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25/72)

25.

월요일 9시 회의. 부대표의 입에서 파격적인 아이디어가 날아들었다.

팀원 중 한 명이 날짜를 확인했다.

“만우절은 아닌데…….”

그는 한 달이나 더 남은 만우절을 의심할 정도로 경악했지만, 당장 오후에 이벤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홍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다봄을 멍하니 보던 해수도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는 서지한 씨 에이전시에 연락하고 오겠습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팀원 셋은 1층 카페 직원들을 만나러 내려갔고, 둘은 광고 작업을 위해 자리로 돌아갔다.

모두가 제 할 일을 찾으러 가니 회의실엔 다봄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제 그녀도 그녀의 일을 해야 했다.

“네, 10시에 본사 9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에이전시가 있는 지한은 알아서 메이크업을 받고 오겠지만, 승훈은 아니었다.

출장 메이크업 아티스트까지 부른 다봄은 마지막으로 회의실 불을 껐다.

9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봄은 씩 웃었다. 왠지 느낌이 좋았다.

* * *

“아이디어는 괜찮은데, 너무 급한 거 아니냐?”

“기간 한정 상품이잖아요. 초장에 홍보해 놔야죠.”

회의가 끝나자마자 주혁을 찾아간 다봄이 얼른 결재해 달라는 듯 태블릿을 턱짓했다.

지난밤, 잘 준비까지 마치고 누웠던 주혁은 딸의 통보에 도로 일어나 30분 넘게 통화했었다.

“지금 시기에 너도나도 먹어 보고 싶게 만들어야지, 딸기 다 무를 때 홍보해서 뭐 하겠어요?”

“승훈이는 어떻게 꼬드긴 거야? 걔가 이런 거 할 애가 아닌데.”

“치트키 좀 썼어요.”

대표 결재 칸에 주혁의 서명이 새겨졌다. 다봄은 만족을 숨기지 않았다.

“마침 오빠 전화를 진서 언니가 받았거든요.”

주혁은 딸의 방법에 혀를 내둘렀다.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대책 없는 행동에 걱정이 되면서도 동시에 이런 추진력이 마음에 들었다.

“발 뻗을 곳은 있는 거야?”

“없어요. 진서 언니만 믿고 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애초에 그녀는 발 뻗을 곳을 보고 뻗은 것이다.

승훈은 뭐가 됐든 결국 다봄에게 져 줄 것이다. 주혁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매출 보고서로 인사드릴게요.”

“나 참.”

주혁의 사무실을 나온 다봄은 거의 뛰듯이 걸어 제 사무실을 찾았다.

* * *

다음 공판 날짜를 받고 재판이 끝났다. 건오는 망설임 없이 법원을 빠져나갔다.

이곳에서 늘봄까진 차로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서지한과 붙어 있는 꼴을 보려고 늘봄에 가는 게 맞나 싶지만, 보지 않으면 보지 않는 대로 멋대로 상상하게 될 테니 그냥 부딪히기로 했다.

“영수증 가져오셔야 합니다.”

고객 주차장에 주차를 맡긴 건오가 늘봄 본사 카페 문을 밀어젖혔다.

그리고 주문하기 전부터 몰린 사람들에 질색해야 했다.

“주문하신 딸기 라테 나왔습니다.”

지한과 승훈이 컵 홀더에 사인해 고객들에게 건네면, 그들은 그걸 사진 찍어 SNS에 올렸다.

오늘 맛본 음료의 후기를 작성한 고객 중 일부에게 소정의 선물을 주는 방식도 곁들였다.

“주문하신 딸기 라테…….”

“209번 고객님! 안 계세요?”

“주문하신 딸기 스무디 나왔습니다.”

건오는 복작복작한 사람들 틈 사이로 들어가 복층 계단을 올랐다.

그곳에서 고개를 몇 번 돌리니 하람이 보였다.

“재판은.”

“예상대로.”

“다음 공판 날짜는?”

“3주 뒤.”

아침 일찍 온 하람의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과 커피 잔 세 개가 놓여 있었다.

“두 잔은 내가 마신 거, 하난 아버지 거야. 잠깐 위에 올라가셨어.”

건오의 눈길에 하람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급하게 이뤄진 이벤트에 이례적으로 대표까지 내려왔고, 심지어 실질적 책임자는 혼란스러운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다.

게다가 점심시간이었다. 근처에서 일하는 회사원들이 점심을 먹은 후 다 늘봄으로 모였다.

그러니 인력이 총동원되어도 모자랐다.

“음료 너무 밀렸어요!”

“세영 씨, 음료로 들어가세요! 주문 하은 씨가 받아 줘요.”

음료 제조는 못 하지만 포스기는 다룰 줄 아는 본사 직원까지 투입됐다.

“어떡해요? 우유 다 떨어져 가요.”

“제가 사 올게요.”

“부대표님이요?”

“여기서 빠질 사람이 없잖아요. 기다려 봐요.”

다봄은 급하게 주방을 나가 고개를 들고 손을 위로 흔들었다.

많은 인파 틈에서 다봄을 찾아내 주시하던 건오가 그 모습을 보았다.

진작 하람과 인사했던 다봄은 동생을 찾은 건데, 건오와 먼저 눈이 마주쳤다.

“내려와, 내려와.”

다봄의 손짓에 건오는 몸부터 움직였다. 덕분에 하람도 뒤늦게 손을 흔드는 다봄을 발견했다.

“뭐야. 왜 저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 하람은 벌써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건오를 뒤쫓아갔다.

“우유! 판다 우유로! 아니, 일단 흰 우유 전부 다.”

“우유?”

“얼른. 건오는 길 건너 편의점 가고, 연하람 넌 뒤에 마트로 가.”

“아오, 연다봄.”

다봄을 흘겨본 하람이 벌써 매장을 나선 건오를 따라갔다.

다봄은 대로변에서 택시를 탔다. 가까운 대형마트에서 카트에 우유를 싣고 가장 빠른 시간으로 배송을 시켰다.

다봄이 돌아왔을 때, 하람은 냉장고 앞에 쭈그려 앉아 우유를 정리 중이었다.

“몇 개야?”

“몰라. 있는 거 전부 집어 왔어. 이거 정산해 주는 거야? 알바비는?”

“아빠한테 말해. 건오는?”

“걔랑 있으니까 좁아서 올려보냈어. 아버지는 다시 내려온 것 같던데.”

형, 누나가 저러고 있으니 하람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우유 정리를 자처했다.

다봄은 툴툴거리면서도 시키는 대로 다 하는 동생이 웃겼지만, 홀랑 올라가 버릴까 봐 꾹 참았다.

“잘했어. 그거 정리까지 다 해 줘!”

마지막까지 동생에게 당부한 다봄은 다시 밖으로 나가 주문 대기 중인 손님들의 줄을 정리하고, 실시간으로 떨어져 가는 컵들을 꺼내 채웠다.

음료 캐리어까지 접고 있으니 그제야 지한과 승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역시 대박 났어.”

그녀의 혼잣말을 아무도 듣지 못했다.

“딸기 라테 나왔습니다!”

일하는 자식들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던 주혁은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냈다.

“뭐 하세요?”

“네 엄마 보여 주려고.”

그는 카메라 어플을 켜곤 다봄과 승훈이 동시에 화면에 담기도록 한 장 찍었다.

그 후엔 유니폼을 입은 승훈만 확대했다. 확실히 진귀한 풍경이긴 했다.

“자본주의가 대단하다며 웃을 거다.”

그렇게 말하는 주혁도 이미 껄껄 웃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건오도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부모가 넷이나 있으니 아주 든든하겠네.’

건오에게 선하를 ‘네 엄마’라 지칭한 주혁은 제양과 그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도 그렇게 말해 주었다.

“1시간 시급이랑, 우윳값 주세요.”

마침 우유 정리를 다 하고 온 하람이 허리를 두드리며 의자에 앉았다.

과장된 행동에 맞춰 주혁도 지갑을 꺼내더니 금세 닫았다.

“회식해야겠다. 너희도 와라.”

“여기 회식에 우리가 왜 가요?”

“알바비랑 우윳값 받아야지.”

“현금이 좋아요.”

“말만 회식이지 그냥 밥 먹는 거야.”

하람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밑을 보고 있던 건오의 표정이 서늘하게 변해 갔다.

지한이 다봄에게 가 무언가를 말하더니, 곧 다봄이 다시 그를 찾아 무언가를 건넸다. 아마도 사인용 펜 같았다.

둘이 붙어 있던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건오의 속은 자격도 없이 뒤집혔다.

“회식 저희도 갈게요.”

“그래. 직원들하고는 방도 따로 잡을 거야. 승훈이가 얼마나 질색하겠어.”

“백건오, 왜 그래?”

“왜긴. 저녁 먹는 거야.”

건오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저녁은 무슨.

뜬금없는 대답이 여간 황당한 게 아닌 하람은 건오가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다봄이 늘봄 공식 SNS에 올릴 사진을 찍는 직원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장면이지만, 건오의 눈엔 그 사진을 찍기 위해 다봄이 지한을 계속 보는 게 거슬렸다.

“징글징글하다.”

하람은 건오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넌덜머리를 냈다.

주혁이 그런 하람의 말을 끊었다.

“저녁 약속 없으면 잔말 말고 와서 먹어.”

“한우 아니면 안 가요.”

결국 하람까지 승낙했다. 주혁은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점심시간 끝나니까 좀 빠졌네.”

주혁은 여전히 북적거리는 1층을 훑으며 일어섰다. 이제 그는 그의 일을 보러 갈 때였다.

“너희도 일하러 가 봐라. 회식 장소는 정해지는 대로 다봄이한테 보내라고 할 테니까.”

“네. 이따 뵐게요.”

“그래.”

주혁의 시선이 잠시 다봄과 지한을 오갔다. 그 모습을 발견한 하람이 눈썹을 움직인 참이다.

다봄이 갔던 대형마트 차가 매장 앞에 섰다. 금세 또 어수선해지자 대표는 눈길을 거두고 9층으로 올라갔다.

“가자.”

“응.”

건오도 이만 돌아갈 시간이었다.

“커피 한 잔 사고.”

자리를 정리한 건오가 1층으로 내려가 줄을 섰다. 하람은 비딱하게 서서 친구의 꼴을 응시했다.

조금 전보다 짧아진 대기 줄에 건오의 차례는 금방 왔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두 잔 가져가겠습니다.”

“7600원입니다. 멤버십 적립하세요?”

“그냥 주세요.”

“사인은 누구에게 받으시겠어요?”

“연승훈 선수요.”

근처에 있던 다봄은 안도했다. 건오가 혹시나 지한을 말할까 봐 줄을 설 때부터 걱정하던 참이었다.

아메리카노가 나오자 승훈이 눈으로 건오와 하람을 불렀다.

“형.”

“왜.”

“너무 잘 어울려.”

건오 옆에 있던 하람이 씩 웃으며 아메리카노를 받아 갔다. 물론 사인 따위 없었다.

승훈이 이게 뭔 짓이냐는 듯 건오를 응시하는데, 건오는 그가 아니라 그 뒤에만 시선을 두었다.

승훈이 제 뒤에 선 다봄을 보고는 낮게 속삭였다.

“백건오, 빨리 꺼져.”

“네.”

제 몫의 커피를 챙긴 건오가 몸을 돌렸다.

건오를 보고 있던 지한과 눈이 마주친 순간, 지한이 그린 듯한 눈웃음을 그렸다.

* * *

건오와 하람은 다봄이 문자로 보낸 고깃집으로 왔다.

“연주혁이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직원을 따라 가장 안쪽 방에 도착했다.

수고한 직원들은 직원들끼리 다른 방을 잡아 주고, 여긴 대표가 직접 부른 이들이 모여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자마자 맞은편 통유리 너머 물레방아가 눈에 띄는 곳.

하람이 물레방아에서 시선을 떼니 이미 모인 이들이 보였다.

주혁이 말했던 대로 다 아는 얼굴이긴 했다.

“어서 와요. 아깐 바빠서 인사도 못 했네요.”

주혁에게 술을 받던 지한이 하람을 반겼다. 하지만 하람은 인사를 받아 주기엔 너무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성큼성큼 하람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선 건오가 다봄의 옆에 앉아 버렸다.

그러니까, 다봄의 양옆으로 건오와 지한이 자릴 잡았다.

“건오 왔냐?”

“네, 아버님.”

“연하람, 너도 얼른 들어와.”

하람은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0