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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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지한 씨가 소갈비를 그렇게 잘 굽더라고.”

“아버지, 이제 제가 구울게요.”

주혁이 지한을 칭찬하자 하람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지한은 하람을 한 번 올려다보았을 뿐 계속 고기를 구웠다.

“괜찮아요. 제가 진짜 잘 굽긴 하거든요. 아마 선수들은 다 그럴 거예요. 그렇죠, 선배?”

“그러고 보니 우리 승훈이도 실력이 좋긴 합니다.”

대답은 주혁에게서 흘러나왔다.

주혁은 시종일관 다봄을 챙기는 지한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터였다.

국가 대표니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고, 최근엔 사진으로도 많이 봤지만 실제로 보니 참 준수하고 바르게 생겼다.

“서지한 씨가…….”

“대표님, 말씀 낮춰 달라니까요.”

“아, 그랬지. 그래요, 우리 며느리한테 다봄이 소개해 달라고 했던 친구가 지한 군 맞죠?”

“하하. 네, 맞습니다. 제가 정말 열심히 졸랐습니다.”

화기애애한 주혁과 지한의 대화를 듣고 있는 연년생 남매는 어떻게 반응할지 머리를 굴렸다.

그중 하람보다 더 곤란한 입장인 다봄은 양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대표님, 회사 모델한테 너무 사적인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다봄이 주혁을 대표님이라 부르자, 주혁이 흐음 하며 콧소리를 길게 내었다.

저를 살피는 아빠의 눈길에 다봄은 차라리 그와 눈을 맞췄다.

만약 지한이 다봄과 아무런 친분이 없는 광고모델일 뿐이라면, 이 자리에서 그녀는 주혁을 대표라 부르는 게 맞긴 했다.

그 말은 다봄이 지한에게 선을 긋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한 군, 불편합니까?”

“그걸 직접적으로 물으면 보통 불편하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승훈이 주변에 다 들리는 목소리로 주혁에게 속삭였다.

지한은 주혁을 안심시키듯 활짝 미소 지었다.

“불편하긴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는 다봄과의 일을 자연스럽게 다시 언급했다.

“상견례 프리패스 상이라더니.”

“아버지?”

“아니, 기사에서 지한 군을 그렇게 말하더라고. 이해가 가서 말이야.”

주혁이 옆에 앉은 큰아들의 눈초리에 헛기침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또 감사까지야.”

의외로 주혁은 정말 지한을 마음에 들어 했다. 눈치 못 챌 수도 없게.

결국 다봄은 가시방석을 더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옆방에도 다녀올게요.”

“그래라. 모자란다 싶으면 더 시키고.”

“네.”

승훈과 지한은 광고모델이고, 건오와 하람은 주혁이 불렀다.

그러니 다봄은 이 방을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직원들을 챙겨도 된다.

빠르게 합리화한 다봄은 옆방으로 옮겨 갔다.

“고기 더 추가하실래요?”

“우와아!”

눈에 밟히는 건오를 애써 무시하고 다봄은 제 할 일을 했다.

“다들 갑작스러운 이벤트인데도 너무 잘해 주셨어요. 아이디어 내 주신 해수 씨 정말 감사하고, 실행해 주신 여러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술 파티.

다봄은 옆방과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서 잔을 기울이고 기울였다.

돌아가며 얼마나 마셨을까.

다봄이 술을 들이켜는 도중 주혁이 들어섰다. 그 시끄럽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진정됐다.

“여러분, 오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내일 11시까지 출근하세요.”

주혁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노련하게 되살렸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 속에서 다봄이 실실 웃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주혁의 눈썹이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그럼 나는 이만 가 볼 테니, 편하게 놀다 들어가세요.”

“들어가세요, 대표님!”

“조심히 가세요!”

주혁이 나가자 다봄은 으레 그랬듯 그를 따라나섰다.

“아빠, 나도 11시 출근이에요?”

“9시에 오라면 올 거야?”

“아니이.”

말을 늘이는 다봄의 상태가 주혁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이벤트의 책임자였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술은 그만 마시고, 승훈이 갈 때 따라가.”

“알겠어요.”

“그래도 이번엔 너 챙길 사람이 많아서 마음 놓고 간다. 아, 건오야, 얘 챙겨라.”

주혁이 마침 식당을 빠져나온 건오를 발견했다. 막 대리 기사가 도착한 참이었다.

“얘는 그 방으로 데려가지 말고 너희 방으로 데려가.”

“네. 조심히 가세요.”

“그래.”

“아빠, 내일 봐요. 우린 맨날 봐, 맨날. 엄마도 보고 싶다.”

다봄의 마지막 인사에 건오와 주혁의 표정이 비슷해졌다.

건오를 향해 얼른 다봄을 데리고 들어가라는 듯 손을 훠이 저은 주혁이 차에 올라탔다.

느리게 지상 주차장을 빠져나간 주혁의 차가 도로 위로 나가자마자 다봄은 한숨을 푹 쉬었다.

과장된 소리가 꼭 이유를 물어보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들렸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오빠는 곧 갈 텐데, 그럼 나는 더 못 먹잖아.”

“승훈이 형 갈 때 가래요?”

“응.”

다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어쩐지 다른 때보다 말이 많았다.

그는 다봄의 상태를 살피며 그녀가 오늘 얼마나 힘들었는지 떠드는 얘기를 들었다.

제 앞에서 이렇게 재잘재잘 얘기하는 게 참 오랜만인 것 같다 생각하던 때였다.

“봄아.”

지한이 그녀를 부르며 다가왔다.

“어? 오빠는 왜 나왔어?”

“옆방에 네가 없길래 물어봤더니 대표님 배웅하러 나갔다고 하더라고.”

다봄을 찾으러 왔단 소리였다.

조금 전에는 건오와 지한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다봄이, 지금은 어떤 기류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해맑았다.

“오늘 고생 많았어.”

“덕분에 진귀한 경험 했어. 난 카페가 그렇게 정신없는 줄 몰랐어.”

“그래도 되게 능숙하던데?”

“민폐가 된 건 아닌 것 같네.”

“민폐는. 힘들었을 텐데 둘 다 계속 웃어 줘서 고마웠어.”

“그건 당연한 거고.”

“이야, 프로네.”

분하게도 건오는 이 다정한 대화에 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초승달 같은 눈이 지한을 향하는 모습이 배알 꼴리면서도, 다봄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다봄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추우니까 일단 들어가자. 가자, 건오야.”

그러며 종종걸음을 치는데, 건오는 아무렇지 않게 제 팔을 잡아끄는 다봄을 천천히 따라갔다.

“너 많이 먹었어?”

“네.”

“정말?”

걱정하는 모양새가, 건오를 만지는 손길이 이전과 다름없었다. 말끝이 늘어지지 않았다면 다봄이 취했다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정말요.”

“잘했어. 착해.”

“그러게. 정말 착한 동생이네요.”

그들 뒤에서 지한의 비아냥이 들렸다. 건오가 우뚝 발을 멈추고 뒤돌았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비딱하게 선 지한이 그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타이틀이에요. 평생 가지고 있어요, 그거.”

다봄이 건오와 지한을 번갈아 봤다. 눈만 소리 없이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천진했다.

건오가 그런 그녀의 머리를 느릿하게 넘겨 주었다.

“속이 쓰린가 봐요. 누나가 내 팔짱 껴서.”

건오의 시선이 다봄에게서 지한에게로 옮겨 갔다. 거만한 눈길이 지한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여러모로 울컥한 지한이 입을 열려는데, 건오가 조금 더 빨랐다.

“자신 없는 거 티 내지 마. 다 보여.”

백건오가 서지한의 정곡을 찔렀다. 동시에 지한의 표정이 바뀌었다.

시종일관 사람 좋은 낯으로 내내 친절하게 웃던 그가 싸하게 눈을 빛내자, 다봄이 흠칫 물러섰다.

건오가 뒷걸음질 친 그녀를 살폈다.

“건오야, 가자. 나 춥다니까.”

다봄은 춥다며 건오를 잡아당겼다. 그는 못 이기는 척 따라가면서도 순간적으로 받았던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봄은 처음 앉았던 방으로 돌아와 외투를 껴입고는 소주 한 잔을 스스로 따라 마셨다.

“크으. 달다.”

다봄이 무심코 흘린 혼잣말을 들은 승훈이 바로 동생 앞의 소주를 치웠다.

“그만 마셔. 이제 갈 거야.”

“그러니까 나도 간다는 소리지?”

“어. 짐 챙겨.”

그녀는 구시렁거리면서도 금세 순응했다.

가방을 하람에게 맡기고 마지막으로 옆방으로 가 인사를 하는데, 누구도 다봄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안녕히 가세요!”

계산까지 마치니 이제 정말 집에 갈 시간이었다. 그걸 알기라도 했는지 다봄은 카드를 긁자마자 눈이 풀렸다.

“제가 데려다줄게요.”

그녀가 들어가고서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지한이 승훈을 향해 다가갔다.

“난 네가 데려다줄 필요 없는데.”

농담처럼 거절한 승훈은 몇 없는 계단을 내려가 지한 앞에 섰다.

그 뒤를 따라 다봄이 하람과 건오에게 기대 내려왔다. 취기에 잠식된 다봄의 걸음이 휘청거렸다.

“너도 이만 들어가라. 오늘 고생했…….”

“선배.”

승훈이 표정 변화 없이 지한을 응시했다. 지한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지만, 하고자 하는 말이 뻔했다.

짧은 정적이 흐르는 동안 물레방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승훈이 대뜸 물었다.

“너 연다봄 집 비밀번호 알아?”

알 리가 없다. 생일처럼 뻔한 게 아닌 이상, 지한은 다봄을 데려다줄 수 없었다.

“사실 나도 몰라. 연하람도 모르고.”

지한의 미간이 모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통 승훈의 뜻을 읽지 못해 답답했다.

지한은 다봄과 함께 여길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근데 지한아.”

승훈이 그를 부르며 뒤를 돌았다.

지한의 시선이 승훈을 따라 움직였다.

승훈과 지한의 시선 끝엔 언제 다봄을 업었는지 모를 건오가 서 있었다.

“쟨 알아. 연다봄 집 비밀번호.”

이번엔 지한이 주먹을 쥐었다.

실제로 건오가 다봄의 집 비밀번호를 알든 모르든, 승훈이 그렇게 말한 이상 지한은 물러서야 했다.

여기서 그가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조심히 들어가라.”

“……네. 또 뵐게요, 선배.”

마침 다봄을 업은 건오가 지한을 지나쳤다. 그의 눈길이 그녀를 좇았다.

승훈과 하람은 그가 다봄을 업는 게 당연하다는 듯 두고 있었다.

그게 그가 비꼬았던 ‘평생 동생’이 차지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하람은 식당을 나오자마자 물었다.

“너 진짜 연다봄 집 비밀번호 알아?”

다봄을 고쳐 업은 건오는 순간 고민했다.

승훈이 그냥 한 말이라는 건 그도 알았다. 그러니 지금이 중요했다.

건오는 안다고 했을 경우와 모른다고 했을 경우를 빠르게 계산했다.

“몰라.”

“몰라?”

“모르지.”

일단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람만 있다면 모르겠지만, 승훈이 그를 보고 서 있었다.

“그럼 일단 너희들 집으로 데려가야겠다. 얘 내일 출근해야 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우리 집은 너무 멀어.”

대답을 잘한 것 같다.

“연하람, 얘 내일 일어나면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

“어, 그럼 우리 먼저 갈게, 형.”

“그래.”

승훈은 당연하게 먼저 온 대리 기사를 양보했다. 다봄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야, 근데 연다봄 어디서 재우지?”

조수석에 앉은 하람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다봄은 차가 출발하기 전부터 건오의 어깨에 기대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건오는 잘 보이지도 않는 다봄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내 방.”

“…….”

“내 방에 재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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