으.”
건오에게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게 한두 번이 아닌데도 요즘은 참 신경 쓰였다.
괴로운 신음 소리와 함께 머리를 넘긴 다봄은 외투 주머니에 든 것을 모두 꺼냈다.
사탕 봉지 쪼가리와 영수증 몇 개가 보였다. 어제 결제한 영수증도 그 안에 있었다.
찾을 걸 찾은 다봄이 나머지 쓰레기들을 도로 주머니에 넣는데, 지갑을 열며 떨어진 쪽지 한 개를 발견했다.
반듯하게 접힌 종이 모양을 보며 다봄은 사뭇 긴장했다. 넣어 둔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끝나고 회사로 갈게요.]
아주 어릴 때, 함께 도서관에 가면 할 말을 이렇게 주고받았다. 다봄의 맞은편이나 옆자리에 앉은 건오는 그녀가 지루해할 즈음 귀신같이 쉬러 가자고 꼬드겼다.
그래서 다봄은 접힌 종이 모양만 보고도 건오라는 걸 알아챘다.
“미안.”
다봄은 건오의 이부자리를 정리해 주며 혼자 머쓱하게 웃었다.
외출복으로 굴렀으니 싹 세탁해야 할 텐데.
“이따 물어봐야겠네.”
건오가 회사로 온다고 했으니 그때 얘기해야겠다 생각하는데, 부엌에서 다봄의 핸드폰이 울렸다.
회식이란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기에 다봄은 감상에서 깨어나 핸드폰을 찾으러 후다닥 나갔다.
[서지한]
액정엔 지한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 순간, 어제 봤던 지한의 싸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 다봄은 조금 무서웠던 것 같다.
그녀는 고개를 저어 애써 생각을 떨쳐 내며 전화를 받았다.
“응, 오빠.”
-출근했어?
“11시까지 출근이라 이제 일어났어.”
-속은 괜찮아?
“그럼. 오빠는?”
대화는 무리 없이 오갔다.
슬슬 출근을 준비해야 하는 다봄이 시간을 확인하는데, 지한이 식사를 제안했다.
-해장하자, 다봄아. 내가 그쪽으로 갈게.
“아, 오빠. 나 오늘 점심시간 없어. 11시까지라 미리 먹고 들어가야 해.”
명확한 이유가 있어 다봄은 거절하기 편했고, 지한도 금세 납득했다.
그렇다고 아쉽지 않은 건 아닌지라 그는 바로 다른 제안을 했다.
-그럼 저녁은 어때?
“나 저녁은 선약 있어.”
거절이 반복되자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봄은 굳이 이유를 보태 설명할까 했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이상해 보일 듯해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통화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더는 준비를 미룰 수 없었다.
“오빠, 나 출근 준비할게. 나중에 연락해.”
그녀는 마음이 급해져 통화를 끊었다.
지한은 핸드폰 액정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 *
다봄은 혼자 해장국을 먹고 회사에 출근했다. 그때부터 그녀만 기다리고 있던 사안들이 끊임없이 몰려왔다.
어제 이벤트가 SNS를 타고 퍼지면서 언론사와 홍보 인터뷰까지 잡혔다.
[부대표님, 답변 컨펌 부탁드립니다.]
늘봄을 대표해 인터뷰를 맡은 해수가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작성해 올렸고, 다봄이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네, 여기 9층입니다. 어제 사진 잘 나온 거 있나요? 제품에 집중되는 걸로요.”
“대표님, 대만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예상 오픈보다 일주일은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다들 3,800원과 4,100원. 이 차이가 작아 보여요?”
다봄은 풀리지 않는 숙취를 안고 층을 오가며 일했다.
숨 고를 틈 없이 일한 다봄이 결과물을 들고 대표실에 들어섰다.
오늘 오전에 도착한 신문을 넘기며 커피를 마시던 주혁이 책상을 턱짓했다.
“놓고 가. 이따 볼게.”
“가격 인상 건 회의 내용 확인하셨죠?”
“그래.”
“어떠세요?”
“4,100원, 나쁘지 않아.”
“정말요? 앞자리가 바뀌는데요?”
가격만큼 중요한 게 없다. 그 가격을 올리냐 마냐만 해도 1년 넘게 상의한 결과였다.
이젠 얼마나 올리냐를 가지고 대표와 부대표의 의견이 갈렸다.
주혁이 다봄을 보며 보던 신문을 접었고, 그녀가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서 둘만의 토론이 또 벌어진 것이다.
한참이나 주혁과 의견을 나눈 다봄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땐, 그와 논의하는 데 쓴 시간만큼 많은 양의 서류가 책상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문자도 와 있었다.
[쪽지 확인했어요?]
다봄은 슬쩍 웃고 답장을 보냈다.
[응. 이따 봐.]
짧디짧은 휴식이 끝나고, 다봄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을 시작했다. 확인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보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부대표님,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느새 해가 졌다. 주혁을 포함한 모두가 퇴근하고 9층에 그녀 혼자 남았다.
마침내 다봄이 종이를 덮었을 땐 7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건오……!”
다봄은 뒤늦게 건오와의 약속이 떠오르고 말았다.
서둘러 확인한 핸드폰 액정 위엔 역시나 건오의 이름이 떠 있었다.
6시와 6시 40분에 걸려 온 부재중 전화 두 통과 7시에 도착한 문자 하나.
[퇴근했어요?]
다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문자 하나 남겼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다봄은 얼른 자리를 정리하고 9층 마지막 조명을 껐다. 그러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걸 기다리며 건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건오야, 어디야?”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다봄이 다급히 물었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1층 카페예요.
지하를 누르려던 손이 서둘러 1층을 눌렀다.
“내가 얼른 내려갈게.”
-천천히 와요.
그 말이 더 미안하게 했다.
다봄은 엘리베이터 숫자가 바뀌는 걸 초조하게 올려다봤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리는데, 투명한 유리에 반사된 제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다급하다기보단 오히려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1층입니다.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다봄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매장이지만 그녀에게 건오를 찾는 일은 쉬웠다.
“백건오.”
1층이 내려다보이는 2층 난간 쪽 의자에 앉아 있던 건오도 그녀를 발견했다.
“이상하네요. 내가 뭘 잘못한 것 같진 않은데 왜 또 성을 붙일까.”
“미안해. 오늘 일이 너무 많아서.”
다봄은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건오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래도 쪽지 잘 봤네요.”
그는 덤덤하게 괜찮다 하는데, 오히려 다봄의 감정이 격동했다.
일하다 제 존재를 잊었다고 말하는데 괜찮단다.
다봄의 표정을 본 그가 이마를 찡그렸다.
“무슨 일 있어요?”
“네가 바보 같아서.”
입술을 지그시 깨문 다봄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녀는 공연히 목이 메어 마른침을 삼켰다.
건오는 가만히 손을 뻗어 다봄을 제 옆에 앉혔다.
“그래서 백건오라고 불렀어요?”
“연락도 없는데 여기서 1시간 넘게 기다리면 어떡해?”
방금 사과해 놓고 지금은 건오 탓을 하는 다봄은 여전히 울상이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어이없이 웃었다.
“내가 밖에서도 이런 짓 하고 다니진 않아요.”
“그러면 여기서도 그래야지. 밥도 못 먹고 시간만 쓰고.”
다봄은 애타는데, 건오는 대수롭지 않은 듯 실웃음까지 흘리며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단언했다.
“내 생각엔 누나가 나였어도 그랬을 것 같은데.”
“뭐?”
“그럼 누나도 바보인가.”
만약 입장 바꿔 다봄이 그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그녀는 건오를 기다렸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가 말한 대로, 정말 바보 같게도 기다렸을 것 같다.
눈빛으로 대답을 들은 건오는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가요. 밥 먹어야죠.”
“…….”
“참고로 누나, 지금 동생으로 온 거 아니에요.”
다봄이 먼저 의자에서 일어선 건오를 향해 고개를 꺾었다.
“기회 준다고 했잖아요. 첫 데이트예요.”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잡아야 한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